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선진)

"조씨고아(趙氏孤兒)" 고변(考辯)

중은우시 2015. 2. 23. 02:42

글: 조영우(趙寧宇)

 

<사기>권43 <조세가(趙世家)>(이하 <조세가>라 약칭함)의 기록에 따르면, 조씨의 선조는 진경공(晋景公) 3년(기원전597년) 일찌기 족주(族誅, 일족이 주살당하다)의 화를 당한다. 조삭(趙朔)의 유복자 조무(趙武)는 공손저구(公孫杵臼)와 정영(程嬰)의 비호하에 요행히 화를 면한다. 나중에 조무가 자라서, 한궐(韓厥)등의 지지를 받아 조씨종위(宗位)를 회복한다. 이 역사이야기는 송,원교체기에 극본 '조씨고아'로 만들어져서 광동에서 전해지고, 거의 삼척동자도 아는 이야기가 된다. 다만 이 사건의 내용의 얼마나 진실일까? 학자들의 견해는 서로 다르다. 만사대(萬斯大)의 <학춘추수필(學春秋隨筆)>에서는 "영공지적(靈公之賊)을 치죄하는 것에서 조순(趙盾)에 이르기까지" "<좌전.의 기록을 종합해뵤면 확실히 근거가 있다. 아마도 당시에 (장)희가 참언을 하여 조동(趙同), 조괄(趙括)을 모함하여, 영공을 시해한 사건과 합쳐서 처벌한다. 조순도 추궁하게 되어, 그의 집안을 멸족시키려 한다. 조무는 아직 어려서, 모친이 공궁(公宮)에 은닉하여 화를 면한다" 심흠한(沈欽韓)은 <춘추좌씨전보주>에서 <좌전> 선공2년에 기록한 것을 근거로 이렇게 본다: "조순은 조괄을 공족대부로 하여 조씨종족의 주(主)였다. 이때 조괄이 피살되고, 조씨종족의 제사는 폐기된다. 그래서 나중에 한궐이 '무후(無後)'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이전에 조무는 조괄에 의탁했고, 조괄이 피살되자 의탁할 곳이 없어져서, 할 수 없미 모친을 따라 외삼촌의 집에서 자란다." 그러나, 양백준(楊伯峻)은 만사대, 심흠한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두 설은 거의 모두 믿기 어렵다." 그리고 나아가서 이렇게 말한다: "<조세가>에서 기록한 조씨가 멸족되고 조무가 복위항ㅆ다는 것은 모조리 전국시대의 전설이다. <좌전>, <국어>와 서로 달라서 믿을만한 역사기록이 아니다."(양백준의 <춘추좌전주> 노성공9년(기원전583년)에 나온다. 그리고, 청나라 양옥승의 <사기지의> 권23 진경공3년조에도 역시 이 일은 '황당하여 믿을 수 없다. 그리고 소위 도안가, 정영, 저구는 아마도 그런 사람이 없을 것이다. 운운). <산서사대학보>1987년 제2기에 실린 양추매(楊秋梅)의 <"조씨고아"본사고>에서도 약간의 참고할만한 새로운 견해를 내놓았다. 그러나 여전히 검토할 점이 남아 있다. 만사대, 심흠한은 조씨고아의 이야기의 신뢰도가 반반이라고 보았으나, 양백준 선생은 모조리 전국시대의 전설이라고 하였다. 그 진상을 밝히기 위하여 역사의 원래의 면목으로 환원시켜야 하고, 사적이 기재된 조씨족주의 관련자료를 분석하고 고증해보아야 한다.

