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진사황(秦四晃)
역사는 숙명인지 교합(巧合)인지, 항상 비슷한 경우가 많다. 중화민국의 송씨삼자매 송애령, 송경령, 송미령은 한때 이름을 떨치고 그 명성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대당왕조시기에도 송씨집안에서는 일찌기 3명의 비범한 자매가 나타난 바 있다. 양자의 유일한 구분이라면, 민국시대의 송씨여인들은 유명한 인물들에게 시집을 가서 유명해졌지만, 당나라때의 송씨여인들은 독신으로 살면서 이름을 날렸다는 것이다.
당나라때의 송씨삼자매의 고향은 패주(貝州) 청양(淸陽)이다. 즉 지금의 하북성 청하이다. 부친은 송정분(宋庭芬)이다. 원래는 자매 5명을 낳았는데, 두 명은 요절한다. 그래서 고인들은 명성이 혁셕한 3명만을 기억한 것이다. 이 세 명은 각각 송약신(宋若莘), 송약소(宋若昭), 송약헌(宋若憲)이다. 요절한 두 사람은 송약륜(宋若倫), 송약순(宋若荀)이다.
<구당서>의 기재에 따르면, 송씨집안은 "대대로 유학을 했고, 송정분에 이르러 문장이 뛰어났다." 집안은 시사로 유명한 서향문제이다. 송정분은 일찌감치 딸들에게 엄격한 유학교육을 시킨다. 사서오경외에 시사가부를 익히게 했다. 그리하여 딸들은 급계(及笄, 15살)에도 이르기 전에 문장을 쓸 줄 알았다." 12,3살때 딸들은 벌써 회사, 시부에 모두 뛰어났다.
아마도 특수한 가정교육때문인지, 송씨여자들은 독특한 품성과 습관을 갖게 된다. 자매들은 하나같이 담박청려(淡泊淸麗)했다. "성격은 정소한아(貞素閑雅)하며,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여자아이들이 얌전한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부친 송정분은 약간 불안하고 조급해진다. 세 딸은 어느 날 같이 부모의 앞에 와서, 굳건한 말투로 말했다: "평생 시집을 가지 않고, 우리의 재능과 학식으로 부모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습니다."
큰언니 송약신은 집안의 맞이였다. 어른이 된 후 부친을 본받아, 자주 유학으로 자매들을 가르쳤다. 평상시의 방식은 학자, 교수같았다. 목소리나 표정에서 여인다운 점은 전혀 없었다. 그녀의 이름이 사방에 알려지게 된 것은 놀라운 의지력으로 완성한 <여논어> 10편이다. 우리늘 잘 알고 있다. <논어>는 공자가 그의 제자와 대화하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송약신의 <여논어>의 체례도 마찬가지로 따라했다. 전진(前秦)의 여경학가(女經學家) 선문군(宣文君) 송씨(宋氏)가 공자의 역할을 하고, 반소(班昭)의 "조대고(曹大家)"등의 이름으로 안회, 염구등의 인물을 대체한다. 책에서 논술한 것은 주로 여자의 도덕, 수양을 숭상하는 것이다. 전파하는데 편리하기 위하여, 여동생 약소는 정성껏 언니의 저작에 상세한 해석을 달아, 논리가 분명하고, 이치가 철저하며, 통속적이어서 이해하기 쉽게 해주었다.
집에서 학문을 닦던 자매들을 사회에서 어떻게 알게 되고 그 이름을 떨치게 되었을까? 당덕종 정원4년(788년) 소의절도사(지금의 산서 동남부와 하북 서남부를 관할) 이포진(李抱眞)이 송씨자매가 비범한 학문과 뜻을 품었음을 알고는 당덕종 이적(李適)에게 글을 올려 추천한다. 당덕종은 송씨자매를 한꺼번에 궁중으로 부른다. 그리고 그녀들의 시사가부문장을 시험하고, 경사대의를 묻는다. 송씨자매는 붓을 들어 글을 쓰거나 시원스럽게 대답을 한다. 천자는 그녀들의 학문과 재능에 감탄한다. 그리하여 후하게 하사품을 내린다. 송씨자매는 일반 속인들과는 달리 탁월한 기개를 지니고 있었다. 황제는 그녀들을 일반 궁녀나 비빈으로 대할 수 없어서, 일률적으로 "학사선생(學士先生)"에 봉한다. 정원7년(791년) 송약신은 궁중의 비서부적(秘書簿籍)을 관장하고 천자의 기거주(起居注)를 책임지는 일을 한다.
당덕종 이적은 시가를 좋아하여, 자주 신하들을 불러서 서로 시를 지어 화답했다. 그때마다 송약신의 자매도 오게 하여 그녀들도 함께 시를 짓게 했다. 송약신이 새로 지은 작품을 당덕종에게 올릴 때마다 당덕종은 '좋다고 칭찬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딸들의 걸출한 재능은 부친의 부귀영화를 도와준다. 송정분은 요주사마(지금의 강서성)에 오르고, 습예관 내교(궁중내시성의 기구이다. 내교박사 약간이 있어 경사자집의 강해와 금기서화의 전수를 책임진다) 그리고 호화주택 1채를 하사하고 매달 봉록을 풍성하게 내린다.
