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위민홍 자술
내가 교육계를 떠나 사업을 시작한 것은 어느 정도 처의 끊임없는 바가지 덕분이다.
1980년대말에서 1990년대초, 마침 출국붐이 한창일 때였다. 그 시기에, 나는 주위의 친구들이 하나하나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나중에 그들이 해외에서 부쳐오는 우편엽서를 보고서 비로소 그들이 이미 북미대륙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이 모두 출국하는 것을 보고도 나는 여전히 크게 부럽지는 않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는 이때 이미 결혼을 했다. 나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데, 처는 나를 다른 사람과 비교했다. 그녀가 나에게 시집온 것은 그녀에게는 보통 결심이 아니었다. 거의 쇠똥에 꽂은 꽃한송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만일 내가 너무 뒤떨어지면, 그녀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돌연 어느날 나는 고함소리를 듣게 된다: 만일 네가 출국하지 않으면, 영원히 집안에 들어올 생각을 하지 말아라. 나는 한바탕 말싸움을 벌인 후 나의 운명이 이것으로 바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발견했다. 한 여인이 결혼한 후 최대의 능력은 자신은 더 이상 발전하지 않으면서, 남자를 아주 발전하게 하거나 아주 실패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마누라의 고함소리는 일체의 역량을 초월한다. 1988년부터 나는 어쩔 수 없이 출국을 위하여 열심히 공부해야 했다. 매번 나는 밤에 불을 켜놓고 TOEFL과 GRE를 공부할 때, 그녀는 기꺼이 나를 위하여 탕을 끓여주고 물을 따라주었다. 매번 내가 밤애 <삼국연의>를 읽으면, 그녀는 눈을 부라렸고, 바로 걷어차서 침상에서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나는 압력을 동력으로 바꾸고, 피동을 주동으로 바꾸어 마침내 TOEFL을 통과하고, GRE를 이겼다. 비록 점수가 아주 높지는 않았지만, 어쟀든 미국의 대학에 연락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그 교수들은 하나같이 눈이 매서웠다. 한눈에 나라는 그저 숫자를 채우는데 불과한 멍청이를 알아보았다. 태평양의 작은 섬 위에 있는 하와이대학마저도 나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나에게 장학금이나 학비보조를 해주려는 대학은 없었다. 나는 할 수 없이 스스로 학비를 준비해야 했다. 미국에 가려면 최소한 인민폐 십여만위안은 필요했다. 그 당시 이것은 천문학적 숫자였다. 나는 학비를 벌기 위하여, 몇몇 동창득롸 함께 수업을 했다. 수업방식은 아주 효과적이었다. 한번에 30위안, 10번이면 300위안이다. 나의 개인수입은 금방 늘어났다.
1988년부터 1990년까지, 나는 출국을 위하여 3년간 죽어라 노력했다. 마지막에 나는 결국 돈이 모자라서 해외로 나가서 공부하려는 꿈을 포기했다.
당시 나의 처는 나에게 요구하는 기준이 아주 높았다. 나는 죽어라 노력하며 공부했고, 돈을 벌었다. 첫번째 노력은 죽어라 공부해서 출국하는 것인데, 성공하지 못했다. 나는 그래서 방향을 바꾸어 계속 노력했다. 바로 나는 반드시 집안에 쓸 돈을 마련해야 했다. 그렇게 해야 나는 처의 나에 대한 위기감을 약간 뒤로 늦출 수 있었다. 당시 쓸 돈이 있다는 표지는 기실 아주 재미있다.
처는 텐진사람이고 나는 장쑤사람이다. 나는 장강의 가에서 살았고, 그녀는 해하의 가에서 살았다. 그래서 모두 물고기를 잘 먹었다. 우리 둘은 모두 대학의 보통 교사였다. 돈이 없어서 나는 당시에 물고기를 살 때면 죽은 고기를 샀다. 왜냐하면 죽은 고기는 근당 2위안 혹은 마리당 2위안이었다. 살아있는 물고기는 6,7위안이었다.
