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정치/중국과 일본

목단사사건(牧丹社事件): 유구의 번국지위를 바꾼 사건

중은우시 2014. 5. 29. 23:54

작자: 미상

 

 

 

 

목단사사건은 1874년(청나라 동치13년, 일본 메이지7년)에 유구왕국의 선박조난자들이 대만 원주민에게 피살된 사건이다. 일본은 이로 인하여 출병하여 대만남부 원주민부락을 공격하는 군사행동을 개시하고, 그후 청일양국은 외교적으로 절충한다. 이것은 일본이 메이지유신이래 처음 대외로 병력을 출동시킨 것이고, 중국과 일본의 근대역사상 첫번째 중요한 외교사건이기도 하다. 중국측에서는 이를 목단사사건이라고 부르고, 일본측에서는 대만출병 혹은 정대지역(征臺之役)이라고 부른다.

 

유구왕국은 명나라때부터 중국의 번속국이고, 그 국왕은 중국의 책봉을 받아왔다. 조공무역을 허가받은 횟수는 번속국중 가장 많았다. 중국은 오랫동안 일본과의 무역을 거절했으므로 유구가 중간에서 '중국비단-일본백은'의 제3국무역으로 거대한 이익을 얻었다. 다만 이로 인하여 일본이 유구를 중시하게 된다. 일본 사쓰마번은 관원지전(關原之戰)후 재정곤란, 국면불안정에다가 해외의 공로로 막부에 성의를 표시하려는 생각에서 유구를 합병하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 1609년, 사쓰마는 3천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유구왕국의 수도 수리성(首里城)을 공격해 들어간다. 다만 도쿠가와막부는 사쓰마번에게 유구왕실을 보류하도록 명령한다. 유구를 통하여 중국과의 무역에 편의를 얻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유구국왕은 이때부터 자주성을 잃어버리고 사쓰마번의 지배를 받는다. 아마미군도(奄美群島)는 사쓰마번에 점령당한다. 이때부터 유구는 '중일(사쓰마)양속'의 상태가 된다. 한편으로 중국의 책봉을 받고 조공무역을 진행하면서, 동시에 국정은 사쓰마번의 통제를 받는 것이다. 1867년 왕정복고, 막부장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의 '대정봉환'으로 에도시대는 끝이 난다. 그후의 메이지유신 과정에서, 많은 무사(유신시기에는 '사족(士族)'이라 칭함)들이 실업을 하여, 큰 사회문제로 된다. 그리하여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등은 '정한론(征韓論)을 내놓아, 해외확장으로 내정문제를 해결하자고 주장한다. 다만 한반도를 정벌하는 것은 외교상 곤란이 비교적 컸고, 일본내각의 다수 각원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참의 사이고 다카모리등 정한파관리들은 하야하게 된다. 일본조정은 사족의 정서를 다독이기 위하여, 대만에 출병하는 안건을 내놓는다. 어떤 학자들은 일본정부의 '출병대만'은 단순히 사족의 내정에 대한 불만을 다독이기 위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대만의 경제가치와 전략적 지위에 대하여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대만자원의 약탈 혹은 영토침략의 동기를 왜소화시켜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팔요만사건(八瑤灣事件)

 

