글: 뇌정직(賴正直)
제갈량은 역대이래로 충신의 대표인물로 받들어져 왔고, 천고에 모범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다른 견해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제갈량은 간신이고, 야심가이고, 음모가이며, 왕망, 조조 내지 나중의 사마소, 유유(劉裕)와 일구지학(一丘之貉) 즉 한통속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의 대부분은 인터넷글이며 수준도 천차만별이고, 영향력도 적다. 그러나, 상해대학 역사학과 주자언(朱子彦) 교수의 <성단에서 걸어내려온 제갈량: 삼국사신론)(중국인민대학출판사 2006년 12월 제1판)에서는 외관적으로 보기에 제대로된 학술저작이다. 주교수는 이 책에서 .제갈량에 대한 전통직인 이미지를 완전히 뒤집어엎었을 뿐아니라, 더 나아가서 제갈량은 기실 황제에 오르려는 야심을 지녔다고 논증하려 시도했다. 이에 대하여, 필자는 도저히 찬성할 수가 없다. 다수의 독자들도 주교수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검토하고 반박하기 전에 우리는 주교수가 어떻게 하여 이런 결론에 이르렀는지를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주교수의 논거는 주로 아래와 같다:
(1) 제갈량은 젊었을 때부터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제갈량은 가슴에 큰 뜻을 품고 있었다. 이 점은 의문이 없다. 그러나 주교수는 이렇게 생각한다: 제갈량의 뜻은 일반인이 상상하는 것을 훨씬 넘어선다. "천하를 쟁탈하고, 패왕지업을 건립하려는 웅심이 있었다" 이유의 하나는 이것이다: 제갈량은 일찌기 석도(石韜), 서서(徐庶), 맹건(孟建)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대들 셋이 벼슬길에 나선다면 자사(刺史), 군수(郡守)까지는 할 것이다." 세 사람이 제갈량에게 당신은 무슨 관직까지 오를 것인지 물어봤는데, 제갈량은 "웃기만 하고 말은 하지 않았다(笑而不言)."(삼국지 권삼십오 <제갈량전> 주인 <위략>). 주교수는 대담하게 추측한다. 제갈량은 왜 그저 웃기만 했을까? 왜냐하면 자사, 군수같은 류의 관직은 제갈량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큰 뜻은 실로 남에게 말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주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동한 말기는 정국이 혼란했고, 황제를 칭하는 자도 부지기수였다. 제갈량의 지향이 그들보다 못하단 말인가? 그저 남의 신하로만 남아 있어야 한단 말인가? 군왕이 되어서는 안된단 말인가?" 이를 통해서 단정한다. 제갈량은 처음부터 황제를 칭할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그의 권력의 길은 완전히 계획되고, 단계적으로 진행된 '음모'라는 것이다.
(2) 제갈량은 유비집단의 최고권력을 차지하기 위하여, 차도살인으로 관우도 죽이고, 기회를 틈타 법정으로부터 촉군태수의 직위도 빼앗았다. 나아가 '음모설'을 입증한다. 관우의 패망에 성도쪽에서는 군사 한명 보내지 않았다. 이는 기묘한 일이고 역사에서도 의문으로 여기는 부분이다. 장태염(章太炎)은 일찌기 제갈량이 관우를 죽였다는 설을 제기한 바 있다. 주교수도 그렇게 생각한다. 제갈량은 유비집단의 최고권력을 차지하기 위하여, 반드시 관우라는 관문을 넘어야 ㅎㅆ다. "형주를 잃을 지언정, 그래도 오나라사람의 손을 빌어 관우를 제거해야 한다" 법정에 대하여, 제갈량은 법정이 유비를 따라 한중을 북벌하러 가는 동안에, 심복인 양홍(楊洪)으로 하여금 법정의 촉군태수직을 대리하게 하고 군수물자조달을 책임지게 한다. 일이 끝난 후 양홍은 촉군태수직에 정식 취임한다. 이를 통하여 법정의 "외통도기(外統都畿)"(수도주변을 통할하는) 권리를 빼앗아 버린다. 주교수의 묘사로 독자들에게 남긴 인상은, 제갈량은 "야심"이 아주 크고, 깊이를 알 수 없다. 그의 권력의 길은 다른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계략과 음모로 가득 차 있다.