 

첫째, 조씨족주와 조무복위의 시간에 관하여. <조세가>, <사기>권44<한세가(韓世家)>(이하 <한세가>라 약칭함)에서는 도안가(屠岸賈)가 조시일족을 멸족시키는 건에 관하여 진경공3년(기원전597년)이라고 했다. 15년후, 즉 진경공17년(기원전583년)에 다시 조씨고아 조무가 복위한다. 다만, <춘추>, <좌전>, <사기>권39<진세가(晋世家)<이하 <진세가>라 약칭함)등에서 기록한 것은 서로 다르다. <춘추>에는 노성공8년에 이렇게 기록한다: "진나라에서 대부 조동, 조괄을 죽였다." <좌전>에도 같은 해에 이 일을 더욱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진(晋)의 조장희(趙莊姬)는 조영(趙嬰)이 죽은 것으로 인하여 진후(晋侯)에게 참언하여 말하기를 '조동, 조괄이 반란을 일으키려 합니다". 난(欒), 극(郤)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육월, 진은 조동, 조괄을 친다. 그리고 그의 전답을 기해(祁奚)에게 준다. 한궐이 진후에게 아뢴다. "조쇠은 공훈이 있고, 조순은 충성스러운데, 후사가 없다....." 그래서 조무를 세우고, 그의 전답을 돌려준다.

 

<좌전>에서도 조괄이 피살된 것은 노성공8년(기원전583년) 육월이라고 한다. 시간이 더욱 구체적이다. <진세가> 경공17년조에는 "조동,조괄을 주살하고, 일족을 멸했다. 한궐이 말하기를 '조죄, 조순의 공을 어찌 잊겠습니까. 어찌 제사를 끊을 수 있습니까.' 그리하여 조서자무(趙庶子武)를 조씨집안의 후에로 하여, 읍(邑)을 돌려주었다." <사기.십이제후연표>에는 진경공17년조에서 역시 이렇게 적었다: "조무에게 전읍(田邑)을 되돌려주다." 이를 보면, 조씨족주의 시간은 진경공17년(기원전583년)이지, 진경공3년(기원전597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진경공4년에서 16년까지(기원전596년-기원전584년)까지의 사이에, 조씨가족구성원의 활동은 사적에 많이 보인다. <좌전> 선공15년(진경공6년, 기원전594년)에는 "진후가 조동을 사신으로 보내어 오랑캐포로를 주(周)에 바쳤다." 노성공3년(진경공12년, 기원전588년): "한궐, 조괄, 공삭, 한천, 순추, 조전은 모두 경(卿)이다." 노성공4년(기원전587년): 진 조영은 조장희와 사통했다." 노성공5년(기원전586년): "원병방제제(原屛放諸齊, 여기서 원은 조동, 병은 조괄을 가리킨다)", "추팔월(秋八月), 정백과 진나라 조동이 수극에서 동맹을 맺다." 노성공6년(기원전585년) "조동, 조괄이 전쟁을 하려 하다"(<춘추좌씨전>). 조괄 조전(趙旃)이 경이라는 것은 <진세가> 경공12년(기원전588년)조에도 나온다. 이들 기록은 모두 설명한다. 조씨족주는 진경공17년(기원전583년)이전에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을.

 

