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생활문적(生活文摘)
마속의 죽음을 얘기하자면, 역대이래로 사람들은 마속이 가정(街亭)의 패배이후, 제갈량의 본영으로 돌아와 부형청죄(負荊請罪)한다. 결국 제갈량은 눈물을 흘리며 마속을 벤다. 경극 <실가정(失街亭)>이 바로 이 이야기이다.
이런 인상은 기실 나관중의 <삼국연의>에서 왔다. 그중 95회에서는 마속이 군령장을 쓰고 왕평을 부장으로 하여 병력 2만5천을 이끌고 가정으로 가서 지킨다. 가정에 도착한 후, 병법에 이르기를 "거고임하(居高臨下), 세여파죽(勢如破竹)"(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싸우면, 그 기세가 파죽지세이다)라는 말 및 "사지에 놓아두어서 산다(置之死地而後生)"등의 이유로, 제갈량이 길입구에 군영을 설치하라는 분부를 따르지 않고, 왕평의 "위군이 우리의 수원(水源)을 끊을 수 있다"는 경고도 귓등으로 흘려듣고, 병력을 산위에 주둔시킨다. 나중에 왕평이 계속 간언핮, 병력5천을 왕평에게 주어, 산을 내려가 군영을 설치하라고 한다. 위나라의 명장 사마의와 장합이 군대를 이끌고 도착한 후, 처음에는 한편으로 왕평을 견제하며, 다른 한편으로 마속을 포위하고 공격하지 않으며, 수원을 끊어버린다. 마속이 싸우기도 전에 스스로 혼란에 빠지면서, 항복할 자는 항복하고, 도망갈 자는 도망간 후, 사마의가 마지막에 화공을 펼친다. 마속은 참패하고 돌아온다. 왕평은 이때 병력이 적어 장합의 맹공을 견디지 못하고 마속과 함께 퇴각한다.
가정을 잃은 후, 전방 촉군은 거점을 잃게 되어, 물러나서 지킬 곳이 없게 된다. 부득이 이미 점령한 농우3군을 포기하고, 한중으로 물러나서 지킨다. 이에 제갈량은 상소를 올려 스스로 3등을 강등당하고, 마속은 대영에서 자수하여 죽음을 맞이한다. 참수할 때, 전체 병사들이 눈물을 흘리고, 제갈량도 실성통곡한다. 이것이 바로 소위 "읍참마속"이다.
다만, 이는 모두 소설가의 예술적 가공이다. 역사적 사실은 이런 내용과 차이가 크다. 진(晋)나라때 진수가 쓴 <삼국지> 및 그 후에 배송지가 달아놓은 주석에는 이 일에 대한 묘사가 여러 열전에 흩어져 있다. 그것들을 종합해보면 사서의 '읍참마속'의 진상을 알 수 있다.
먼저, <향랑전>에는 이런 기술이 있다. 당시 향랑은 승상장사이며, 부대를 따라와서 전투에 참가했다. 향랑은 마속과 잘 지냈는데, "마속이 도망치고, 향랑은 그 사실을 알고도 보고하지 않았다. 제갈량은 그를 미워하여, 관직을 박탈하여 성도로 돌려보낸다." 이 내용은 의미가 명확하다. 가정의 전투이후, 마속은 스스로 자수한 것이 아니라, 죄를 받을까 두려워 도망친 것이다. 그리고 향랑은 그 사실을 알고도 보고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갈량에 의하여 면직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제갈량의 사후에 향랑은 다시 관직에 나왔다고 한다. 그동안 수십년을 놀면서 보낸다.
두번째는 <마속전>에 붙은 배송지의 주석이다. <양양기>의 기록을 언급하고 있는데, 거기서 마속은 죽기 전에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낸 바 있다고 한다. "공께서 나 마속을 아들처럼 여겨주었고, 나 마속도 공을 부친처럼 여겼다. 원컨대 곤이 죽어 우가 흥한 뜻을 깊이 살려, 평생의 교분을 여기에서 부끄럽게 하고 싶지 않다. 마속은 비록 죽지만 땅에 아무런 여한이 없다." 그 후에 제갈량은 마속의 자식을 자신의 자식처럼 여겼다. 이 내용을 보면, 마속이 죽기 전에 제갈량과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서신을 적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제갈량이 곤을 죽이고 우를 기용한 이야기를 들어, 제갈량에게 자신의 자식을 부탁한 것이다.