(3) 제갈량이 죽자마자 승상참군(丞相參軍), 안한장군(安漢將軍) 이막(李邈)은 후주에게 상소를 올려 이렇게 말한다: "제갈량은 곁에 병력을 집중시켜놓고 (身杖强兵), 낭고호시(狼顧虎視)했으며, 신뢰할만한 인물을 곁에 두지 않아서 신은 항상 위험하게 여겼다"(<화양국지> 권십 <광한사녀>). 소위 "낭고"라는 것은 늑대와 같이 몸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얼굴을 돌려 뒤를 볼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데 "비인신(非人臣, 남의 신하로 있지 않을)"의 상이라는 것이다. 사마의는 바로 이런 '낭고'의 상을 지니고 있다. 이막이 여기에서 '낭고'라는 말을 쓴 것은 그 뜻이 불측한 일을 도모했다는 것이다 주교수는 여기에 근거하여 이렇게 말한다: "제갈량은 집권때 당시 사람들의 눈에 군왕을 예로 모시고, 나라에 충성하는 모법으로 보여지지 않았다"
(4) 제갈량과 같이 고명(顧命)을 받은 이엄(李嚴)은 일찌기 제갈량에게 서신을 쓴다: "제갈량이 마땅히 구석(九錫)을 받아야 하고, 작위를 주어 왕(王)을 칭해야 한다"고(<삼국지> 권사십 <이엄전> 주인 <제갈량집>). 소위 "구석"은 서주(西周)때 "구명(九命)"으로 칭하던 것으로 고대제왕이 공로가 있는 신하에게 하사하는 9종의 예기(禮器)이다. 왕망이후, 구석은 권신이 선양받아 황위를 찬탈하는 도구가 된다. 조조는 바로 구석을 받고, 위왕을 칭한다. 그리고 나아가 아들 조비가 선양을 받는다. 이엄의 건의에 대하여, 제갈량의 회답은 이러했다: "나는 원래 동방의 하사(下士)이다. 선제(先帝)에게 잘못 쓰여져서 지위가 신하중 최고에 올랐고, 녹봉으로 백억을 하사받았다. 지금 적을 토벌하는데 공이 없고, 선제께서 나를 알아봐준 은해에 아직 보답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예전에 제나라 진나라때처럼 스스로 귀하고 크다고 한다면 그것은 의리에 맞는 것이 아니다. 만일 위를 멸하고 조예를 죽이고, 황제를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면 여러분들과 같이 승진한다면, 십명(十命)이라도 받을 수 있을 것인데 하물며 구사(九邪)는 말할 것도 없다." 주교수는 제갈량의 이 말은 기세가 대단하다는 것이다. 완전히 스스로 말한 "국궁진췌, 사이후이"라고 하던 사람의 말투가 아니다. 거꾸로 난신적자의 말이라고 할 수 있다.
(5) 제갈량과 후주의 관계는 실제로 좋지 못했다. 제갈량은 <출사표>에서 반복하여 각종 건의를 내놓는다. 심지어 후주의 대신임명까지도 간여한다. 주교수는 이에 대하여 이렇게 생각한다: 이는 "제갈량이 정권을 잡은 후 후주 유선은 눈에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지시하고, 걸핏하면 황제를 교육시켰다" 유비가 살아있을 때, 제갈량은 일찌기 후주에 대하여, "아량이 아주 크고 수양이 깊어 바라던 것 이상이다."(<삼국지>권삼십이 <선주전> 주인 <제갈량집>)라고 하였다. 그러나 북벌전날에는 제갈량이 다시 후주를 "나이가 어려서, 좋고 나쁜 것도 구분하지 못한다(富於春秋, 朱紫難別)"라고 말한다.(<삼국지>권삼십구<동윤전>). 그러므로 동윤을 보내어 궁중의 숙위친병을 통할하게 하고, 후주에게 "일의 크고 작음을 가리지 말고 모두 그에게 물어보십시오"라고 말한다. 주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이는 완전히 "기군(欺君)"의 행위이다. 나아가 이렇게 탄식한다: "세상사람들은 조조가 주군을 괴롭히고, 한헌제를 손바닥 안에 쥐고 있었다고 말하지만, 왜 제갈량의 기군행위는 보고도 못본척 하는가? 실로 이해하기 어렵다." 제갈량의 사후, 후주는 성도에 제갈량의 묘를 세우는데 동의하지 않는다. 주교수는 "솔직히 말해서, 이는 일종의 보복이다."라고 말한다.
