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조염(趙炎)
차문도장리(借問桃將李), 상란욕하여(相亂欲何如)
이것은 무주(武周)시대 여관 상관완아의 응제시(應制詩)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1300년이 지난 오늘날, '당고소용상관씨묘(唐故昭容上官氏墓)'가 발굴되면서, 우리는 마찬가지로 묻고 있다. 상관완아, 도대체 어떤 여인인가? 신룡연간의 궁란, 경룡연간의 정란, 사관들이 쓴 글에서는 음란하다고 확실하게 말하고 있는데, 도대체 그것이 맞는가 아닌가?
각종 판본의 영화, 드라마 내지 화극이 계속 상연되면서, 상관완아의 이미지는 중국인의 마음 속에 거의 틀을 갖춘 것같다: 미녀, 재녀 그리고 탕부(蕩婦). 훼예참반(毁譽參半, 칭찬하는 말과 폄하하는 말이 반반)이라고 할 만하다. 예를 들어, <무측천비사>에서는 상관완아가 염약도리(艶若桃李), 재사민첩(才思敏捷)하지만, 장창종을 희롱하는 역으로 나온다. 같은 이름의 드라마에서, 그녀는 당중종의 소용으로 제고(制誥), 즉 황제가 내리는 문서를 장악하여 권력이 조야를 뒤흔든다. 그리고 무삼사의 정부이고, 남자애인 최식(崔湜)도 두었다.
역사를 읽은 사람이라면 통상적으로 정사를 '신사(信史, 믿을 수 있는 역사)'로 본다. 그러나 상관완아에 대하여 신사는 그다지 믿을만하지 못하다. 오대(五代) 후진(後晋)의 평장사(平章事) 유구(劉昫)가 명을 받들어, <당서> 200권을 편찬한다(후세에 <구당서>로 불리는 것임). 그중 상관완아에 관련된 전기에는 "봉승권귀(奉承權貴), 음란궁위(淫亂宮闈)"의 부정적인 내용으로 가득하다.
예를 들어, "상관완아는 무삼사와 음란한 짓을 하고, 매번 칙서를 쓸 때면 사례를 들어 무후를 높이고 황실을 억눌렀다." "상관완아는 또한 이부시랑 최식과 정을 통했다. 최식은 상산신로를 건설하는 업무를 맡는데, 일을 다 하기도 전에 당중종이 붕어한다. 상관완아는 유조를 초안하여 그의 공을 왜곡하여 포상을 받게 했다." 그러나, 기괴한 점은 유구의 사료는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우리는 알고 있다. 공식 사서를쓰는데는 당안학(원시자료)을 벗어날 수 없다. 고대의 소위 당안은 전조의 조서(詔書), 신하의 주절(奏折), 문인의 필기(筆記), 민간의 자료, 묘지명문등등이다. 다만, 당나라 당시의 '당안' 중에는 이 분야의 관련기록이 거의 없다. 유독 <경룡문관기>에만 이런 말이 한 마디 나올 뿐이다: "(상관완아)는 만년에 외부의 붕당과 통(通)하여, 권세를 농단해서, 조정이 그녀를 무서워했다." 만일 유구가 이 '통'자를 가지고 다른 사람과 '사통(私通)'한 것이라고 억측한 것이라면, 그것은 유언비어를 만들어 퍼트린 혐의가 짙다. 다른 사람의 명예를 깍아내리는 것이 한 글자로 족하다. 정말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보통의 한 글자가 어떤 경우에 사람을 망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사람을 가르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오대시기에 시승(詩僧) 제기(齊己)는 <조매(早梅)>라는 시를 쓴다. 그는 "전촌심설리(前村深雪裏), 작야수지개(昨夜數枝開)" (앞마을의 깊은 눈 속에 어젯밤 몇 가지가 피었다)라는 문구를 쓰고는 아주 만족해 했다. 그래서 그는 시우(詩友)인 정곡(鄭谷)에게 보여준다. 정곡은 이 싯구를 평하여 말하기를 "몇 가지의 매화가 피게 되면 이미 상당히 번성한 것이다. 제목과 마지 않는다. '수지'는 '일지(一枝)'로 고치는 것이 좋겠다." 제기는 그의 말을 듣고 그렇게 고치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하여 정곡에게 감사인사를 한다. 이것이 바로 '일자사(一字師)'의 유래이다. 한 글자로 사람을 가리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구등 역사를 쓰는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듣지 않았으면 한다. 만일 들었다면 그것은 너무나 무서운 일이 발생할 수 있다.
무측츤이 본 상관완아는 첫째, 원수의 손녀이고, 적몰(籍沒)된 노비이다; 둘째, 귀여운 소녀이고 쓸만한 인재이다; 셋째, 믿을만하고 맡길만한 오른팔이다. 677년부터 704년까지, 상관완아는 무측천의 곁에서 28년간이나 모신다. 만일 상관완아에게 남들보다 뛰어난 품덕과 절조를 지니지 않았다면, 어찌 무측천으로부터 그렇게 오랫동안 총애를 받을 수 있었겠는가?