나는 기억한다. 하나의 전환점은 바로 내가 바깥의 학원에서 수업을 한 후 처음에는 1달에 1,2백위안이었는데, 나중에는 1달에 6,7백위안이 되었다. 당시 내 처는 중앙음악학원에서 일했다. 우리는 북대의 기숙사에서 살았는데, 저녁에는 일반적으로 내가 밥을 했다. 한번은 그녀가 퇴근해서 돌아온 후, 어탕을 활어로 만든 것을 발견한다. 그러자 아주 기뻐했다. 그날 저녁이 아마도 우리 생활의 전환점이 된 것같다. 이때이후 그녀는 나에게 부드러워졌다. 왜냐하면 활어를 먹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위민홍의 6대고통:
첫째 고통은 자신이 두번이나 납치를 당해서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것이다.
둘째 고통은 자신이 성공하기 전에, 매일 사나운 처로부터 바가지를 긁혔다는 것이다.
셋째 고통은 이치를 따지지 않는 학교상사들을 만나서, 결국 사직하고 실업의 고통을 참아내야 했다는 것이다.
넷째 고통은 왕창(王强), 쉬샤오핑(徐小平)같은 친구들을 불렀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권력을 점점 유명무실하게 만들어 나를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인랑입실(引狼入室)한 것이다.
다섯째 고통은 그저 니체철학만 얘기하고 걸핏하면 큰소리나 치는 동사회를 이끌어서 수천만위안의 현금을 가지고 투자하러 찾아온 양돈장주인을 쫓아버려서 방대한 자금을 잃어버린 것이다.
여섯째 고통은 신동방의 상장을 십분 후회하면서도 지금 그저 억지로 버티면서 앞으로 돌진하는 것이다.
"우리가 너를 따라 돌아온 것은 네가 우리를 위하여 4년이나 물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북대에서 학생으로 있을 대, 나는 비교적 동창들을 위하여 서비스하는 정신을 가졌다. 나는 성적이 별로였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노동을 좋아했다. 나는 근면한 노동으로 교수와 동창들의 주목을 받고 싶었다. 나의 손발은 비교적 부지런하다. 일은 아주 잘 해낸다. 이것은 당시에 아주 명예감을 가지는 일이었다. 이 점은 내가 절대로 거짓말하는 것이 안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부터 시작하여 적극적이고 주동적으로 교실청소를 해왔다.
북대이후 나는 이 양호한 습관을 계속 유지했다. 매일 기숙사의 청소를 했는데, 4년간을 계속 했다. 그래서 우리 기숙사에는 청소당번표가 아예 없었다. 그외에 나는 매일 기숙사의 물주전자를 들고 동창들을 위하여 물을 떠다 주었다. 그것을 나는 체육단련으로 생각했다. 모두 내가 물을 떠오는 것에 습관이 되었다. 마지막에는 이런 상황이 일어난다. 어떤 때는 내가 물떠오는 것을 잊은 때가 있었다. 동창들은 그러면, "위민홍이 왜 아직 물을 안 떠오는 거야?"라고 말했다. 다만 나는 물떠오는 것이 무슨 손해보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모두 동창이고, 서로 도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동창들은 아마도 내가 이 일을 괜히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다시 10년이 지났다. 1995년 연말때 '신동방'을 어느 정도 규모로 키웠을 때, 나는 협력자를 찾았다. 그래서 미국과 카나다로 가서 나의 그 동창들을 찾았다. 나는 그들이 돌아오도록 유혹하기 위하여 달러뭉치를 가져 갔다. 매일 미국에서 돈을 통크게 쓰고 다녔다. 그들이 중국도 돈벌기 좋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나중에 그들이 돌아온다. 그러나 나에게 아주 예상밖의 이유를 얘기했다: "위민홍, 우리가 돌아온 것은 네가 과거에 우리를 위하여 4년이나 물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했다: "우리는 알고 있다. 너에게 먹을 밥이 있으면, 절대로 우리에게 죽을 먹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우리는 함께 중국으로 돌아왔고, 공동으로 신동방을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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