(6) 제갈량의 사후, 촉한은 더 이상 승상의 직위를 두지 않는다. 나중에 집정자인 장완, 비위의 관직은 모두 대장군, 녹상서사이다. 이에 대하여 주교수는 자문자답하기를 이렇게 한다: "유선이 왜 승상제를 폐지하였을까? 이치는 아주 간단하다. 바로 절대로 다시 제2의 제갈량이 출현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하여 권력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것이다."
(7) 유비가 죽기 전에, 제갈량과 이엄 두 사람에게 탁고(托孤, 아들을 맡기다)한다. "이엄은 중도호, 통내외군사로, 영안에 주둔하라"(<삼국지 권사십 <이엄전>), 다만, "이런 정치국면은 제갈량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갈량은 "이엄을 타격하고 배척하는데 힘을 아끼지 않았다." 결국 이엄은 재동(梓潼)으로 귀양간다.
(8) 손권과의 외교왕래에서, 사자 등지(鄧芝)는 항상 제갈량을 언급했고, 제갈량도 자신의 명의로 손권과 대화한다. "외교적으로 완전히 유선을 무시했다."
(9) 제갈량은 임종전에 심복 장완, 비위를 후계자로 지정하는데, 이는 독단적으로 결정한 것이고, "후주와 상의하지 않았다."
(10) 제갈량의 5차북벌은 결론적으로 말해서 승산이 크지 않았다. 그러나 제갈량은 일생의 노력을 바친다. 왜 그랬을까? "제갈량 북벌의 목적은 구석을 받고 나아가 촉한을 넘겨받아 황제를 칭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제갈량 개인에 있어서, 북벌하지 않으면 그의 군사적 재능을 드러낼 수가 없고, 촉의 선비들이 마음으로 그를 따르지 않을 것이며 개인의 위망을 수립할 수가 없다. 최종적으로 황제의 보좌에 오르려는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다." 만일 북벌이 성공하면, "그는 자신의 공로가 높으므로 '재능없는' 유선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에 오르는데 두터운 정치적 자산을 갖게 되는 것이다." 주교수는 환온(桓溫)과 유유의 예와 비교하여, 제갈량의 방식이 환온등의 "입공하삭(立功河朔) 환수구석(還受九錫)"의 아이디어와 일치한다고 본다.
(11) 제갈량은 북벌전에 이미 일부 구석의 물건을 받았다. 후주는 "조서를 내려 제갈량에게 금부월 1구, 곡개 1개를 내렸다. 전후로 우보고취 각 1부를 내리고 호분(虎賁) 60인을 내린다." 부월, 호분은 바로 구석의 하나이다. '우보고취(羽葆鼓吹)는 구석중의 '악칙(樂則)이다. 그러므로, 제갈량은 북절전에 이미 삼석(三錫)을 받았다. 춘추시기의 패주 제환공보다도 일석이 많다.
당연히 주교수의 목적은 제갈량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제갈량이 한나라를 대체하여 황제에 오르는 것은 죄상으로 볼 수가 없을 뿐아니라, 오히려 역사의 조류에 순응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관점은 그 자체로 사람들이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이는 오대(五代) 시기에 군벌 안중영(安重榮)이 말했듯이, "천자에 씨가 따로 있는가? 병력이 강한 자가 하는 것이다!"라는 이론에 다름아니다. 제갈량이 황제가 되려고 했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제갈량을 폄하하는 작용을 한다. 그러나 다시 주제로 돌아와서, 제갈량이 과연 황제가 되려고 했을까? 우리는 주교수의 논거를 하나하나 따져보기로 하자.
(1) 제갈량이 "소이불언"한 것에 대하여 그가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되지 않으려고 말하는 것은 '포풍착영(捕風捉影)'의 느낌이 강하다. 동시대의 다른 많은 사람들이 칭왕칭제했다는 것으로 제갈량도 칭왕칭제하려 했다고 하는 것은 더욱 억지스럽다. 요즘은 도둑이 많은데, 그렇다고 하여 모든 사람들이 물건을 훔치려한다고 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아무런 근거가 되지 못한다. 이 주장은 성립되기 어렵다.