어떤 사람은 조씨족주와 조무복위가 1년내에 이루어졌다는데 의문을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확실히, 조씨족주로 그 전읍은 기씨에게 넘어가고, 조무가 복위하고 다시 원래의 전읍을 회복한다. 이 기간에는 과정이 필요하다. 조동, 조괄은 노성공8년(기원전583년) 육월에 피살된다. 그렇다면, 겨우 반년의 시간내에 이 순환이 완성된다는 것은 너무 짧은 점이 있다. 양백준 <춘추좌전주>에서 성공8년조에 이렇게 추측한다: "<조세가>에 따르면, 한권리 진경공에게 조무를 복위해줄 것을 권했는데, 이는 분명 2년후인 진경공이 병을 앓을 때일 것이다." 양선생이 이렇게 추단한 이유는 바로 <조세가>에서 조씨가 진경공3년(기원전597년) 피살된 후, "15년(즉 진경공17년)을 거하고 진경공이 병이 나서, 점을 치니, 대업이후 불수자가 빌미가 된 것이다(大業以後不遂者爲祟)....그리하여 경공은 한궐과 조씨고아(즉 조무)를 복위시킬 것을 논의한다." (<사기>권45<한세가>진경공17년, 병, 복대업지불수자위수(卜大業之不遂者爲祟), 한궐이 말하기를 조동의 공이 있는데, 이제 후사가 없다. 경공이 공감하고, 묻는다: '아직도 세상에 남아 있는가', 한궐은 조무가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조씨의 옛 전읍을 돌려주고, 조씨의 제사를 잇게 한다." 그리고 양옥승의 <사기지의> 권23조에도 역시 이렇게 본다: "경공은 병이 들어 죽는다. 19년간 재위한다. <진세가>에 기록한 것이 맞다.") 그리고 <좌전> 노성공10년(진경공18년, 기원전581년)과 <진세가>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진경공의 이 큰 병은 19년(기원전581년)에 일어났고, 17년(기원전583년)이 아니다. 그래서 조무복위는 진경공19년이라고 추단한 것이다(<좌전> 성공10년에는 진경공이 "몽대려(夢大厲), 피발급지(被髮及地), 박응이용(搏膺而踊), 왈(曰): '살여손(殺余孫), 불의(不義), 여청어제의(余請於帝矣)! 양대문급침문이입(壤大門及寢門而入)' 공구입어실(公懼入於室)" 양백준은 <춘추좌전주>의 '살여손'에 이렇게 주석을 달았다: '마땅히 8년(노성공8년, 진경공17년) 진후가 조동, 조괄을 죽인 일을 가리킨다. 진경공이 꿈에 본 악귀는 분명 조씨조상의 환영이다. 여기서 손(孫)은 광의로 후대를 가리킨다. <조세가>에 이 일을 기록하고 있는데, '진경공질(晋景公疾), 복지(卜之), 대업지후불수자위숭(大業以後不遂者爲祟)'이라고 했다. 꿈은 점의 징조이다. <좌전>과 역간 다르다. 다만, '대업지후'는 조씨선조를 가리킨다." 진경공의 이꿈은 조무의 복위와 관련이 있다. 그것은 19년이다. 그러니 조무복위는 당연히 이 때이다). 필자는 양백준 선생의 이 추단에 찬성한다.

 

둘째, 조씨족주의 원인에 관하여. <조세가>, <한세가>는 사구(司寇) 도안가가 진령공피살사건을 추궁하기 위하여, "군주에게 말하지도 않고, 임의로 여러 장수를 데리고 하궁으로 조씨를 공격하여, 조삭, 조동, 조괄, 조영제를 죽이고 그 일족을 멸족시켰다"고 한다. 이 기재는 세 가지 점에서 분명히 밝혀야 할 점이 있다.

 

(1) 도안가라는 사람이다. <조세가>에 따르면, 도안가는 진영공때 총애를 받았고, 진경공때 사구가 되었다고 한다. 그가 감히 진경공에게 고하지도 않고 임의로 조씨일족을 죽일 수 있었고, 처벌도 받지 않은 것을 보면, 국정은 전횡하던 권신으로 보인다. 다만 <진세가> 영공, 성공, 경공시기의 모든 기록에서 그는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춘추좌전>에도 그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더더구나 그가 여러 장수를 이끌고 조씨를 토벌한 일은 나오지 않는다. <좌전>과 <진세가>에 따르면, 최소한 진경공17년이전에, 진나라에서 세력이 비교적 컸던 경대부는 난씨, 한씨, 극씨, 조씨였다. 만일 도안가가 권신의 중요한 자리에 있었다면, <좌전>과 <진세가>에서 이렇게 빠트렸을 리가 없다. 최소한 진나라의 일부 중대사건을 기술할 때 이름이 나왔어야 한다.

 

(2) 조씨족주를 가져온 직접원인이다. 앞에서 인용한 <좌전>에는 "조장희는 조영이 죽은 것으로 인하여 진후에게 참언하여 말하기를 '조동, 조괄이 반란을 일으키려 합니다' (欒), 극(郤)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육월, 진은 조동, 조괄을 친다." <국어.진어육>에서 한궐의 말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러하다: "예전에 나는 조씨를 숨겨주었다. 조맹희가 참언을 했다. 내가 병사를 피할 수 있었다."(<좌전>노성공17년에 기록된 한궐의 말은 <국어.진어구>에 기록된 지백의 말과 같다) 조장희가 진성공의 딸이고, 조삭의 처이다. 조영은 바로 조영제이다. 누영(樓嬰)이라고도 한다. '조영이 죽은 것으로 인하여'라는 말은 조영제가 조동, 조괄에 의하여 유배를 가서 죽은 일을 말한다. <좌전> 노성공4년(기원전587년)에는 이렇게 말한다: 진나라의 조영은 조장의와 사통했다." <좌전> 노성공5년(기원전586년)에는 다시 이어받아서 이렇게 쓴다: "