송약신은 당헌종 원화말년(820년) 사망하니, 칙명으로 하내군군(河內郡君)에 봉한다.
둘째 송약소는 조예가 더욱 뛰어났고, 명성이 가장 대단하다. 언니가 죽은 후, 당목종은 여동생 송약소에게 송약신의 업무를 승계하게 한다. 궁중의 기거주와 비서부적을 담당한다. 그리고 상궁(尙宮)에 봉한다. 상궁은 궁중여관으로 정오품이며, 후궁의 여러가지 일을 관장한다)
<구당서.후비전>에는 이렇게 말한다. "자매중에서, 송약소가 특히 통효인사(通曉人事)했다." 당헌종, 당목종, 당경종의 3대제왕은 모두 그녀를 선생으로 존칭한다. 후궁의 비빈 및 여러 왕자, 왕손, 공주 및 부마는 모두 송약소를 사부로 대했고 아주 존경했다. 분명하게, 송약소는 당나라궁정에서 아주 특수하고 숭고한 지위를 누린다. 천자를 포함한 황실과 여러 신하 및 궁녀들의 앙모와 사랑을 받는다.
<이십사렴(二十四廉)>중 특별히 <약소고결(若紹高潔)>이라는 편이 있다. 그녀가 총명하고 아름다우며 글을 잘 쓰고, 시집을 가지 않기로 뜻을 세우고, 고결함이 발군이라는 점을 찬미했다.
송약소는 당경종 보력초년(825년)에 사망한다. 통상적인 규정에 따라 매장하려고 할 때, 당경종은 통상적인 장례로는 송약소의 고귀한 신분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고, 특별히 관련부서에 명을 내려 국장의 규격으로 안장하게 하고 양국부인(梁國夫人)에 봉한다.
세자매중에서는 송약헌의 운명이 가장 불행했다. 이것은 송씨후손들에게 알려주었다. 남녀를 불문하고, 관직에 나가는 것은 아주 리스크가 큰 일이라고. 송약헌도 두 언니의 뒤를 이어 궁중이 비서부적을 담당했다.
당문종 이앙의 시기에 이르러, 황제는 글을 좋아했다. 송약헌은 문장을 잘 썼고, 시정을 담론하고 응답주대(應答奏對)하기를 좋아하여, 당문종이 특별히 좋아했다. 그리하여 중요한 막료로 끌어들인다. 누가 알았으랴 이로 인하여 필화가 발생할 줄이야.
당문종 대화중기(830년경), 중앙금군의 수령 왕수징(王守澄)이 실권을 장악한 후, 정주(鄭注), 이훈(李訓)의 두 난신적자를 끌어들여 재상 이종민(李宗閔)을 모함하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한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부마도위 심익(沈翊)을 시켜 뇌물로 송약헌을 회유한다. 당문종은 참언을 듣고, 크게 화를 내어 옳고 그른 것을 따지지 않고 이종민과 심익을 한꺼번에 처리한다. 그리고, "송약헌을 외부의 집에 연금시키고, 사사한다." 그리고 송약헌의 동생 질녀등 모두 13명이 연좌되어 처벌된다. 나중에 난신적자 이훈등의 죄악이 폭로되어, 당문종은 비로소 자신이 속았다고 알게 된다. 약헌은 억울했고, 안타깝게 죽었다. 그러나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송씨삼자매 송약신, 송약소, 송약헌은 당덕종, 당헌종, 당목종, 당경종, 당문종의 5명 황제를 모셨다. <신당서>, <구당서>에는 후비전에 이름을 넣었다. 이를 보면 그녀들을 황제의 여인으로 취급한 것이다. 그러나 삼자매는 비록 구중궁궐에 있었고, 비빈에 이름을 올렸지만, 시침을 한 적은 없고, 계속하여 자신의 재능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자태나 용모로 총애를 받지 않았지만, 조야에서 모두 존경하고, 신민이 모두 찬양했으며 가족의 아름다운 명성이 후세에 전해졌다. <이십사렴>에는 "무릇 여자로서 가학을 전하며, 양친의 명성을 떨치고, 오랫동안 관직에 있으면서 황은을 독보적으로 받았으니 가히 고금에 없는 일이라 할 수 있다."
특별히 언급해야할 한 가지 상황은 <신당서.후비하>는 삼자매의 비범한 의지와 성취를 서술한 후, 한 마디를 덧붙인다: "송정분의 아들들은 멍청하여 가르칠 수 없었고, 평생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 작자는 아마도 이런 말을 하고 싶었나보다. 당나라중기말기이후, 중국은 이미 음성양쇠(陰盛陽衰)의 기세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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