(2) 관우를 차도살인하고 법정의 직위를 빼앗았다는 것에 관하여,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주교수의 말대로 하더라도, 당시 제갈량은 아직 유비집단의 최고권력을 차지하지 못했다. 지위는 관우, 법정보다 낮았고, 심지어 미축(縻竺)보다도 못했다. 그런데 제갈량이 어떻게 관우를 지원할 것인지 말것인지, 법정을 교체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단 말인가? 법적 용어로 말하자면, 관우를 죽이고, 제갈량을 죽이는데 제갈량은 그저 '실행범'이고, 이 '실행범'의 뒤에 더욱 지배적 지위를 가진 '교사범'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유비이다. 관우는 사람됨이 오만하고, 안하무인이었다. 유비가 살아있을 때도 완전히 통제하지 못했는데, 하물며 그의 후손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후세를 위하여, 유비는 관우를 제거하기로 마음먹는 것도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만일 유비와 관우가 정말 형제같이 가까웠다면, 그는 당연히 형주로 구원병을 보내어 양양전투를 도왔을 것이다. 절대로 수수방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갈량이 '군사로서의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다'고 하여 유비가 그냥 자리에 앉아서 관우가 패망하는 것을 보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설마 유시가 허수아비라도 되는가? 법정에 관해서는 모두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만일 유비의 허가가 없다면, 제갈량은 아예 촉군태수와 같은 중요직위를 임명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삼국지>에서 이 일을 기록할 때 이렇게 쓰여 있다: "제갈량은 표를 올려 양홍이 촉군태수가 되도록 했다."(<삼국지>권사십일 <양홍전>). 제갈량은 스스로 결정한게 아니라 유비에게 보고서를 올린 것이다. 제갈량은 일처리가 조심성있다. 이는 모두 알고 있는 바이다. 유비와 사전에 얘기되지 않았다면, 제갈량이 이렇게 대담한 건의를 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법정의 직위변동은 분명히 유비의 뜻이다. 제갈량이 다시 '실행범'의 역할을 한 것일 뿐이다. 그리고 '교사범'은 유비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유비는 왜 법정의 촉군태수직을 빼앗았을까? 전여경(田餘慶) 선생은 <진한위진사탐미>)(중화서국 2-004년 중정본)에서 촉한신구지쟁(蜀漢新舊之爭)을 논하면서 우리에게 단서를 제공했다. 촉한의 유씨정권은 외래정권이다. 유비가 성도에 와서 황제에 오른 후, 통치칩단은 두개의 주요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나의 부분은 유비에게 투항해온 유장의 옛부하와 익주본토의 귀족들이다. 이들은 유비가 오기 전부터 성도에 거주했고, 현지에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지니고 있다. 유비가 통치를 실행하는데 그들의 역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들ㅇ느 "구인"이라고 할 수 있다.대표인물은 바로 법정이다. 그리고 나중의 이엄이다. 또 다른 일부분은 유비가 형주에서 데려온 사람이다. 인원수는 많지 않았다. 다만 조직에서는 핵심지위에 있다. "구인"에 상대적으로 말하자면 이들은 "신인"이다. 가장 전형적인 대표인물이 제갈량이다. 구인과 신인. 불가피하게 이익충돌과 갈등이 생긴다. 나아가 유비의 기본정책은 신인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신구관계를 조화롭게 하는 것이다. 이 정책은 나중에 제갈량에 의하여 계승된다. 이 큰 배경으로 보자면, 촉에서 발생한 많은 중대한 정치사건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법정을 예로 들면, 유비가 법정에 우호적이면 구인들이 좋아한다. 다만 법정이라는 사람은 인품에 큰 문제가 있었다. 한가지를 먼저 말하자면 그는 구주인 유장을 팔마먹고 부귀를 차지한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유비는 이런 사람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법정은 촉군태수가 된 이후에 "밥한끼 얻어먹은 은혜가 있거나 눈한번 흘긴 원한이 있으면 하나하나 모두 갚았다. 마음대로 죽이고 다친 인원이 여러 명이었다."(<삼국지> 권삼십칠 <법정전>). 소인득지(小人得志)의 모습을 보인 것이다. 제갈양은 그를 내버려두고 신경쓰지 않았다. 이는 당연히 제갈량이 그의 권세를 두려워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유비에게 이용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한중북벌때, 법정의 가장 핵심적인 관직인 촉군태수를 빼앗아 균형과 보상을 이룬다. 유비는 한중왕을 칭했을 때 법정을 상서령, 호군장군에 임명한다. 다만 법정은 얼마후에 우울하게 죽는다. 이것은 또한 설명한다. 법정이라는 사람은 체면을 중시하고, 허영심이 많았다. 기복이 있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사람을 잘 쓰는 유비는 이런 사람을 오래 쓰지 않는다. 결국 법정의 운명은 완전히 유비의 손에 장악되어 있었다. 제갈량은 그저 정책을 집행했을 뿐이다. 책임을 모조리 제갈량에게 돌릴 수는 없다. 만일 이것이 제갈량이 혼자서 짠 음모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정말 엄청나게 억울한 일일 것이다.
