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선진)

목야지전(牧野之戰)이 발생한 연도는?

중은우시 2014. 8. 26. 23:41

글: 악남(岳南)

 

목야지전의 연도에 대하여는 44가지 견해가 있다.

 

주무왕(周武王)이 대군을 이끌고 상주왕(商紂王)을 토벌하여, 일거에 상나라의 도성인 조가(朝歌)를 함락시킨다. 상주왕은 스스로 불을 질러 자결하니, 상나라(商朝)는 멸망하고, 주나라(周朝)가 건립되었다. 역사에서 무왕극상(武王克商), 무왕벌주(武王伐紂) 혹은 목야지전(牧野之戰)이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목야지전이라는 중대한 역사적 사건은 상,주 두 나라의 분계선이다. 연대학연구의 각도에서 보자면, 이 분계선의 추정은 이전의 하(夏), 상(商)에 있어서는 총적년(總積年)의 기산점이고, 그후의 서주(西周)에 있어서는 직접적으로 열왕연수의 계산에 영향을 준다. 이 정점이 확립하는 것은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의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단게이다.

 

세상에 전해지는 문헌(傳世文獻)에서 이 사건에 대한 기술은 비교적 풍부하다. 다만, 무왕의 군대가 언제 출정했는지, 결전의 북소리는 언제 울렸는지, 녹대(鹿臺)의 큰 불은 언제 붙었는지....전세문헌(傳世文獻)에서 목야지전 이 사건에 대한 기재는 아주 풍부하지만 불완전하다. 그리고 진위를 가리기 어렵다. 심지어 서로 모순된다. 그래서 역대학자들은 자료에 대한 이해가 서로 달랐고, 추산할 때 채용하는 방법, 각도도 크게 달랐으며, 추산한 결과도 큰 차이가 있었다.

 

1996년 5월 시작된 국가의 '9차5개년계획' 중점과학기술도전프로젝트 하상주단대공정은 역사학, 고고학, 천문학, 과기측년학등 서로 다른 학과의 200여명의 전문가학자를 모아서, '무왕극상지년연구(武王克商之年硏究)'라는 과제를 설정한다. 근 십여년의 끊임없는 노력을 거쳐, 마침내 이 역사기년(歷史紀年)의 의난(疑難)문제를 해결했다.

 

이전에 목야지전의 연도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주장이 있는지는 통일된 결론이 없었다. 어떤 사람은 모두 23가지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모두 28가지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최대한 기껏해야 30여가지라고 여겼다. 이 30여가지중에서 상당한 부분은 인용문만 볼 수 있고, 원문은 찾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각종 주장은 갈수록 뭐가뭔지 모르게 되었다. 팽림(彭林)등 학자들이 국내외문헌을 수집하고 발굴하여, 대표적인 논저가 이미 57편에 달하며, 모두 4종의 무왕극상연도에 대한 주장이 있으며, 그중 일본학자가 7가지, 미국학자가 7가지, 영국,스위스,한국학자가 각 1가지이며, 나머지는 중국학자들의 주장이라는 결론을 얻어냈다. 이 결론은 모두 원작에서 왔고, 여러번 옮겨써 쓴 것에서 온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하여 무왕극상의 연도에 관한 가장 완벽한 학술연구자료가 되었다.

 

팽림의 주재하에, 학자들의 수집한 각종 문헌을 <무왕극상지년연구>라는 책으로 편집하여 출판했다. 44가지 주장가운데, 연대가 가장 빠른 것은 기원전1130년이고, 가장 늦은 것은 기원전1019년이다. 앞뒤로 112년의 차이가 있다. 