 

조동, 조괄은 조영을 제나라로 유배보낸다. 조영이 말하기를 "내가 있으니 난씨가 설치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없으면 두 형이 걱정된다. 그리고 사람은 각자 잘하는 것도 있고 못하는 것도 있다. 나를 놔둔다고 하여 무슨 해로운 일이 있겠는가" 그러나 둘은 듣지 않는다. 조영은 꿈에서 하늘의 사신이 자신에게 말하는 것을 듣는다: "나를 제사지내라. 나는 너에게 복을 줄 것이다." 여러 정백에게 물어보니 정백이 말하기를 '모른다' 그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신은 어진 사람에게 복을 내리고 음탕한 사람에게 화를 내린다. 음탕하고도 벌을 받지 않으면 복이다. 제사라는 것은 죽는 것이 아닌가" 제사를 지내고 다음 날 죽는다.

 

조영제는 조쇠의 아들이다. 조동, 조괄과는 동모형제이고, 조삭의 부친 조순은 이모형제이다.(<사기>권43<조세가>, <좌전>희공24년), "조영은 조장희와 사통한다" 이는 남편의 숙부와 조카며느리의 간통이다. 난륜행위에 속한다. 그러므로 조영제는 그의 두 형에게 쫓겨나서 죽게 되는 것이다. 조장희가 조동, 조괄이 반란을 꾀한다고 무고한 것은 조영제를 유배보낸데 대한 보복일 것이다. 당연히 조장희에게 다른 생각이 있었다는 것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조씨종족내부의 적서지위의 변화를 보면, 친아들인 조무에게 종위를 회복시켜 적통을 빼앗겠다는 생각이 있을 수 있다. 심지어 이것이 그녀가 무고한 진정한 의도일 수도 있다. 과연 그렇다면, 조동, 조괄이 피살된 것은 실제로 조씨가족내부의 족권(族權)다툼의 결과일 뿐이다. 당연히 이는 일종의 추측이다). 그저 이것은 필자가 조찌종위를 쟁탈하는 문제에 관한 하나의 추측일 뿐이다.

 

우리는 생각한다. 조장희의 무고는 단지 조씨족주의 기인(起因)일 뿐이라고. 난씨를 우두머리로 하는 여러 경의 반대세력이 연합한 것이 조씨일족을 멸문시킨 중요한 요소이다. 조영제가 말한 소위 "내가 있으니 난씨가 설치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없으면 두 형이 걱정된다.". <좌전> 양공23년(기원전550년)에도 이렇게 말한다: "조씨는 조동, 조괄의 죽음으로 난씨를 원망했다" 이것은 모두 진나라내부에 조씨와 난씨간에 갈등이 존재했을 뿐아니라, 이미 첨예화, 표면화되어, 일촉즉발의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조장희가 진경공에게 조동, 조괄을 무고한 후, 난씨, 극씨가 이 기회를 틈타서 조장희를 도와준다. 그리하여, 진경공은 조동, 조괄일족을 주살하게 되는 것이다. 난씨, 극씨가 기꺼이 조장희를 도운 것은 실제로 차도살인이다. 이를 통하여 조씨를 배제하려 한 것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진경공시기에 세력이 비교적 강한 경대부에는 순씨, 사씨, 난씨, 극씨, 한씨, 조씨등이 있다는 것을. 그중 장중군(將中軍)이 국정을 많이 장악했다. 진경공13년(기원전587년) "난서장중군(欒書將中軍)"이후(<춘추><좌전>노성공4년), 그는 두번이나 군대를 이끌고 정(鄭)으로 간다. 한번은 정을 구원하고, 한번은 채를 침공한다(<춘추><좌전>노성공4년), 그는 진나라의 주요 정책결정권자의 하나였다. 그와 극씨는 진경공이 조씨일족을 주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만일, 진경공이 조씨일족을 멸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한 사람을 꼽자면 그 사람은 난서이지 도안가가 아니다.