(3) 이막의 보고서만을 가지고 주교수는 "제갈량의 집정때 당시 사람들은 그가 주군을 예로 모시고, 나라를 위하여 충성한 인물로 보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그것은 아주 부당하다. 이 이막은 어떤 인물인가? 조사를 해보니, 이막은 광한(廣寒) 처(郪)의 사람이다. 유장(劉璋)때 우비장(牛鞴長)을 지낸다. 전형적인 "익주본토파"이다. 앞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촉한의 여러 중대정치사건은 모두 신구지쟁의 배경하에서 이해해야 한다. 유비, 제갈량이 집권한 시대에 구인은 탄압을 받았고, 제갈량이 죽은 후에는 아직 정책방향이 어디로갈지 모를 때였다. 구인들은 후주 유선의 뜻을 헤아리려 했고, 그래서 이막은 상소를 올린 것이다. 이막은 이렇게 추측했다. 후주와 제갈량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약간은 긴장되어 있었을 것이다. 후주는 아마도 자기의 주장에 동의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구인들은 국면을 뒤집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겼따. 다만 이막은 확실히 형세를 잘못 읽었따. 후주는 비록 멍청하기는 하지만, 신인이야말로 촉한집단의 지주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구인들이 마음대로 판세를 뒤집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당시 집정하고 있던 장완, 비위등은 구인들이 도전하는 것을 좌시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제갈량은 이막에 대하여 일찌기 구명지은이 있다. 성도를 처음 취했을 때, 이막은 설날아침에 술을 먹고 유비의 면전에서 질책했다. 당시 그를 죽일 수도 있었지만, 제갈량이 나서서 도와주는 바람에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제갈량이 죽자마자, 이막은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이런 행위는 후주도 싫어할 일이다. 그래서 이막은 결국 하옥되어 주살된다. 이는 특별히 기이한 일이 아니다. 주교수는 이막이 피살된 원인에 대하여 "주외기위(主畏其威)"라고 하여 후주 유선까지도 제갈량의 위세를 두려워했다고 하여, "일찌기 괴뢰군주였던 유선의 자존심을 아프게 찔렀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이런 주장은 당시 신구양파의 정치갈등을 무시하는 것이고, 너무나 겉핥기식의 분석이다. 제갈량의 당시 평가문제에 관하여, 진수는 <삼국지>에서 이미 명확하게 밝힌 바 있다: "권력을 독점했지만, 예를 잃지는 않았고, 군주가 해야할 일을 했지만, 나라사람들은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專權而不失禮, 行君事而國人不疑), "법을 멍하게 집행하였지만 나라사람들은 기꺼이 받아들였고, 백성들을 동원하여 힘들게 했지만, 아랫사람들이 원망하지 않았다"(行法嚴而國人悅服, 用民盡力而下不怨)(<삼국지>권삼십오 <제갈량전>). 이것이야말로 당시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이었을 것이다. 당시에 태어난 진수는 당연히 천년이후의 주교수보다 당시 사람들이 제갈량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더 잘 알았을 것이다. 주교수는 제갈량을 칭찬하는 많은 자료들을 손만 뻗으면 가져와서 볼 수 있었지만, 제갈량을 폄훼하는 자료 하나만 꽉 븥들고 자기의 주장을 펼친다. 이는 "어느 주전자든 끓지 않는게 있으면 그것만 든다"는게 아닌가.
