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미상
대명의 수도 남경, 홍무15년 십월의 어느 날, 그저 '악...' 하는 비명이 들렸다. 한 회족 사내아이의 물건이 칼을 쥔 노사부에 의하여 잘려나갔다. 그의 이후 신분은 "소내사(小內史)"이다. 그가 바로 나중에 대명이 자자해지는 삼보태감(三寶太監) 정화(鄭和)이다. 이해에 어린 삼보는 만11살이었다. 필자는 <명태조실록>을 읽어보았는데, 이 해에 확실히 대량의 "엄인(閹人)"이 많이 증가하여 내사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홍무연간에 유일한 경우이다. 홍무15년 십월 십일일, 내사 361명을 증설한다. 그리고 20일후, 홍무15년 십일월 초하루, 다시 내사 76명을 증가시킨다. 어린 삼보는 어디서 왔는가? 운남에서 왔다. 무슨 이유로 어린 삼보는 이런 인생의 악운을 맞이했는가? 그리고 그후 후손을 둘 수 있는 권리를 상실했는가? 그의 집이 너무 가난해서인가? 부득이 몸을 팔아서 노비가 되어야 했던가? 아니다. 그의 집은 아주 부유했다. 어린 삼보의 할아버지와 부친은 모두 메카로 성지순례를 간 바 있다. 돌아온 후 사람들에게 "하자(哈只)"(순례를 다녀온 사람)라고 불리웠다. 이는 그들의 집안이 경건한 무슬림신앙을 가졌을 뿐아니라, 집안이 매우 부유했고, 상당한 재력을 갖추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더욱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어린 삼보가 원나라초기 운남행중서성평장정사, 함양왕 새전적(賽典赤)의 6대손이라는 것이다. 새전적은 전해지는 바로는 선지자 모하메드의 큰 딸과 사위 알리의 후예이다. 즉, 어린 삼보의 몸에는 선지자 모하메드(570-632)의 유전자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비록 800년동안 30대를 내려와서 2의 30성분의 1에 불과하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성인의 후예이다. 이슬람교 내에서는 숭고한 지위를 가지고 있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 돈이 없어서도 아니고, 권세가 없어서도 아니다. 왜 아이를 이런 지경에 처하게 만들었을까? 역사상 유명한 태감들이 소년시대에 거세를 하고 입궁을 선택한 원인은 대부분 가난하여 다른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린 삼보는 도대체 무슨 원인때문이었을까?
1894년(광서20년), 운남성 곤양현 화대촌에서 출토된 정화 부친의 묘비에는 묘비명이 있다. 운남 석병 사람인 원가곡이 이 소식을 듣고는 1911년에 가서 탁본을 만들어 세상에 공개한다. 묘지명의 전문은 아래와 같다:
"공의 자는 하지(哈只)이고, 성은 마씨(馬氏)이다. 대대로 운남 곤양주 사람이다. 조부는 배안(拜顔)이고, 조모는 마씨(馬氏)이다. 부친은 하지이고, 모친은 온씨(溫氏)이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키가 크고 위엄이 있으며 풍채가 늠름하였으며, 자신을 숙이고 다른 사람에 빌붙지 않았다. 사람이 잘못하면 그 자리에서 질책하고 감추지 않았다. 성격은 특히 선하였고, 빈곤하거나 홀아비과부등 의탁할 곳이 없는 사람을 만나면, 항상 보호하고 도와주는데, 귀찮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공을 어른으로 모셨다. 온씨와 결혼했는데, 온씨는 부덕이 있었다. 아들은 사내가 2명인데, 장남이 문명(文銘)이고 차남이 화(和)이다. 딸은 4명이다. 정화는 어려서부터 재능과 뜻이 있어 지금의 천자를 모신다. 정씨성을 하사받았고, 내관감 태감이다. 공은 근면하고 총명하며 기민하며, 겸손하고 공경하고 세밀하여,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향신들이 모두 칭찬했다. 오호라. 그 아들을 보면 공이 평소에 쌓았던 것과 가르침을 알 수가 있다. 공은 갑신년 십이월 초구일에 태어나서, 홍무 임술년 칠월 초사흘에 졸했다. 향년 39세이다. 장남 문명은 영구를 모시고 보산향 화대촌의 벌판에 장사지냈다. 명문에 이르기를, 몸이 변방에 있으면서도 예의의 풍습을 익혔고, 백성들에게 널리 혜택을 베풀었으니, 그의 남은 경사가 많고, 그 아들이 세상에 빛을 드러내게 되었다. 때는 영락 3년 단양일이고, 자선대부 예부상서 겸 좌춘방대학사 이지강이 쓰다." 이것은 정화가 성공한 후, 영락3년(405년) 오월 초닷새에 예부상서 겸 좌춘방대학사인 이지강에게 부탁하여 쓴 글이다. 당연히 이지강에게는 윤필비를 주었다. 이 비의 출현은 정화의 출생지가 운남성 곤양현(금의 진녕 곤양진)임을 증명하고, 우리에게 정화 부친의 생졸년과 가정상황까지 알 수 있게 해준다.