상관완아와 거의 동시대의 인물인 진장기(陳藏器)가 쓴 <본초습유(本草拾遺)>(단공로의 <북호록>에 수록되어 있음)에는 홍매장(紅梅裝)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비교적 믿을 만하다. 그 내용은 개략 다음과 같다 "무측천이 매번 재상을 만날 때면 소용(상관완아)로 하여금 자리 아래이 치마 속에 누워서 보고하는 내용을 받아적게 했다. 하루는 재상이 보고를 하는데, 소용이 몰래 얼굴을 내밀어 쳐다보았다. 황상(당고종)이 이를 발견했다. 조회가 끝난 후, 아주 화가 나서, 칼을 들고 소용의 머리카락쪽으로 찔러넣고는 뽑지 말라고 한다. 소용은 급히 시를 지어 칼을 뽑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나중에 상처부위에 매화꽃을 그려서 칼에 찔린 상처를 가린다." 황제가 아주 화가 났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노비 한 명 쯤은 개미를 밟아죽이듯이 죽여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상관완아는 경미한 경형(黥刑)만을 받았을까, 분명 무측천이 중간에서 부탁을 했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당시의 문인,사대부중에서 장열(張說), 무평(武平), 송지문(宋之問)등은 상관완아에 대하여 아주 높이 평가하고 아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장열이 쓴 <당소용상관씨문집서>에는 이런 말이 있다: "옛날에 여사(女史)가 있어 공과 과를 기록했고, 다시 여상서(女尙書)가 있어 사안을 결정했다. 소용은 양조에 모두 일을 잘 했다. 일일만기(一日萬機), 고문불유(顧問不遺), 응접여의(應接如意)했다. 비록 한나라에서는 반원(班媛)을 칭찬하고, 진나라에서는 좌온(左媪)을 높이 평가하지만, 상관완아는 문장도 뒤어나고, 보좌의 공도 대단하다...." 이뿐아니라 그의 글에서 상관완아를 폄하하는 평가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장열은 상관완아의 신화를 만들었다: "패국부인(상관완아의 모친)이 임신을 했을 때 거인이 큰 저울을 들고 '천하를 재겠다'라고 말한다. 소용이 미월에 태어나자 부인이 농담으로 말한다. '천하를 재겠다더니 너의 이 손으로 말인가.' 그러자 아이는 '예'라고 대답했다." 최식이 38살에 재상이 되는데 장열은 이로 인하여 최식의 배후에 상관완아가 있기 때문이라고 폄하하지 않고, 오히려 최식과 자신을 같은 류라고 말할 뿐이었다. 만일 최식이 상관완아이 숨겨둔 '애인'이었다면 장열을 아마도 절대 최식이 자신과 같은 류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경룡문관기>는 중종연간 상관완아가 수문관을 주재한 대사기이다. 편찬자는 상관완아 본인이 아니다. 거기에는 이런 말이 있다. "(상관완아)는 나이 14살에 총명하고 재빨랐다. 재능이 남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천후(무측천)이 그 말을 듣고 그녀를 시험한다. 그녀는 붓을 들자마자 글을 쓰고 문장은 모두 격식에 맞았다...천후의 인정을 받은 후, 그녀는 군국대사와 생살대권을 많이 결정했다."나라에 글을 좋아하는 선비가 있고, 조정에 학식없는 신하가 없었다. 이십년간 재야에 인재를 버려두지 않았으니 이것도 그녀의 힘이다."
상관완아는 당륭정변때 위후, 안락공주와 함께 피살된다. 그 후에 당예종이 즉위한 후 조서에서 자신의 위후, 안락공주 및 상관완아에 대한 입장을 표명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친유천유지의(親有遷幽之義), 무륙욕지전(無戮辱之戰), 창졸지시(倉卒之時), 난병소급(亂兵所及), 치불이례(致不以禮), 심용무연(深用憮然), 의긍죄려(宜矜罪戾), 차위천양(且慰天壤)". 모역의 대죄를 범하고 십악불사의 죄를 지은 여인에 대하여 황제가 '무연(슬퍼서 실의에 빠져있다)'이라든지, '차위(그리고 위로한다)'라든지 하는 말을 쓰고, 그리고 정2품의 예의로 매장을 해준다. 이를 보면 당예종은 상관완아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동정한 것이다.
그리고 장열은 서문의 끝을 보면 태평공주의 상관완아에 대한 평가와 견해를 엿볼 수 있다. 거기에는 태평공주가 옛날에 상관완아와 함께 놀러 갔던 것을 생각하고, 상관완아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겼으며, 그녀의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그리하여 궁중의 이야기를 보존한다는 명목으로, 당현종에게 상관완아의 저작을 모아서 문집으로 만들자고 건의한다. 즉, 상관완아의 문집이 남은 것은 당현종이 은혜를 베푼 것이 아니라, 태평공주가 상관완아가 죽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편찬하자고 말한 것이다. 그때는 태평공주가 피살되기 전이다. 이를 보면 상관완아가 평소에 의리를 중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헌종 원화연간에 이르러, 강도주부 유숙(劉肅)이 <당신어>를 편찬하는데, 여기에서도 상관완아에 대하여는 아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녀가 수문(修文)을 주재한 일을 언급하면서, "널리 재야의 인사들을 모으니 사방에서 모여든 사람이 만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상관완아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는 한 마디도 적지 않았다. 당나라말기의 문학자 여온(呂溫)도 시를 지어 상관완아를 찬미한 바 있다. "한가첩여당소용(漢家婕妤唐昭容), 공시능부천재동(工詩能賦千載同), 자언재예시천진(自言才藝是天眞), 불복장부승부인(不服丈夫勝婦人)"
왜 당나라때 사람들은 상하모두 상관완아의 나쁜 점을 애기하지 않았을까? 상관완아가 원래 청백하였다는 것 이외에 다른 해석을 할 방법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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