(4) 이막의 고증(孤證, 유일한 증거)만으로는 확실히 제갈량을 타도하기 어렵다. 그래서 주교수는 다시 이엄이 제갈량에게 쓴 서신과 제갈량의 회신을 내놓는다. 이 두 통의 서신은 아주 대단하다. 이엄은 제갈량에게 구석을 받고 왕의 작위를 받으라고 권한다. 그리고 제갈량은 더더욱 시원스럽다. 십석도 받을텐데 하물며 구석이야라고. 멀리 왕망까지 가지 않더라도 조조는 바로 구석을 받은 후 자손이 황제의 자리를 빼앗는다. 이것은 두 사람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다만 제갈량은 구석에 대하여 진지하게 자신이 구석을 받는 것에 대하여 논한다. 그 뜻은 어디에 있는가? 보기에 이 문제를 제대로 해명하지 않으면 제갈량은 스스로의 결백을 인정받기 어려울 것이다. 실제로, 전여경 선생은 <진한위진사탐미>ㅇ서 이 문제를 아주 잘 해석해 놓았다. 전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유비로부터 '그대가 스스로 황제의 자리를 취해도 좋다(君可自取)라는 말도 있었다는 점을 먼저 생각하고, 다시 제갈량과 이엄간의 구석,십명과 같은 말이 오고간 것을 보면 이해가 쉽다. 유비로부터 정중하게 부탁을 받은 바도 있으니, 제갈량으로서는 이엄의 시험하는 말에 그다지 군신의 구분을 신경쓸 필요가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제갈량이 이엄의 말에 그렇게 대답한 실제적 이유이다." 이엄은 구인집단을 대표한다. 그래서 고의로 '구석'같은 민감한 말로 제갈량을 시험하려 했다. 그 뜻은 아주 음험하다. 만일 제갈량이 "정색을 하고" 거절한다면, 오히려 꼬투리를 잡힐 수 있다. 그래서 제갈량은 교묘하게 변통하여 논리적인 '귀류법(歸謬法)'으로 이엄에게 대답한 것이다. 이는 일종의 강한 어투로 반문하는 식의 회답이다. 요즘 말로 번역해서 말하자면, "만일 북벌에 성공하지 못하면 나는 자연히 구석을 받을 자격이 없고, 만일 북벌에 성공하면, 나는 십석도 받을 수 있다. 구석이 문제냐?" 그가 나타내고자 한 것은 "구석"을 별 것이 아니라고 여기는 멸시 내지 무시이다. 군신의 명분은 유비의 "군가자취"라는 말이 있으므로, 제갈량으로서는 그에 구애될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보면, 이엄 일당이 제갈량의 강경하고 교묘한 대답앞에 할 말이 없게 된 것이다. 여기서 "십명"(십석_)은 바로 '귀류(歸謬)"의 용법이다. 주교수는 그 교묘함을 알지 못했다. 멍청하게도 '십명"을 '구석'외에 '일석'이 더 해지는 것으로만 이해했다. 이는 천진하고 단순하다.
(5) 제갈량과 후주의 관계가 아주 좋지 않았다는 것에 대하여, 그 자체는 맞다. 다만 제갈량이 걸핏하면 후주를 교육시킨 것은 조조의 '기군(欺君)'과 같지 않다. 왜냐하면 제갈량은 그의 부친의 부탁을 받은 것이다. 만일 하자는 대로 따라서, 오나라의 고옹(顧雍)처럼 그저 좋은 사람으로만 행동한다면 그것은 선제의 부탁을 어기는 것이 될 것이다. 유비는 아주 분명하게 말했다. 유선으로 하여금 제갈량을 '아버지처럼 모시라'고 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을 훈계하는 것이 뭐 잘못된 것인가? 그리고 당시 사람들은 모두 제갈량은 "권력을 독점하였지만 예를 잃지 않았다"고 여겼다. 무슨 잘못된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이는 절대로 제갈량에게 야심이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
(6) 촉국이 더 이상 승상을 두지 않았다는 것에 대하여, 이것도 실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촉한은 동한의 법제도를 계승한다. 동한은 원래 승상이라는 직위가 없었다. 동탁이 상국(相國)을 맡고, 조조가 승상(丞相)이 되었다. 이는 모두 비상시기의 비상직위이다. <진서>에도 이렇게 말한다. 위진이래로 승상, 상국은 '모두 일반적인 신하의 직위가 아니었다.'(<진서>권이십사 <직권지>). 제갈량이 승상을 맡은 것도 비상시의 직위였다. 제갈량이 죽은 후, 이미 "비상시기의 신하"가 이 직무를 맡을 수가 없었다. 자연히 더 이상 두지 않은 것일 뿐이다. 주교수는 이를 가지고 후주가 대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취한 조치라고 보고 있다. 그것도 당연히 원인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단지 제갈량의 생전에 권력이 막강했다는 것이지, 제갈량에게 황제의 야심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모든 권신,중신이 황제가 되려고 했다고 할 수는 없지 않는가)