1871년 10월 18일(메이지4년, 동치10년) 10월 한 척의 유구국 미야코지마(宮古島)에서 나하(那覇)로 공물을 바치러 가던 산원호(山原號)가 회항때 태풍을 만나, 대만 동남부 팔요만(지금의 구붕만(九棚灣))으로 표류한다. 배에 타고 있던 69명의 승객중 3명은 익사하고, 66명이 상륙한다. 며칠 후 고사불사(高士佛社) 원주민을 만난다. 54명이 살해당한다. 죽은 자들 중에는 중종근풍견친(仲宗根豊見親)(즉, 충도씨현아(忠導氏玄雅))의 14세손 충도씨현안(忠導氏玄安)이 포함되어 있었다. 횡액을 피한 12명은 현지 한인 양우왕(楊友旺), 양아재(楊阿才)가 구해주어 대만부로 간다. 청나라정부관리는 복주의 유구관으로 보내고 배를 태워 귀국시킨다. 역사에서는 미야코지마도민대만피살사건이라고 한다. 이런 류의 사건이 당시에는 시시때때로 발생했다. 관례에 따라 모두 중국정부에서 구휼한 후 유구왕국으로 돌려보내고 일본정부와는 교섭하지 않았다. 다만, 일본측은 1871년 일본 메이지정부의 '폐번치현'때 사쓰마번은 가고시마현으로 고치고, 원래 사쓰마번에 속했던 유구왕국은 가고시카현에 예속된다. 1872년 일본정부는 일방적으로 유구왕국을 폐지하고, '유구번'을 설치한다. 1873년 일본정부 외무경 소에지마 다네오미(副島種臣)는 청나라총리아문에 이 일을 제기할 때, 대신 모창희(毛昶熙)가 답변한다: "두 섬(유구와 대만)은 우리의 속토이다. 속토의 사람이 서로 죽이면 관할은 우리에게 있다. 우리가 유구사람을 구휼하는 것은 우리가 알아서 할 일이고, 그대의 나라가 간여할 일이 아닌데, 왜 귀찮게 묻고 있는가" 일본은 피해자중 4명의 오다현(小田縣, 일본 오카야마현 오다군)의 어민이라는 증거를 내놓고, 다시 '귀국은 유구의 백성을 구휼해주기는 하면서 왜 대만의 백성을 처벌하지는 않는가?"라고 따진다. 모창희는 살인자는 치지화외(置之化外)의 생번(生番)이라는 것을 이유로 들어 답변한다. 소에지마는 다시 말한다: "생번이 사람을 해치면, 귀국은 치지도외하는가 우리는 섬사람들에게 죄를 물어야 겠다. 귀국과는 우호적인 관계이므로 특별히 먼저 말씀드리는 것이다." 모창희는 일본사신의 의도를 제대로 살피지 못해서 입에서 나오는대로 말한다: "(대만) 생번은 우리의 화외지민이다 죄를 묻듣지 말든지 귀국에서 마음대로 처리하라." 일본측은 그의 이 답변을 무기로 삼아서 '무주번계(無主番界)'에 출병한다.

 

전사발전(戰事發展)

 

일본은 육군중장 사이고 츠쿠미치(西鄕從道,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생)를 '번지사무국도독'에 임명하고, 영국 미국등으로부터 배를 빌리고, 미국군사고문 C. W. Le Gendre를 고용하여 대만출병을 준비한다. 그리고 사전에 가비야마 스케노리(樺山資紀), 미즈노 다카시(水野遵)를 대만에 보내어 조사를 시킨다. 출병 전날, 영국,미국등은 태도를 바꾸어 반대를 표시하고, 중립으 선언하고 선박을 일본군에 빌려주지 는 것을 거절한다. 일본정부는 외교압력을 견디지 못해 이번 행동을 중단하기로 결정한다.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는 친히 나가사키로 가서 파병중단을 명령한다. 그러나 사이고 츠쿠미치는 '이미 준비를 마쳤다'는 이유로 명령을 받기를 거부한다. 긜고 36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대만으로 간다. 이것은 나중에 일분군국주의 장교가 전쟁터에서 독단독행하는 남상이 된다. 이는 일본군국주의의 프로토타입을 보여준다. 또한 군사의 선행과 정치의 추인의 형태가 굳어진다. 저명한 문사학자 시바료타로는 이번 출병은 아무런 명분이 없는 전쟁이었다고 평가한다. '관제의 왜구'라고 표현한다. 1874년(동치13년) 5월 8일, 일본군은 사료(社寮, 지금의 병동현 차성향 사료촌)에 상륙한다. 5월 18일부터 5월 21일까지, 일본군은 대만원주민과 소규모 전투를 벌이고 상호 사상자가 발생한다. 5월 22일, 일본 육군중령 사쿠마 사마타(佐久間左馬太)는 일본군 150명을 지휘하여 석문(石門, 지금의 병동현 목단향 석문촌)으로 진격한다. 여기서 원주민의 격렬한 저항에 부닥친다. 마지막에 일본군 육전대는 절벽을 타고 올라가서 고지를 점령하면서 형세가 역전되고 원주민은 패퇴한다. 목단사의 추장 아록고(阿祿古) 부자는 사망한다. 이번 전투를 거치면서, 다수의 관망태도를 취하던 원주민은 일본군측으로 기운다. 6월 1일부터 일본군은 3로로 나누어 목단사, 고사불사, 여잉사등 원주민을 소탕한다. 도중에는 소규모의 저항이 있을 뿐이었다. 마을을 점령한 후에는 불에 태우고 다시 사료의 숙영지로 돌아온다. 7월 1일, 목단사, 고사불사, 여잉사는 마침내 투항한다. 일본군은 귀산(龜山, 지금의 차성향 국립해양생물박물관 부근)으로 숙영지를 옮겨서 장기간 주둔한다