 

확실히, 이상의 44가지 주장이 있지만, 역사상 진실한 무왕극상의 연도는 단 하나이다. 하상주단대공정의 수석과학자는 면밀한 고려와 기획을 거쳐 두 가지 방안을 제정한다. 하나는 핵심적인 고고유적지의 연대구분과 14C연도측정, 갑골문일월식 및 문헌기재의 종합연구를 통하여, 무왕극상의 연도범위를 축소시킨다; 둘은 이상의 범위내에서 금문배보(金文排譜)와 무왕극상의 춘문학 추산을 통하여 무왕극상의 가능한 연대를 찾고 마지막에 종합하여 최선의 연대를 선정한다.

 

풍서(灃西)고고의 신발견

 

풍호(灃鎬)는 주나라사람글이 기(岐)에 도읍을 정한 이후 두번째 도성유적지이다. 명청이래, 많은 학자들은 풍호의 구체적인 위치를 확인하려고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풍호는 서방의 트로이고성처럼 완전히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1996년 겨울, 서량고(徐良高)등 고고학자들은 마왕촌(馬王村) 밖의 공지에서 대규모의 탐침과 시굴을 시도했다. 가장 이상적이고 가장 가치있는 것은 바로 나중에 고고학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저명한 H18회갱(灰坑)이다.

 

무왕극상의 연도는 T1제4층과 H18회갱의 연대범위내에 포함된다.

 

14C연도측정전문가는 각각 통상적인 방법과 AMS법을 써서 이상의 지층에서 채입한 일련의 탄소샘플에 대하여 측정을 한다. 그중 H18제2, 제3층에서 출토된 탄화좁쌀은 당시에 살아있던 식물이다. 그래서 측정한 연대는 당해 층의 진실한 연령을 반영한다. 1998년에 통상적인 14C탄소측정법으로 얻어낸 무왕극상의 연대는 기원전1050년 내지 기원전 1010년 사이였고, 그 기간은 40년이다. AMS측정법으로 계산해낸 무왕극상의 연도는 기원전1060년 내지 기원전 995년으로 그 기간은 65년이다.

 

유리하(琉璃河) 연국(燕國) 묘지의 발굴과 단대.

 

주무왕의 가장 중요한 보좌신료의 하나인 소공(召公)이 받은 영지의 구체적인 지방은 사학계에서 계속 논쟁이 된 문제였다. 1972년부터, 북경시 문물부서에서 조직한 고고팀은 유리하에서 대규모의 고고발굴을 진행한다. 그리고 유리하는 바로 소공의 시봉지(始封地)라는 것을 증명했다.

 

유리하유적지 M1193묘장의 관목은 보존이 양호하여 통상적인 14C연도측정으로 나온 연도는 기원전1015년에서 기원전985년사이이다. 이 수치는 서주의 개시연도의 추단에 중요한 참고근거를 제공한다.

 

유리하1기묘장중 가장 이른 연대데이타의 중간치 추정에 따르면, 무왕극상의 역사사건은 기원전1020년보다 늦을 수 없다.

 

무왕정상궤(武王征商簋)가 세상에 나타나다.

 

1976년 3월 상순, 섬서성 임동현 영구공사 서단대대의 농민은 수리건설을 하던 중에 지하에서 동기갱(銅己坑)과 한 무더기의 동기를 발견한다. 학술계를 뒤흔든 저명한 청동예기, 이궤(利簋)도 그 안에 있었다. 녹을 제거하고나서 동기의 아래에 4행 합계 33자의 명문이 있는 것을 발견한다. 고고학자인 당란(唐蘭)의 해석에 따르면, 이 명문의 대체적인 뜻은 이러하다: 주무왕이 병력을 일으켜 상주를 토벌할 때, 갑자(甲子) 그날의 아침에 정(鼎)을 빼앗았다. 혼(昏, 상주왕)을 이기고, 상왕조를 무너뜨린다. 팔일째 되는 신미(辛未)에 무왕은 난사(闌師)에서 동기(銅器)를 리(利)에게 하사한다. 리는 이것을 단공(檀公)의 보기(寶器)로 삼는다.

