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진령신(陳令申)
"시간금일지성중(試看今日之城中), 경시수가지천하(竟是誰家之天下)"(한번 봐라 오늘날의 성을. 도대체 어느 집안의 천하인지?)라는 문구로 무측천의 얼굴색을 바뀌게 만들었던 낙빈왕, 그는 초당(初唐)의 사단에서 활약했던 인물로, '초당사걸(初唐四傑)"의 한 명이다. 그는 초당사걸중 나이가 가장 많고, 경력이 가장 많은 사람이다. 남긴 이야기도 가장 풍부하고 전설적인 색채를 띈다. 그중에서도 그의 최후에 관한 것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수수께끼이다.
낙빈왕은 일생동안 뜻을 펼치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며, 다른 사람의 밑에서 일해왔다. 당고종 의봉4년(679년)에 그는 시어사(侍御史)로 승진하나, 여러번 무측천에게 상소를 올렸다가 하옥된다. 옥중에서, 그는 "노중비난진(露重飛難進), 풍고향이침(風高響易沉)"이라는 천고의 명구로 자신의 비분을 표현했다.
무측천이 황제를 칭한 후, 이당왕실의 구신을 대거 몰아내고, 무씨가족들을 대거 기용한다. 684년, 무측천정권에 불만이 크고, 자신의 관료로서 실의하여 뜻을 표지 못하여 우울해하던 낙빈왕은 서경업(徐敬業)이 일으킨 양주병변(揚州兵變)에 참가하여 예문령(藝文令)이 되어, 문서기요를 담당한다. 그동안 그는 저명한 <토무조격(討武曌檄)>을 쓴다. 이 격문은 무측천의 예행열적(穢行劣迹)과 음모화심(陰謀禍心)을 일일이 열거하며, 거명의 목적을 기술하고 대의를 밝혔다. 마지막 부분의 "시간금일지성중(試看今日之城中), 경시수가지천하(竟是誰家之天下)"는 기세가 비범하고 호소력이 짙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무측천은 이 격문을 본 후에 얼굴색이 확 변했다고 한다. 급히 이 격문을 누가 썼는지 물었다는 것이다. 좌우에서 낙빈왕이라고 말하자, 아주 안타까워 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자는 이렇게 큰 재능이 있음에도, 이 지경에 처했구나. 이는 재상의 과실이다." 인재를 아끼는 마음이 그대로 표출되었다. 다만 서경업의 무략이 부족하여, 양주병변은 3개월만에 실패로 끝난다. 당나라때 사람인 희운경(郗雲卿)은 <낙빈왕문집서>에서 이렇게 기록한다; 문명(당예종의 연호, 684년)에 경업과 광릉에서 기의를 모의한다. 병사를 일으켰으나 성공하지 못하여 도망친다." 나중에 <신당서. 낙빈왕전>에도 이 주장을 그대로 따랐다. "닉왕망명(駱王亡命), 부지소지(不知所之)"(낙빈왕은 망명했고,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한다)라고 낙빈왕의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하였다. 낙빈왕의 최후에 관한 수수께끼는 여기에서 시작한다.
필자는 낙빈왕의 최후에 관한 견해를 3가지로 정리해 보았다:
첫째 주장: 낙빈왕은 거사에 실패한 화 피살되었다.
<구당서.낙빈왕전>, <자치통감>, <신당서,이적전>등에 이렇게 기재되어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서경업의 병란이 실패한 후, 낙빈왕등은 바다로 가서 고구려로 도망치고자 했다. 해릉에 도착했을 때, 풍랑을 만나 유산강에 막힌다. 낙빈왕은 서경업의 부장인 왕나상(王那相)에게 죽임을 당하고, 수급이 베어져 동도(東都)로 보내어지고, 그의 가족들도 연좌된다. 구체적으로 기재한 경우도 있는데, <자치통감>에는 이렇게 적었다: "을축, 경업이 해릉에 도착한다. 바람에 막혔다. 그의 장수인 왕나상이 경업, 경유(敬猷) 및 낙빈왕의 수급을 베어 투항했다." 그 외에, 낙빈왕의 친구인 송지문(宋之問)은 일찌기 <제사심언학사문>이라는 글을 썼는데, 이 글에서, 송지문은 낙빈왕이 "부능보족이전구(不能保族而全軀)" 이를 통해서 보면, 낙빈왕은 자신의 몸을 지키지 못했을 뿐아니라, 가족과 친족들까지도 연좌되어 피살되었다.
둘째 주장: 낙빈왕은 거사에 실패한후, 도망쳐서 은거했다. 어떤 사람은 그가 삭발하여 중이 되었다고 한다.