 

(3) 조삭, 조동, 조괄, 조영제는 동시에 죽었는가? 위에서 인용한 <춘추>, <좌전>, <진세가>, <국어>등에 따르면, 진경공이 주살한 대상은 조동, 조괄이다. <좌전>에는 다시 조영제는 이전인 노성공5년(기원전586년)에 죽었다고 한다. 조삭은 언제 죽었는가? 사료에 명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사적에 나오는 그의 활동을 보면, 연대를 고증할 수 있는 때는 진경공3년(기원전597년)이다. 즉, "조삭장하군(趙朔將下軍), 난서좌지(欒書左之)"(조삭이 하군을 지휘하고, 난서가 보좌했다)(<좌전>노선공12년, <사기>권39<진세가>, <사기>권43<조세가>). 진경공11년(기원전589년)에는 다시 "난서장하군(欒書將下軍), 한궐위사마(韓厥爲司馬), 이구노위(以救魯衛)"이라는 말이 나온다.(<좌전>노성공2년, <사기>권39<진세가>). 양백준은 이렇게 주석을 달았다: "이때 조삭은 혹은 이미 죽었다. 그래서 하군좌 난서가 승진한 것이다." 그외에 <좌전>노성공4년(진경공13년, 기원전587년)을 보면 조영제가 조장희와 사통한 일이 기록되어 있고, 다음 해 조동, 조괄이 이 일로 조영제를 제제할 때, 조삭이 나타나지 않는다. 하물며 <좌전>에서는 조삭의 처를 "조장희"라고 불렀다 "장"은 바로 조삭의 시호이다. 이는 모두 조삭이 이전에 이미 죽었다는 것을 입증한다.(양백준 <춘추좌전주>노성공4년). 결론적으로 조삭은 조동, 조괄이 피살되기 전에 죽었다. 정상적인 사망에 속한다. 고로 조삭, 조동등 숙질4명은 같은 시간에 죽었을 수 없다.

 

그들 4명이 동시에 죽지 않았고, 조삭의 아들 조무는 평안무사하다. 이는 나아가 이런 사실을 설명해준다. 소위 조씨족주는 실제로는 조동, 조괄 두 지족(支族)이 피살된 것을 말한다. 한궐이 "조동의 공훈, 조괄의 충성에도 불구하고 후사가 없다"는 말은 조씨에게 적통을 계승한 종자(宗子)가 없다는 말이다. 그들의 자손이 세상에 남아있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최소한 조삭의 아들 조무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은 알았다. 또한, 우리는 알고 있다. 조무의 손자 조간자(趙簡子)가 한단대부 조오(趙午)(한단오라고도 한다)를 격패시킨다는 것을. 조오는 조씨의 또 다른 지족인 조천(趙穿)의 자손이다.(공영달 <춘추좌전주소>에서 인용한 <세족보>). 이 일은 조찬의 지족은 '족주'를 당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보면, 조씨족주는 조씨 전체가족이 모조리 피살된 것이 아니라, 조씨의 적전정종일족이 주살을 당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셋째, 조삭과 정영의 관계에 관하여. <조세가>에 따르면, 조삭은 조순의 아들이다. 그에게는 "공손저구라고 부르는 객"과 "정영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조삭이 피살되자, 정영과 공손저구는 조삭의 고아를 어떻게 위험에서 빠져나오게 할 수 있을지를 논의한다. 최종적으로 정영이 거짓으로 밀고를 하고 공손저구와 가짜 '고아'가 피살되는 일이 일어난다. 나중에 고아 조무가 복위하고, "정영은 여러 대부들에게 하직인사를 하면서 조무에게 말한다: '옛날에 하궁의 난때, 모두 죽을 수 있었다. 내가 죽지 않은 ㄳ은 내가 조씨의 후예를 세워야겠다고 생각해서이다. 이제 조무가 세워졌고, 성인이 되었으며 옛 자리를 찾았으니, 나는 조선맹과 공손저구에게 보답한 셈이다." 정영은 조삭의 친구이므로 그가 '보답'하는 대상은 당연히 조삭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조세가>에는 특별히 조삭과 정영이 친구관계라고 적었다. 그리고 조순과의 관계는 적지 않는다. 그가 말한 '조선맹에게 보답했다'는 말은 상리에 부합되지 않는다. 이를 보면, <조세가>의 서술은 스스로 모순이다. 정영, 공손저구에 관한 모순된 기록은 이뿐만이 아니다. <한비집석>에서 수록한 <화상공자등자제자>에서는 "정영, 저구는 조삭의 가신이다"라고 하여 정영도 조삭의 가신으로 적었다. <원화군현도지>권12 하동도강주태평현조에는 "진공 저구, 정영묘는 모두 현의 남쪽이십리 조순 묘영에 있다." 공손저구, 정영묘가 모두 조순의 묘영에 있다면, 이는 두 사람과 조순의 관계가 종속관계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혹은 두 사람은 모두 조순, 조삭 이대의 가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조장희와 조무에 관하여. <조세가>에는 이렇게 말한다, 조삭은 "진성공의 누나를 부인으로 취한다". 조씨족주때, "조삭의 처는 진성공의 누나인데, 유복자가 있었다....조삭의 부인이 자식을 낳으니, 아들이었다." 즉 이 사내아이가 바로 조무이다. <진세가>에는 그를 "조서자(趙庶子)"라고 불렀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조장희가 진성공의 누나라는데 이미 회의적이었다. <춘추좌전주>성공4년(기원전587년)의 주석에는 이런 말이 있다:

 

<조세가>에 조삭의 처는 진성공이 누나라고 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조장희는 진문공의 딸이 된다. 희공24년전에 따르면,조쇠의 처가 진문공의 딸이다.만일 사마천이 한 말대로라면, 조삭도 마찬가지로 진문공의 딸을 취한다. 즉, 할어버지와 손자가 각각 자매중 하나씩을 취한 것이 된다. 이는 정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가목규, 복건은 모두 조장희를 진성공의 딸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비교적 합리적이다. 사마천은 아마도 전국시대의 이설을 잘못 취한 것일 것이다. 양옥승의 <사기지의>에서는 <사기>에 오자가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필연적이다. <신서.절사편>에서도 '조삭의 처는 성공의 누나이다'라고 했는데, 아마도 여기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조무를 서자(庶子)라고 했을까? 이는 조시가족내부의 적서지위의 변화부터 얘기해야 한다. 조무의 부친, 조부, 증조부는 각각 조삭, 조순, 조쇠이다. <조세가>에 따르면, 조쇠가 처음에 진문공 중이를 모시고, 중이가 즉위하기 전에, "여희의 난때 적(翟)으로 도망치고, 조쇠가 따라간다. 적국(翟國)은 장구여국(廧咎如國)을 정벌하고 두 딸을 얻는다. 적은 작은 딸을 중이의 처로 주고, 큰 딸을 조쇠의 처로 주어, 조순을 낳는다. 처음에 중이가 진나라에 있을 때, 조쇠의 처는 조동, 조괄, 조영제를 낳았다. 조쇠는 중이가 도망친 후 19년만에 귀국한다.....진처(晋妻)는 적처(翟妻)를 받아들여주고, 그의 아들 조순을 적사(嫡嗣)로 삼는다. 진처의 세 아들이 모두 그를 모셨다." 여기에서 말하는 '적이 그 작은 딸을 중이의 처로 주고, 큰 딸을 조쇠의 처로 주었다"는 것은 <좌전>희공23년(기원전637년)의 기록과 같다. <진세가>에서는 그러나 큰 딸을 중이의 처로 삼고, 작은 딸을 조쇠의 처로 삼았다고 기록한다. <조세가>는 조쇠가 중이가 도망치기 전에 이미 처자식이 있었다고 한다. 귀국후에도 전처는 적처를 받아들여, 적처가 낳은 아들 조순을 적사로 삼았다고 한다. <좌전>희공24년(진문공원년, 기원전636년)에는 조쇠가 귀국한 후, 문공이 조쇠에게 처를 주고, 원동(原同), 병괄(屛括), 누영(樓嬰)을 낳는다. 조희는 조순과 그의 모친을 맞이할 것을 청하나, 자여(子餘, 조쇠의 자)는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자 조희가 말한다: '새로 총애하는 여자가 생겼다고 옛 여자를 잊어서는 어떻게 사람이라 하겠는가. 반드시 맞이해야 한다'라고 강력하게 청하자 이를 허락한다. 조순과 모친이 오고나서 조순의 재주가 있는 것을 보고 그를 적자로 삼고, 그녀가 낳은 세 아들을 그의 아래에 처하게 한다." 조동, 조괄, 조영제의 삼형제는 식읍이 원, 병, 루의 세 곳이므로 원동, 병괄, 누영이라고 했다. <조세가>네는 조쇠가 조희를 취한 것이 중이가 도망가기 전이라고 했는데, <좌전>에서는 그 후라고 하였다. 도대체 둘 중 어느 것이 맞을까? 양백준은 이렇게 생각한다: "조희의 말은 '새로 총애하는 여자가 생겼다고 옛 여자를 잊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는데 이는 조쇠가 자신을 얻은 것은 이미 숙외(도망후 적처, 즉 조순의 생모를 취한 것)이후라는 것을 설명한다. 조순은 노선공7년,8년(기원전602년-601년)에 죽는다. 노성공5년(기원전585년)에 원동, 병괄이 영제를 유배보내고, 노성공8년(기원전583년)에 진이 조동, 조괄을 토벌한다. 이를 보면 조희의 세 아들이 모두 조순보다 어린 것으로 보인다."  양선생은 조희를 취한 것이 뒤라는 쪽이다. 이에 따르면, 조순의 생모는 원래 오랑캐이고 조희는 진문공의 딸이다. 당연히 조쇠의 정실부인이 되어야 한다(양백준 <춘추좌전주> 노희공24년에서는 조희가 조쇠의 적처를 '내자'라고 하는데 이는 정실부인이라는 말이다. 심흠한의 <춘추죄전보주>인성공2년, 조순은 조희를 '군희씨(君姬氏)라고 부르는데, 조순은 여전희 조희를 적모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희가 정실부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조희가 낳은 아들이 당연히 조종(趙宗)을 이어야 했으나 조순이 재능이 있고, 여기에 조희가 겸양하여 그를 적자로 세우고, 조씨의 종주승계인이 된다. 조쇠가 죽자, 그가 부친을 이어 종족의 업무를 보며 먼저 진영공, 진성공을 세워서 진나라에서 가장 세력있는 경대부가 된다.