 

명문에 기록된 것은 확실히 주무왕이 상주왕을 토벌한 일이다. 이간은 이 전쟁의 실물증거이다. 무왕극상연대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의미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간의 명문을 보면, 무왕극상의 날은 바로 갑자일이다. 이 기재와 많은 고대문헌에 기록된 간지는 서로 부합한다. 이를 통하여 문헌의 이 기재는 정확하다는 것을 최소한 확인할 수 있다. 하상주단대공정전문연구위원, 서북대학문박학원 교수인 황회신(黃懷信)은 명문을 깊이 있게 검토한 후, 이렇게 해석했다: "무왕이 상나라수도를 향하여 최후의 공격을 감행한 것은 갑자일 여명이고 당시에 세성(歲星)이 중천에 있었다. 날이 어두워져서야 상나라수도를 점령할 수 있었다." 만일 황회신의 해석대로라면, 이간 명문의 전반부는 완벽하게 무왕벌주에서 승리를 거둔 전과정을 기록했다고 할 수 있다. 그 가치는 문헌에 나오는 무왕벌주가 갑자조(甲子朝)라는 기재를 확인해줄 뿐아니라, 주왕이 스스로 불에 타서 죽은 것이 갑자석(甲子夕)이라는 기재도 확인해준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무왕극주일의 여명의 천상(天象)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이는 무왕벌주의 정확한 연대를 확인하는데 신뢰할만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천문계산 소프트웨어로 추산한 목야지전의 연대

 

강효원(江曉原)은 "무왕벌주시 천상(天象)의 연구라는 과제를 받은 후, 그의 두 명의 박사연구생 겸 조수인 뉴위성(鈕衛星), 여선문(廬仙文)의 협조하에, 이전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아이디어로 탐색을 했다. 이러한 새로운 접근방법은 바로 사적에서 이미 알고 있는 16가지 무왕벌주의 천상기록을 모두 고려하여, 하나하나 감별한 후, 관련된 천상 일, 월, 행성위치 및 혜성, 일식, 월식, 역일(삭,간지)등에 대하여 연구를 진행하는 것이다. 연구어프로치와 방법은 멑저 역대학자의 각종 주장중 연대분포 즉 기원전1100 - 기원전 1000년의 백여년간 범위로 확정하고, 그 후에 이미 알고 있는 16가지 천상을 이 100여년의 시간내에 넣고 검산을 한다. 만일 어떤 천상이 이 기간내에 발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러한 천상은 배제했다. 만일 계산이 이 백여년의 기간내에 그러한 천상이 발생가능하나, 연도를 확정할 수 없으면 그것도 배제했다. 

 

이상의 접근방법으로 강효원과 그의 조수는 16가지 천상중 최종적으로 연도를 확정할 수 있는 것을 확인했고, 동시에 사전에 확정된 100여년의 시간내에 출현가능한 것은 모두 7가지라고 보았다. 이어서 업무는 바로 동시에 이 7가지 천상에 부합하는 구체적인 연도를 찾는 것이다. 강효원은 전문과제조 연구인원을 데리고, 국제천문학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장시간계산소프트웨어 DE404성력표(星曆表)로 추산했다. 운이 좋았던 것은 계산결과 단 1개의 연도가 이상 7종 천상의 조건에 부합했다는 것이다.

 

최종결론은 무왕이 기원전1045년 12월 4일에 출병하여 동정에 나서고, 출발후 근 1개월내에 세성이 일출전에 동방의 하늘에서 나타난다. 다음 해 즉 기원전 1044년 1월 3일 군대가 맹진(孟津)을 건넌다. 6일후인 기원전 1044년 1월 9일 목야지전에서 상나라군대를 이긴다. 이때 목야의 현지시간은 새벽 4시 55분이다. 세성은 바로 중천에 떠 있었다. 지평고도는 약 60도이다. 