(7) 유비가 제갈량과 이엄을 동시에 보정으로 안배한 것은 그 뜻이 어디에 있었을까? 주교수는 이를 제갈량의 권력을 분산시키기 위함으로 본다. "제갈량이 정치를 담당하고, 이엄이 군사를 담당한다". 실제로, 이는 신구관계의 각도에서 이해해야 한다. 유비가 살아있을 때, 실행한 것은 "신인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신구관계를 조화롭게 한다"는 정책이었다. 구인은 많은 정도에서 억제받았다. 유비가 죽은 후, 구인들이 어떤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지나 않을까 하는 것은 유비가 걱정하는 바였다. 그래서 그는 이엄을 발탁한 것이다. 그리하여 구인집단으로 하여금 중용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 것이다. 동시에 이엄은 회유했고, 그로 하여금 제갈량을 도와서 신구관계를 잘 조화시키고록 한 것이다. 제갈량, 이엄 두 사람은 비록 동시에 '고명'을 받았지만, 구분은 명확히 있었다. 특히 유비는 제갈량에게 '군가자취'의 말까지 남긴다. 실제로 이엄등 구인집단에게 들으라고 한 말이다. 목적은 제갈량의 지위를 강화시켜 주는 것이고, 이를 통하여 전체적으로 신인집단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신인을 핵심으로 하는" 조직노선을 관철시켜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엄은 나중에 유비의 뜻에서 멀어져 제갈량과 동등한 지위를 차지하려고 한다. 그는 군대를 북벌하는데 내놓는 것을 거절하고, 강주에 성을 축성하고, 파주자사를 설치할 것을 요구한다. 제갈량과 마찬가지로 "개부치사(開府治事)"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요구한다. 이는 전체 촉한 신인집단이 용인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는 제갈량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이엄이 폐출된 것은 신구양파의 갈등의 결과이다. 제갈량이 혼자서 타격하고 배척한 것이 아니다.
(8) 손오와의 외교왕래에서, 제갈량은 확실히 자신의 명의로 손권과 대화한다. 이는 제갈량에게 "유선을 제외시키려는"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라, 손권이 걱정한 문제중 하나는 바로 "촉의 주군이 나이가 어리고 약하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연맹정책을 장기적으로 유지할 생각이 있는지에 대하여 제갈량이 직접 나서서 손권과 얘기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명의로 손권에게 보증하였다. 이는 바로 손권의 우려를 없애주기 위함이다. 이는 연맹에 유리했다. 만일 군신명의에 얽매었따면 오히려 오해와 불신을 없애는데 불리했을 것이다. 보정의 명을 받은 제갈량은 외교적인 대치국면을 타파하기 위하여 신축적인 수단을 사용한 것이니, 이는 완전히 합리적이고 뭐 움츠려들고 감출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9) 제갈량이 후계자를 지정하면서, "아예 후주와는 상의하지 않았다"는 점은 실로 억울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유선이 사람을 보내어 전선에 있는 제갈량에게 '국가대계'를 물은 것이기 때문이다. 유선은 전체적으로 봐서 멍청했다. 비록 어떤 때는 자잘한 수단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국가대사는 그가 처리할 수 있는게 아니었다. 그리고 제갈량의 생전에 그는 신경쓰지도 않았다. 이제 제갈량이 돌연 없어지니 그는 아마도 초조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쓸 지, 그는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물어본 것이다. 이것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주교수는 이를 근거로 소하와 비교한다. 한혜제는 소하에게 승상후계자인선을 물어본다. 소하는 결국 대답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서로 비교할 수가 없다. 소하가 권력을 장악한 정도는 제갈량과 같은 반열에서 논할 수가 없다. 그리고 소하의 말년에는 천하가 이미 안정되고, 국가에는 근본적인 우려사항이 없었다. 소하는 특별히 후계자를 지목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제갈량은 권력이 막강했고, 그가 동의하지 않으면 후임자는 아마도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 어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출사하여 승전을 거두지도 못했고, 먼저 총사령관의 장례를 치러야하는 특수시기에, 국면이 안정되지 않았으니, 능력있는 후계자를 지명하여 후방의 대국을 주재하도록 하는 것이 확실히 필요했다. 다시 말해서, 후주가 사람을 천리먼길 보내와서 물어보는데, 제갈량이 대답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이는 소하와 한혜제가 얼굴을 마주한 상황과는 또 다르다. 결론적으로 '독단전횡'의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10) 제갈량은 왜 북벌을 고집했을까? 이는 역대 역사가들이 오랫동안 계속 연구했으나 해답을 얻지 못한 난제이다. 여기에서 한 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그러나, 제갈량이 북벌과 환온과 같은 자의 "입공하삭, 환수구석"을 연결시키는 것은 상상력이 풍부하다고 볼 수 있는 것 외에 필자가 추가로 첨언할 말이 없다.
