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문화/중국의 종교

일관도(一貫道): 대만에서의 해금과정

중은우시 2012. 8. 15. 16:36

글: 장경평(章敬平) 

 

새해의 새기상. 1987년 원단이 지난 후, 대만당국은 종교자유의 창문을 열었다. 30여년간 '불법'신분이던 '일관도'가 마침내 갖은 풍파를 겪은 후 신분을 세탁하고, 대만당국과의 은원을 일소에 부쳤다

 

'일관도'라는 이름은 공자가 말한, "오도일이관지(吾道一以貫之)"에서 나온 말이다. 이는 청나라 초기에 탄생하여, 1930년대에 흥성한 종교신앙이다. '일관도'는 유불도의 삼교합일을 주장한다. 유문의 예의(禮儀)를 행하고, 도교의 공부(功夫)를 사용하며, 불가의 규계(規戒)를 받는다. 그들의 종지(宗旨)는 이렇게 개괄할 수 있다: "화인심위양선(化人心爲良善), 만세계위청평(挽世界爲淸平), 기세계위대동(冀世界爲大同)". 일관도는 대만지구의 토착종교가 아니다. 국민당이 대륙에서 패퇴하여 대만으로 온 후, 무신론을 신봉하는 공산당이 그들의 살길을 끊을 것을 두려워한 일관도의 지도자들이 부득이하게 황급히 도망쳐 온 것이다. 그리고 대만섬에서 새롭게 사업을 시작한다.

 

어찌 알았으랴. 국민당이 지배하는 대만도 마찬가지로 그들을 싫어할 줄은. 과거에 대륙에서, 그들은 개인주책에서 비밀리에 전도했다. 외부인들은 그들의 행적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신비하고 궤이하다고 여겼다. 대만에 와서, 그들의 전도장소는 역시 개인주택이었다. 그때 인민해방군은 매일 대만을 해방하려고 준비하고 있었고, 대만섬은 일촉즉발이었다. 초목개병이 국민당은 모든 집이 대문을 활짝 열고, 정부의 조사를 받아들이기를 바랐다. 그렇게 하여 공산당의 간첩분자가 잠복하여 파괴활동을 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일관도 신자들이 하루이틀이 멀다하고 비밀리에 집회를 열어서 무슨 "명사일지, 점개현관(明師一指, 點開玄關)"을 떠들도록 내버려둘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남의 집을 조사하려면 구실이 필요했다. 일관도에서 소수 싹수가 없는 자들은 가정에서 전도하는 불투명한 조건을 이용하여 부녀를 농락하거나, 혹세무민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만당국에 핑계거리가 잡힌 것이다. 그래서 1950년부터 대만성보안사령부는 그들을 금지하기 시작한다. 1952년, '내정부'는 <민간불량습속금지방법>에 근거하여 뿌리부터 그들을 단속했다. 그들이 풍속을 해치고, 치안을 방해하고, 정치에 간여하고, 공비(共匪)에 이용당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관도'는 들풀같은 끈질긴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너는 금해라, 나는 한다. 신도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늘어났다. 해협건너편이 '적'을 마주하고, 원나라이후 비밀결사들이 왕왕 화란의 근원이 되었던 전철을 되밟지 않기 위하여, 대만당국은 계속하여 탄압의 강도를 높인다. 그들을 사교로 규정하고 그들에게 활로를 남겨주지 않았다.

 

가장 심하게 단속한 것은 1963년이다. 이해에 경찰은 나체로 신에게 절하는 "압단교(鴨蛋敎)"를 단속한다. 경비사령부는 '압단교'가 '일관도'의 한 갈래라고 규정지은 것이다. 그들이 '풍속을 해치는' 짓을 한 것은 일관도가 사교활동에 종사한 것이라는 것이다. '일관도'의 지도자들은 앞에 나서서 경비사령부의 주장을 반박한다. 그러나, 힘이 모자랐다. 두 세번 싸운 다음에 '일관도'는 고개를 숙이고 잘못을 인정한다. 자신들은 '불법'조직이라고 인정한다. '정부기관에 합법적인 등기수속을 밟지 않았다'면서 해산을 선포한다. 그리하여, 새집이 부서지는데 그 안의 알이 무사할 수는 없다. 많은 '일관도'의 신도들은 간판을 바꾸어 단다. '겉옷'을 바꾼 것이다.

 

1980년대초, 장경국은 '총통'의 신분으로 10대종교의 지도자들을 접견한다. 그중 도교 지도자는 바로 간판을 바꾸어단 '일관도'의 지도자였다. 장경국은 부드럽게 말한다. 여하한 종교건 선량한 풍속에 위배되지 않고 기본국책을 받들어지키고, 사회인심에 유익하다면, 모두 마찬가지로 존중받아야 한다고 정치지도자의 이런 말에 감동을 한 그 신재조영심재한(身在曹營心在漢)의 '일관도' 지도자는 그후 당국에 등기를 허용해줄 것을 신청하는 '진정서'를 제출한다.

