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장경위(張敬偉)
하왕조는 도대체 존재했었는가 아닌가? 이것은 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이 지금까지도 논쟁을 계속하고 있는 문제이다. 다만 사실은 중학교 역사교과서에 명확하고 상세하게 이렇게 적고 있다는 것이다: 기원전2070년, 선양제의 마지막 수혜자이자 치수영웅인 대우(大禹)는 중국역사상 최초의 왕조인 하왕조를 건립했다. 그의 아들 계(啓)는 백익(伯益, 선양제로 뽑은 대우의 계승자)을 죽이고, 자승부업(子承父業)으로 왕위세습제를 시작한다. 하나라는 400여년간 존속했고, 1600년 마지막왕 하걸(夏桀)이 상(商)의 성탕(成湯)에게 멸망당한다.
기본적인 사실기재는 <시경>, <상서> 및 상고문물의 명문(銘文)에 나온다. 예를 들어 춘추말기의 제후종(齊侯鐘), 진공궤(秦公簋)와 서주중기의 수공수(遂公盨)가 있다. 특히 수공수에는 "천명우부사(天命禹傅士), 수산준천(隋山浚川)"이라는 명문이 있다. 서한의 사학자 사마천은 더더욱 엄근(嚴謹)한 <사기>에 하왕조의 세계와 여러 사건을 기록했다. 그러나 상세한 하왕조의 기간(기원전2010년-1601년)은 비록 여전히 '개략'이라는 불확정적인 시간용어를 쓰고 있지만, 중국하상주단대공정에서 인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학계의 기본적인 견해는 하왕조가 확실히 존재했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필자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인류의 초기문명의 서광은 몽매한 시대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여, 항상 어두운 편이다. 문자기록이 없다는 한계 속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온 것이야말고 가장 진실한 인류문명맹아시대의 역사전승방식이다. 구전으로 전해졌으므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여러가지 와전이 나타났을 것이다. 여기에 인류초기에는 자연의 풍운변화를 잘 이해하지 못하였다. 이들 전설은 신비와 신화의 색채를 띄게 되는게 정상적이다. 중국만이 아니라, 지구의 곳곳에 있는 민족은 모두 원고시대의 신화전설을 지니고 있다. 이런 문명의 보편성과 역사전설의 관통성은 이런 사실을 증명한다. 원고신화의 내핵은 기실 인류문명신사의 내핵을 퐇ㅁ하고 있다. 즉, 고증하거나 확인할 고고학적 증거나 문자자료가 없다고 하더라도, 하왕조의 존재는 논리적으로 진실하다.
여기서 언급할만한 점이라면 앙소(仰韶), 용산(龍山), 이리두(二里頭), 이리강(二里岡)과 같은 현대고고학이 발견한 문화유적지에서 우리는 볼 수 있다. 출토된 기물은 이미 상당한 사회정치적 속성을 구비하고 있다. 유감스러운 점은 이들 문화유적지가 가장 사람을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현대인들이 해독하고 확인할 수 있는 문자전승이 없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일부 문자에 유사한 간단한 부호가 나올 뿐이다. 이 시기는 전설상의 삼황오제와 하왕조에 해당한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하나라가 역사상 존재한 사실 뿐아니라, 삼황오제의 전설도 절대로 고인들이 허구로 만들어낸 것이 아닐 것이다.
더욱 확실하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은 청나라 광서기간에 갑골문이 발견되어 상왕조의 존재가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하남 안양 은허의 발굴은 더더욱 태사공이 <사기>에 기록한 상왕조 세계의 정확성을 입증해 주었다. 이에 대하여 왕국유 선생은 "은,주세계가 확실하므로, 이를 통하여 추정해보면 하후씨세계도 확실하다고 보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왕국유선생과 같은 견해를 지닌 사람은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의 은위장(殷瑋璋) 교수이다. 그가 믿는 것은 전통사학기록과 갑골문이 검증한 상왕조의 논리적 진실이다.
하왕조가 존재했는지에 대한 학술적 관점은 현재보기에 어느 정도 풍자와 아이러니가 있다. 청말에서 민국초기까지는 중국이 빈약하였으므로 많은 학자들이 중국전통문화와 역사관에 대하여 의문을 가졌다. 이런 전통은 중국이 낙후한 근원이라고 보았다. 사학에서는 의고(疑古) 정서로 표현되었다. 예를 들어, 강유위는 원고전설이 "상고망매무계(上古茫昧無稽)"하다고 보았다. 문화적으로는 '공가점(孔家店)'을 타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배경하에서 서방의 고고학에 대응하는 중국현대고고학이 발전하고, 검증가능한 실물고고증거에 대하여 극단적인 편집증을 갖게 된다. 이처럼 서방고고학원칙을 맹신하는 편집증은 현재 오히려 서방고고학계의 비판을 받고 있다. 중국고고학자는 지나치게 신화전설이 포함한 역사적 사실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하왕조의 존재를 의심하는 고고학자는 적거나 많거나 이 방면에서 편협성을 지니고 있다. 사실상, 이러한 '엄근'은 기실 논박하 가치도 없다. 고고학적으로 실증되지 않으면 하왕조는 부존재하는 것인가. 이것은 절대 논리에 맞지 않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1960년대초 발굴한 하남 언사의 이리두 문화유적지로 면적이 10.8만평방미터에 달한다. 차철(車轍, 수레바퀴)유적도 있고, 궁전유적도 있고, 기개도 비범하여 왕자의 기개가 있다. 그리고 탄소14로 추산해보니 이 유적지는 개략 3600년에서 3700년전이었다. 하왕조와 시대가 부합한다. 비록 학계에서는 이리두문화의 시기확정에 의견차이가 있지만....한쪽은 이리두문화는 완전히 하나라에 속한다고 하고, 다른 한쪽은 이리두문화는 하상(夏商) 혼합문화라고 본다. 어찌되었건,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하왕조의 역사는 증거를 전혀 구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상왕조의 고고학적 입증자료가 20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찾아진 것처럼, 아마도 하왕조를 확인할 고고학적 발견도 머지 않아 발견될 것이다. 아마도 수백년, 천년을 기다려야 할 지도 모른다. 다만, 고고학자들은 공정하고 더욱 과학적이고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여야 한다. 가볍게 하앙조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믿어서는 안된다. 정확한 태도는 하왕조의 존재의 논리적 진실을 믿고 끊임없이 증거를 찾는 일이다.
감정적으로 보자면, 하왕조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은 화하문명이 근거와 근원을 잃는 것처럼 보인다; 이성적으로 보면, 갑골문에 문화가 기록된 상왕조는 문자와 정치제도가 상왕조에서 일거에 창립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한다. 갑골문은 고도로 성숙된 문자이다. 창힐의 문자창제전설을 연상해보면 하나의 문자전승이 끊어진 것이 있는 것같다. 그것이 바로 하문자이다. 그러므로 하왕조를 찾는 것은 고고유적지에서 발굴하는 외에 하왕조문자를 찾아야 한다. 그러면 하왕조의 존재에 관한 핵심증거가 될 것이다. 마치 갑골문이 상왕조를 확인해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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