당나라때 사람인 희운경은 <낙빈왕문집서>에서 "병사기불첩(兵事旣不捷), 인치도둔(因致逃遁)"(거사를 일으켰으나 이기지 못하여, 도망쳐 숨었다). 즉, 낙빈왕은 피살되었다는 증거가 없다. 이 주장에 따르면, 거사에 실패한 후, 관군은 서경업과 낙빈왕을 체포하지 못했을 뿐아니라, 그들은 무측천이 그들에게 죄를 물을까 겁이 나서, 가짜를 내세워서, 두 명의 서경업, 낙빈왕과 용모가 비슷한 사람의 수급을 베어서, 그 수급을 경사로 보낸 것이다. 사실상, 낙빈왕과 서경업 두 사람은 모두 도망쳤고, 나중에 삭발하고 중이 되었다. 가장 먼저 낙빈왕이 출가하여 중이 되었다고 주장한 사람은 당나라때 사람 맹계(孟棨)이다. 그의 <본사시(本事詩)>의 기록에 따르면, 송지문이 한번은 항주 영은사로 가서 달구경을 하면서 시를 읊었다 시작하는 두 구절로 "취령울초요(鷲嶺鬱苕嶢), 용궁쇄적요(龍宮鎖寂寥)"을 읊은 후 뒷부분을 잇지 못하고있었다. 그때 한 노승이 지나가다가 송지문의 시를 들은 후 즉시 말했다: "왜 "누관창해일(樓觀滄海日), 문대절강조(門對浙江潮)"라고 하지 않는가"라고 하고는 이어서 연이어 십구의 시를 완전하게 읊었다. 그런데 구절마다 아주 비범하고 정묘하여 송지문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노승은 시를 읊고는 바로 사라진다. 송지문이 다시 찾아갔지만 그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송지문은 이 노승이 바로 낙빈왕이라는 것을 듣게 된다.
그외에 낙빈왕은 일찌기 지금의 강소성 남통 일대로 도망쳐서 은거했다고 한다. 명나라 만력년간의 수보대신 주국정(朱國楨)의 <용당소품(湧幢小品)>에 기재된 바에 따르면, 명나라 정덕 연간에 남통성의 동쪽에서 낙빈왕의 묘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묘주인의 의관은 새것과 같았다고 한다. 이 묘는 나중에 낭산(狼山)으로 이장되었고, 지금까지도 유적이 남아있다. 청나라때 사람 진희진의 <낙임해집전주.부록>에 따르면 옹정연간에 자칭 이적의 17대손이라는 이우도(李于濤)에 따르면 그의 집안 족보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낙빈왕과 서경업의 아들은 함께 한(邗)의 백수탕(白水蕩)(지금의 남통소속 계동현 일대)에 숨겼으며 나중에 낙빈왕은 숭주(崇州)에서 객사했다고 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낙빈왕의 묘는 바로 서경업의 아들이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셋째 주장: 낙빈왕은 강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당나라때 사람 장작(張鷟)은 <조야첨재(朝野僉載)>에 따르면, "낙빈왕 <제경편>에 이르기를: "숙홀단풍생우익(倏忽摶風生羽翼), 수유실랑위니사(須臾失浪委泥沙)"라고 하였다. 나중에 이경업(李敬業)과 양주에서 거병하였으나, 대패하였고,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이것은 바로 참(讖)이다." 즉, 낙빈왕이 마지막에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이는 그가 이전에 지은 시의 내용과 들어맞는다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신당서.낙빈왕전>에서 낙빈왕이 '부지소지'라고 한 외에 나머지 모든 정사의 기록에서는 거병에 실패한 후 피살되었다고 한다. 송지문은 낙빈왕이 '부능보족이전구'라고 하였다는 것도 유력한 증거이다. 왜냐하면 송지문과 낙빈왕의 친밀한 관계를 생각하면 송지문의 말은 믿을만하기 때문이다. 맹계의 <본사시>에서 말하는 송지문과 낙빈왕이 영은사에서 달밤에 관한 구절을 이어서 지은 것은 황당무계한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송지문과 낙빈왕은 아주 친숙한 친구인데, 서로 만났을 때 어찌 몰라볼 수 있단 말인가?
맹계의 <본사시>에는 헛점이 있다. 다만 이것만으로 관군이 공로를 내세워 상을 받기 위하여 가짜수급을 조정에 바쳤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같은 시대의 사람인 희운경은 황제의 명을 받아 낙빈왕이 남긴 글을 수집했는데, 그는 낙빈왕이 '그리하여 도망쳐 숨었다'고 말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분명히 근거가 있을 것이고, 아무런 근거없이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송지문의 '부능보족이전구'는 낙빈왕이 피살된 증거로 삼기 어렵다. 그렇다면, 그는 아마도 경사로 보내어진 소위 낙빈왕의 수급을 살펴본 후에 한 말일 것이다. 그가 진실을 말할 수 있었을까? 첫째는 그는 친구가 목숨을 부지하기를 바랐을 것이므로 진실을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는 수급을 바친 장군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송지문의 말만으로 낙빈왕이 피살되었다고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
낙빈왕의 행방에 관한 사적의 기록은 서로 모순된다. 이 수수께끼에 관한 논쟁은 그래서 끝이 없이 계속되고 있는데, 언제나 결론이 나올까. 아마도 새롭고 확실한 자료가 나타나야 비로소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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