 

진영공의 사후, 조씨가족의 지위는 다시 올라간다. 내부의 적서지위에도 변화가 생긴다. <진세가> 성공원년(기원전606년)에는 이렇게 기록한: "사조씨위공족(賜趙氏爲公族)"(<사기>권14<십이제후연표>의 기록도 같다. 다만 진영공14년이다). <좌전>선공2년(진영공14년, 기원전607년)에는 이렇게 말한다: "진성공이 즉위하고,,,,,조순은 조괄을 공족으로 청하며 말한다. '군희씨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공이 허락한다. 겨울, 조순은 모동지족(旄東之族)이 된다. 병계(屛季)를 고족으로 공족대부가 되게 한다." 양백준의 해석에 따르면, '공족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공의 같은 성의 자제를 공족이라고 하는데 이는 광의의 공족이다...공족대부는 줄여서 공족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협의의 공족이다" (양백준, <춘추좌전주>선공2년조). 위에서 인용한 공족은 확실히 협의의 의미이다. 진나라의 군주는 희(姬)성이다. 조씨는 이성으로 공족대부에 올랐다. 그래서 "사(賜)"라고 한 것이다. 이는 조종의 지위가 올라갔다는 것을 표시한다. 동시에 조종내부의 적서관계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조순은 아마도 적모 조희의 양보와 '형종제급'의 영향을 받아, 동부이모 동생인 조괄을 공족대부로 하여 조종을 계승하도록 하고 자신은 '모동지족'으로 내려간다. 양선생은 모동지족은 '여자(餘子)', '공로(公路)'로 적자이외의 지서자제(支庶子弟)이다. 조순은 이때부터 '여자로 자처하며 정경(正卿)으로 모동지족을 관장했다' 조순은 적자에서 서자로 내려간 것이며 대종에서 소종으로 강등된 것이다.