(11) 제갈량은 확실히 "부월", "호분", "우보고취"를 받았다. 다만 이게 무슨 문제를 설명하는가? 구석은 원래 제왕이 공신에게 내리는 하사품이다. 비록 나중에 그 기능이 변질되기는 했지만, 운용의 묘를 살릴 수 있다. 서로 다른 목적에 따라 구석은 서로 다른 경우에 쓰인다. 구석이라는 것만 가지고 선양을 생각하고 황제가 되려고 했다는 것을 생각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민감할 필요는 없다. 하물며 그가 받은 것은 구석의 일부분이었다. 실제로 나중에 양진시기의 많은 제후왕들 그리고 석포, 왕도, 도간등의 중신들도 황월, 호분, 반검, 우보고취같은 류의 물건을 받았다. 이들 물건은 공로를 치하하는 하사품의 역할을 한 것이지 황제를 칭하는 전주곡은 아니었다.
이상에서 말한 바와 같이, 주교수의 논거는 실제로 하나도 성립되지 않는다. 제갈량은 황제를 칭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혹은 더욱 엄격하고 더욱 완곡하게 말하자면, 제갈량이 황제를 칭하려고 했다는 증거가 아예 없다.
나는 역사를 전공하는 연구자처럼 역사서를 많이 읽지는 않았다. 전여경 선생의 <진한양진사탐미>는 내가 최근에 읽은 책이고, 느낌이 좋았던 책이다. 생각지도 못하게 그것을 읽은지 얼마 후에, 다시 주자언 교수의 <성단에서 걸어내려온 제갈량>을 읽었다. 제갈량의 문제에 있어서, 두 책의 견해는 비교적 큰 차이를 보인다. 진지하게 비교하고 검토한 끝에 나는 전선생이 견해가 비교적 깊이있고, 비교적 설득력있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전선생의 견해는 촉한의 신구양파의 싸움이라는 정치적인 배경하에서, 이를 단서로 하여 촉한에서 발생한 여러가지 사건들, 그 주요인물의 각종 행위를 설명하여, 합리적인 해석이라고 인정되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역사인물이 처한 사회적 환경을 고려하는 것이야말로 역사유물주의의 관점이다. 그런데, 주교수의 견해는 많은 경우 마음을 추단하고, 거저 추측할 뿐이다. 객관적인 정치, 사회요소에 대한 고려가 확실히 부족하다. 특히 촉한 통치집단 내부의 신구지쟁을 무시했고, 각종 정치사건에 대한 이해를 단순히 개인간의 권력다툼이나 감정싸움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포풍착영의 느낌이 있고, 많은 논점이 근본적으로 단단한 기초를 갖지 못했으며 순수히 상상력을 무한발휘한 것일 뿐이었다. 만일 추리소설이라면, 이렇게 쓰면 재미는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학술전문서적이라면 엄격함에 있어서 결함이 있다고할 수밖에 없다.
제갈량은 이천년이래 충신의 모범으로 받들어져 왔다. 그러나 회근 들어, 돌연 이에 의문을 품는 사람이 나타난다. 이것은 무엇을 설명하는가? 내 생각에 사회적 도덕가치가 붕괴된 결과일 것이다. 전통적인 충(忠), 의(義), 성(誠), 신(信)등의 기준을 사람들은 더 이상 신봉하지 않는다. 각종 기담괴론(奇談怪論)이 횡행하고 있다. 과거에 사람을 "깡패"라고 하면 그것은 욕하는 말이다. 현재의 사람들은 오히려 당당하게 얘기한다: "나는 깡패이다 두려울 것이 없다." 오히려 자랑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것은 전통도덕의 붕괴, 가치기준의 전복을 의미한다. 제갈량은 아무런 이유없이 의심받고 있다. 이것도 이런 사회배경하에서 나타난 것이다. 제갈무후의 문장, 사적은 일찌기 감동적이고, 많은 국내외의 지사들을 고무시켰다. 그리하여 그들 마음 속의 모범이 되었고, 그들이 이상을 위하여 분투하도록 격려했다. 악비는 일찌기 전후 <출사표>를 쓰면서 이를 좌우명으로 삼았고, 일본의 메이지천황은 일찌기 이런 말도 했었다고 한다: "<출사표>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는 사람도 아니다." 현대의 중국인들은 그러나 <출사표>에서 "권력찬탈" "야심" "음모"를 읽고 있다. 심지어 제갈량이 황제가 되려고 했다는 "깜짝 놀랄만한 비밀"을 발견하기도 한다. 도대체 누구의 머리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제갈량인가 아니면 제갈량을 해석하는 사람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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