 

'진정서'에서 한편으로 장경국이 "예지와 원대한 안광이 있고, 우리 종교를 아껴주니, 실로 보통 사람이 미치지 못할 바이다"라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일관도를 변호한다. 일관도는 "유일하게 인심을 바로잡을 수 있고, 도덕을 새로 정비할 수 있으며, 중국민족의 충효정신을 발양시킬 수 있는" 종교라고 한다. 그리고 일관도의 신도는 국가를 사랑하고, 지도자를 사랑하며, 법을 지키고, 수치를 알고 의리를 숭상하며, 선한 일을 하고 베푸는 것을 좋아하며, 대만독립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장경국은 이 진정서에 감동했다고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문이 바로 열리지는 않았다.

 

1987년 1월 9일 일관도가 오랫동안 기다리던 '귀인'이 나타났다. 40명의 입법위원이 '입법원'에서 '행정원'에 긴급질문을 제기한 것이다. 그 숨은 뜻은: 너희 행정당국이 계속하여 단속하려 하지만, 일관도는 강호에서 지위가 내려가지 않고 오히려 올라가며, 신도가 백만이 넘는데, 이에 대하여 너희 행정당국은 반성해야 한다. 너희들은 그들을 중시해야 하고, 그들이 합법적으로 전도하게 허용해야 한다. 헌법에 명문으로 규정한 종교자유를 보호해야 한다.

 

4일후 저녁, 대만지구에서 종교단체등기를 주관하는 최고행정관리가 TV에 공개적으로 나타나서, 일관도의 등기를 받아주고, 합법적 지위를 부여하겠다고 약속한다.

 

환호작약하는 일관도는 공개성명을 발표하여, 대만당국의 해금에 대한 입장을 나타낸다. 성명에서 그들은 해금의 원인이 현명한 정부의 '덕정'때문이라고 하였다. 이 원인의 해석은 대만당국에 체면을 살려주는 것이다. 물론 진상과는 다르다. 연구학자들의 글에 따르면, 이번 해금은 대만정치민주화, 종교자유화의 외부환경과 관련이 있고, '일관도'가 계속하여 만들어가던 환경과도 관련있다. 매체의 동정을 샀을 뿐아니라, 신문여론을 이용하여 합법화의 길을 열었다; 정치선거에 개입하여 백만신도의 투표권을 행사하여, 집권 국민당에 호감을 샀다; 권력귀족과 교분을 맺고, 국민당고관들 중에 자신의 신도를 배양한다.

 

이것은 대만 내지 인류종교자유의 아주 특별한 사례이다. 입법위원이 행정당국에 질의한 '무기'는 종교자유의 헌법적 권리이다. 그러나, 일관도의 운을 바꿔놓는데 의지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당국의 해금에 대한 성명에서, 일관도는 과거 수십년동안 그들이 받았던 종교박해에 대하여 털끝만큼도 불만을 표시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그들은 당국이 국가안전을 고려하여 그들의 전도를 금지한 것은 합리적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그들은 대만당국을 미화했다. 신도들이 안심하고 도를 닦을 수 있도록 용인해준 것은 '도량이 넓은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이를 언급하는 것은 일관도의 '허위의식'을 풍자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관후함과 은인자중은 확실히 양호한 종교정신이다.단지 법률가로서 이런 중국특색이 넘치는 표현방식에 동의할 수는 없다. 박해는 박해이고, 부인할 필요도 없고, 부인해서도 안된다.

 

만일 영국정부가 '이교도'를 박해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선조들이 고향을 떠나서 멀리 대양을 건너도록 하지 않았다면, 미국의 제헌선조들근 아마도 헌법수정안에 그렇게 분명하게 종교자유의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보호를 못박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인류역사상 종교박해의 상흔이 없다면, 세계각국의 헌법에는 아마도 이처럼 소리높여 종교자유를 부르짖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무수한 종교박해, 무수한 종교충돌은 사람들로 하여금 국가는 반드시 국민의 종교신앙의 자유를 보호해야한다고 인식하게 만들었다. 누구든지 어떤 조직이든지 종교자유를 간섭할 수 없다.

 

정부에 있어서, 종교의 앞에 그들은 반드시 정교분리를 엄수해야 한다. 여하한 방식으로든 종교를 촉진하여서도 안되고, 종교를 억제하여서도 안된다. 일단 종교신앙에 위법범죄행위가 발생하면, 세속의 법률은 위법범죄행위를 징벌하는데 그쳐야 하고, 그들의 신앙을 타격해서는 안된다. 일관도가 해금된지 20년후 장경국의 비서를 지냈던 마영구(馬英九, 마잉주)는 '총통'의 명의로, 일관도에 대하여 과거에 당했던 억울함에 대하여 '사과'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