 

조씨 내부의 적서변화는 조순, 조삭의 정치적 지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같다. <조세가>에는 조순이 진성공때 여전히 '임국정(任國政)"했다고 한다. "진경공때 조순이 죽었다. 시호는 선맹(宣孟)으로 하고, 아들 조삭이 후사를 이었다." 진경공때 조삭의 직위는 여전히 숙부 조괄보다 높았다. 진경공3년(기원전597년) 진초(晋楚)지전때 "순림보는 장중군이고 선곡이 보좌하며, 사회가 장상군으로 극이 보좌하며, 조삭은 장하군으로 난서가 보좌하며, 조괄, 조영제는 중군대부, 공삭, 한천은 상군대부, 순수, 조동은 하군대부였다." (<좌전>노선공12년, <사기>권39<진세가>, <사기>권39<조세가>). 이 기록은 바로 분명한 증거이다. 진경공12년(기원전585년), 조괄은 비로소 경(卿)에 오른다(<좌전>노성공2년, <사기>권39<조세가>). 이때 조삭은 아마도 이미 죽었을 것이다. 조괄은 종주이며 경대부로, 조씨종족내부에서 족권과 정권방면의 우세를 확립한다. 바로 종족내부의 적서관계와 정치지위의 변화로, 조삭이 죽은 후, 나이어린 조무는 이미 조부가 일찌기 얻었던 권력의 우세를 승계하지 못하였고, 그저 '서자'류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조서자조무"라고 한 것이다. 나중에 아마도 '서자'에 속했기 때문에, 그리고 진경공의 친척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이 족주의 난을 피할 수 있었던 것같다. 그리고 한궐이 도와주어서, 다시 조종을 승계하고, 조씨세력은 다시 흥성하게 된다.

 

이상의 분석 이외에 <조세가>를 자세히 읽어보면, 하나의 기괴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조간자 이전의 조씨선조로부터 조간자의 부친 조경숙까지 나타나는 이름은 최소한 이십여대에 이른다. 그러나 이 선조의 역사에서 기록한 글자의 총수는 그저 2천여자에 불과하다. 그리고 조씨족주에 관한 내용이 절반을 차지한다. 조삭이전과 이후, 서술은 모두 아주 간략하다. 유독 이 사건만 이야기로서 재미가 있고, 전체사건의 과정, 인물의 대화가 상세하고 생동적이다. 이는 그 내용의 진실성에 의심을 품게 만든다. 당연히 이렇게 생동적인 묘사는 사마천의 글솜씨도 관련된다. 다만 사마천이 아무런 근거없이 날조한 것은 아닐 것이고, 확실히 조씨 후손들에 전해오는 이 역사에 대한 역사전설을 재단하고 가공하여 만들어낸 것일 것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이렇게 단언할 수 있다. 소위 '조씨고아'운운은 순전히 허구의 일이다. 우리는 양백준 선생의 "모조리 전국시대의 전설에서 따왔다"는 판단에 동의한다. 다만 조씨기 족주를 당한 사건은 확실히 있었다. 이상의 고증을 통해 보면, 이 사건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개괄할 수 있다:

 

(1) 조씨족주사건은 진경공17년(기원전583년)에 발생했고, 조무복위는 아마도 진경공19년(기원전581년)에 발생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조세가>의 말을 잘못되었다.

 

(2) 조씨족주의 범위는 아마도 조동, 조괄 두 지족(支族)에 한정되었을 것이고, 조영제의 지족이 연루되었는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다만 최소한 조삭과 그 후대(즉 조장희 소생자녀)들에게는 파급되지 않았다.

 

(3) 조씨족주의 원인은 '조장희'의 참언이다. 다만 더욱 주요한 요소는 난씨, 극씨세력과의 알력이었다.

 

(4) 조무복위는 주로 한궐의 지지에 의존했다. 한궐은 "옛날에 내가 조씨를 숨겨주었다"고 하였다 이는 진나라 정치활동에서 한씨, 조씨의 연맹은 깊은 역사적기초가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