그리고 뒤에는 다시 "십만의 무리가 눈물을 흘렸고, 제갈량은 제사를 지내준다. 그리고 마속의 자식을 평생 돌봐준다." 마속은 확실히 죽었다. 다만 이상에서는 마속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제갈량전>에는 제갈량이 "육속이사중(戮謖以謝衆)"이라고 하여, 마속을 죽였다고 한다. <왕평전>에는 다시 이렇게 기록한다: "승상 제갈량은 마속 및 장군 장휴(張休), 이성(李盛)을 주살했다" 이 두개의 전을 보면, 마속은 확실히 제갈량에 의하여 처형당했다. 다만 도대체 어떻게 실시했는지에 대하여는 언급이 없다. 이는<마속전>에서 명확히 기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속하옥물고(謖下獄物故)" 마속은 옥에서 병사한 것이다.
이상의 사료를 종합하면,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마속은 가정에서 군율을 어기는 행동을 한다. 제갈량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참패하고 돌아온다. 그리고 직접 이번 출격에서 얻은 소득인 농우3군을 얻었다가 다시 빼앗기게 된다. 어쩔 수 없이 대군은 한중으로 돌아간다. 마속은 자신이 실패한 결과가 얼마나 엄중한지 잘 알았다. 그래서 죄가 두려워 도망친다. 그리고 승상장사인 향랑은 그와의 안면때문에 혹은 그의 재주를 아끼는 마음에서 이를 알고도 보고하지 않는다. 일이 누설된 후 그는 집으로 돌아가서 이십년간 관직에 나가지 못하고 한량으로 지낸다. 마속은 결국 체포되어 제갈량에 의하여 극형에 처해진다. 그러나 형을 집행하기도 전에 마속은 옥중에서 병사한다. 이것이 바로 사서에 기록된 마속의 죽음이다.
그후 제갈량은 친히 제사를 지내고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십만의 병사들도 같이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마속의 자식을 평생 돌봐준다. 이렇게 그를 참하면서, 그를 안타까워하는 방법은 복잡한 원인이 숨어 있는 것이다. 먼저, 마속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사람을 알아보는 혜안을 지녔던 유비가 제갈량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말이 실제보다 지나치다. 크게 쓸 수 없는 자이다." 그러나 제갈량은 그렇지 않다고 여겨 마속을 참군으로 하고 매번 그를 불러 얘기를 하면 밤을 새우곤 했다. 그래서 제갈량은 상소를 올려 스스로 강등당한 것이다. 첫째는 마속이라는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것이고, 둘째는 유비의 당부를 중시하지 않은 것이며, 이로 인해 기산을 나서서 한 전투의 공로를 모조리 헛수고로 만들고 아무런 공도 없이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제갈량의 법집행은 상벌이 분명하여 신명과 같았다. 그를 극형에 처한 것은 필연적이다.
다만 마속은 제갈량이 남정하여 맹획을 얻을 때, 일찌기 출병전에 제갈량에게 "마음을 공략하는 것이 상책이고, 성을 공격하는 것은 하책이다. 마음을 싸우는 것이 상책이고, 병력으로 싸우는 것은 하책이다"라는 전략방침을 제시한다. 제갈량도 이 전략방침을 충분히 실행한다. 결국 남강은 촉이 망할 때까지 다시 전투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마속의 공로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씨형제는 형양(荊襄)일대에서 명성이 높았다. 그중, "백미(白眉) 즉 눈썹이 흰 사람이 가장 뛰어났다." 바로 이 백미라 불리는 마량(馬良)은 제갈량과 교제하는 중에 제갈량을 '존형(尊兄)'이라 부른다; 배송지는 '마량이 아마도 제갈량과 결의형제일 것이다, 혹은 친인척관계일 것이다. 제갈량의 나이가 많으므로 마량이 제갈량을 '존형'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마씨형제는 제갈량과의 교분이 남달랐다. 그리고 모두 재능이 있었다. 그래서 제갈량은 비록 마속을 '주살'했지만, 어쨌든 사람을 쓰는데 있어서는 깊이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그래서 '읍참마속'한 것이 비교적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 이는 그가 마속의 자식들을 잘 보살핀 일에서도 그의 마속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단지 소설가의 가공과정에서 마속이 죄를 두려워하여 도망쳤던 일은 언급하지 않고, 약간의 가공을 거친 것이다. 예술적인 각도에서 보자면, 역사적 시실보다 훨씬 감동적이고 호소력이 있다.
중국의 사대명저중 하나인 <삼국연의>의 영향력은 아주 크다. 현재는 이미 무수히 많은 서로 다른 판본, 유형의 게임 및 영화 드라마가 있다. 단지 이들은 대부분 <삼국연의>를 기초로 한다. 역사적 원인으로 소설에서 유비를 높이고 조조를 낮추는 경향이 심각했고, 또한 많은 인물, 사건에 대하여 예술적으로 가공하여, 역사적 사실과는 차이가 크다. <삼국연의>와 <삼국지>를 비교대조하면 아마도 더욱 완벽하고, 진실되게 이 대목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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