 

중일교섭

 

일본은 5월 중순 대만에 출병하고, 청나라조정은 이어서 5월하순 선정대신 심보정을 파견하여 순열의 명목으로 대만에 간다. 대만의 해상상위와 각국과의 외교사무를 주재하게 된다. 이홍장은 당정규로 하여금 회군 13영 6500명을 대만에 보낸다. 이 부대는 서양총포에 익숙한 회군의 주력군이었다. 당시 음력9월중순이후 10월사이에 대만에 속속 상륙한다. 이렇게 되니 쌍방의 정세는 역전된다. 심보정의 담판 위치는 졸지에 올라간다. 게다가 이때 일본군은 열병으로 650명이 병사한다(전사자는 겨우 20여명이었음). 또한 군비 1260여만엔을 썼다(이것은 병력운송용 선박을 사는데 들인 770만엔은 포함하지 않은 금액임). 일본은 계속 지속하기가 어려웠다. 그리하여 일본정부는 내무경 오쿠보 도시미치를 전권대신으로 파견하여 중국과 교섭한다. 당시 심보정 및 이홍장은 정세애 대해 분명히 판단하고 있었다. 각각 상소를 올려 일본이 급히 화해를 구하는 것은 실로 정세가 어쩔 수 없이 급박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중국정부는 처음에 태도가 강경했고, 군기대신 문상(文祥)은 공개적으로 말했다.일본측이 요구한 군비배상에 대하여, "한푼도 줄 수가 없다." 다만 오쿠보 도시미치는 영국공사 Thomas Francis Wade를 조정인으로 나서게 해서 강하게 개입한다. 그리하여 중일양국은 1874년 9월 22일 북경전약(北京專約)을 체결한다. 모두 3개조문이다:

 

- 일본국이 이번에 취한 행동은 백성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로 보아야 하고, 청국은 이를 문제삼지 않는다.

- 피해를 입음 모든 난민집안은 중국에서 은량을 구휼하고, 일본의 모든 도로건설, 건물건축등의 건에 대하여는 청국이 남겨서 자신이 쓰기를 원하며 먼저 은량을 준비한 후 별도로 협의한다.

- 이일과 관련한 양국간의 일체 왕래공문은 피차간에 취소,말소시키고 영원히 다시 논하지 않는다. 그 곳의 생번은 청국이 자체적으로 방법을 강구하여 적절히 단속하고 다시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한다.

 

중국측에서 군비를 배상한다고 하지는 않았지만, 50만냥의 은전을 10만냥의 '구휼'과 40만냥의 '도로건물구매금'으로 지급한다. 이것은 체면을 보전하는 상황하에서 일을 끝낸 것이다. 다만 조약에서 일본출병은 '백성을 보호하기 위한 의로운 조치'라는 것을 인정했다. 일본은 이에 근거하여 중국이 유구가 일본의 속지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1875년 계속하여 '유구처분'을 진행하여 유구는 중국에 대한 조공을 중단하고, 다시 1879년 유구국왕 상태(尙泰)를 일본 도쿄로 이주시킨다. 그리고 군경을 유구에 파견한다. 그리고 '유구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현'으로 고친다. 다만 중국은 유구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하지 않았고 일본에 항의를 제기한다. 1880년 전 미국대통령 그란트의 조정하에, 일본은 오키나와섬의 북부를 일본에 귀속시키고, 미야코시마, 야에야마지마(八重山島)는 중국에 귀속시킬 것을 제안한다. 다만 마지막에 중국은 불의(不義)라는 것을 이유로 이런 분할방안에 동의하지 않는다. 1894년 청일전쟁때 일본이 청나라를 격패시키고, 대만이 일본에 할양되면서 더 이상 유구문제를 물을 수 없게 된다. 유구는 비록 국제적인 묵인하에 일본에 귀속되었지만, 중국과 일본간에 유구의 종주권을 포기하고 일본에 귀속시킨다는 여하한 조약도 체결된 바 없다. 지금까지도 중국은 정식으로 일본과 체결한 조약에서 일본정부가 유구의 주권을 보유했다고 인정한 바 없다.

 

'목단사사건'이후, 청나라조정은 대만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대만을 다스리기 시작한다. 부현을 증설하고, 1884년 중불전쟁이 일어난 후, 1885년 복건대만성을 건립한다. 즉 대만성이다. 그리고 대만동부 및 원주민지구도 개발하여 외국세력이 원주민문제로 대만에 진입하지 못하게 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