 

강효원등 연구인원은 완전히 새로운 사고방법으로 이 성과를 얻어냈고, 이는 이전의 연구와는 질적으로 업그레이드 된 것이며 아주 큰 돌파구를 마련한 것이다. 다만 두 가지 점으로 사람들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첫째, 기원전1045--1044년의 세성은 순화지차(鹠火之次)에 있지 않았다. <국어.주어>에 기재된 영주구가 주경왕에게 말한 벌주천상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 기재가 4가지 서로 연관된 정보를 알려준다는 것이다. "세재순화(歲在鹠火), 월재천사(月在天駟), 일재석목지진(日在析木之津)...성재)천원(星在天黿)" 이 4가지 정보중 뒤의 3가지는 강효원든 전문과제인원의 추산 및 여러가지로 검증되어어 얻은 연대와 상당히 들어맞는다. 다만 유독, '세제순화'만은 부합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 것은 역대학자들이 중시해왔고 불가결한 것이다.

 

학자들이 제출한 두 번째 부족한 점은 상술한 연구는 <무성(武成)> 역일의 해석에 대하여 한나라때 학자 유흠의 정점설을 채용했다. 이것은 이미 출토된 대량의 청동기명문에 반영된 상황과 저촉되는 곳이 많다.

 

이상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신중한 입장에서, 세미나이후, "공정"의 수석과학자는 중국과학원 섬서천문대의 천문학자 유차원에게 위탁하여, '무왕벌주천상의 연구'라는 이 전문과제보고서를 검증해보도록 요청했다. 검증결과에 따르면 무왕벌주의 연대는 기원전1046년이다. 강효원의 추산보다 2년이 앞섰다.

 

최종적으로 1046년으로 선정하다.

 

강효원의 연구에서 유차원의 검산까지, 얻어낸 결론은 각각 기원전1044년과 기원전1046년이다. 이 두 가지 결론 사이에는 2년의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2000여년동안, 무왕벌주연대에 관한 견해는 차이가 112년이나 되었다. 강,유 두 사람의 결론으로 기간차이를 56배나 줄일 수 있었다. 이것은 대단한 성과라 아니할 수 없다.

 

강효원과 유차원의 연구성과를 보면, 두 설 모두 14C연도측정으로 얻은 결과는 기원전1050년 - 기원전 1020년의 범위내이다. 다만 이 두 가지 결과는 모두 문헌이 내놓은 모든 조건을 만족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만족정도에 따라, 그리고 금문역보와 들어맞는 상황에 맞추어 가장 뛰어난 것으로 선택해야 한다.

 

'공정'의 전문가가 정한 금문역보는 성왕원년이 기원전1042년이다. 4가지 요소가 완전히 구비된 무왕시기의 청동기를 발견하지 못하여, 직접적으로 무왕극상의 연도를 추정할 수는 없다. 다만, <상서.금등>에 근거하면, 무왕은 "극상한지 2년이 된" 어느 날 병을 얻어서, 주공의 기도로 다음 날 병이 낫는다. 다만 무왕이 죽은 날은 언급하지 않았다. 문헌에 기술한 무왕극상후의 역사적 사실은 4년을 넘지 않는다. 동한학자 정현은 <시보.빈풍보>에는 무왕극상후 4년간 재위했다고 제기한다. 일본학자 용천자언은 <사기회주고증>에서 일본 고산사 <주본기>초본에 근거하여 무왕은 극상후 2년째 병에 걸리고, 그후2년만에 붕어했다"고 한다. 이 주장은 정현의 주장과 부합한다. 모두 성왕원년(기원전1042년)이전의 4년으로 추정한다. 즉 기원전 1046년이다. 이 연대치는 여러 방면의 조건에 부합하는 측면에서 1044년보다 많다. 그래서 '공정' 전문가조는 여러가지를 검토한 후, 기원전1046년을 무왕극상의 연도로 확정하였다. 즉, 역사상 가장 널리 알려진 목야지전은 기원전 1046년의 어느 별이 빛나는 아침에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