1936년, 민국때 운남옥계현지를 편찬하면서 의외로 15페이지의 정화가보(鄭和家譜) 초본(抄本)을 수집하여 원가곡에게 준다. 그후 그의 학생 이사후가 장기간 연구한다. 1983년, 북경민족문화궁에서는 남경 <초정씨가보수서(抄鄭氏家譜首序)>의 약 1100여자가 발견된다. "왕 백안(伯顔)이 찰아미적납(察兒米的納)을 낳고, 진양후에 봉해진다. 미적납(米的納, 米里金일 것임)은 마삼보를 낳고, 진양후를 세습한다." 확실히 정씨가보의 기록은 정화가 이지강에게 얘기한 상황보다 훨씬 상세하다. 이렇게 하여 새전적(1211-1279) 후손의 가보자료를 종합하면, 그의 가계는 이러하다: 6대조는 함양왕 새전적이고, 오대조는 납속랄정(納速剌丁)이며, 4대조는 회안왕 백안(伯顔, 혹은 拜顔), 3대조는 진양후 찰아미적납, 2대조 부친은 진양후 미리금이다.
즉, 정화의 부친은 이름이 미리금(米里金)이다. 소위 마하지(馬哈只)의 칭호이다. 명나라가 운남을 점령한 후, 외국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였기 때문에, 운남의 회족들은 내지의 회족들과 마찬가지로 성을 마씨로 고치는 경우가 많았다. 운남은 원나라때 양왕(梁王)이 할거하던 곳이어서 이 과정이 내지보다 15년이 늦었다. 미리금은 어떻게 죽었을가? 39살이면 한창 나이이다. 대다수의 연구자들은 여러가지 고려로 한마디로 지나가려 한다. 명군에 죽었고, 어린 삼보는 명군에 끌려간다는 등과 같이. 더욱 심한 경우는 명군이 어린아이의 물건을 거세하는 습관이 있었다고까지 말한다. 이것은 근거없는 말이다. 그저 민간에서 어린아이를 놀라게 하려는 우스개에 불과하다.
필자가 종합적으로 연구해본 결과 정화의 부친 미리금은 홍무15년 육,칠월 사이에 죽었을 것이라고 본다. 토관(土官) 양저(楊苴)가 앞장선 그 반란이 있었고, 미리금은 적극적으로 반란에 참가하고 명군에 진압된다. 시간은 바로 묘지명에 쓴 홍무15년 칠월 초삼일인 것이다. 사건이 발생한 후, 어린 삼보일가는 반란군의 가족이 된다. 어린 삼보의 용모가 당시 남경에서 급히 구하던 궁정내사의 조건에 부합하였으므로 남경으로 압송되어 환관이 된다. 당연히 운남에서 남경으로 압송된 사내아니는 어린 삼보 한 명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절대로 회족에 대하여 한 것만도 아닐 것이다. 한족을 포함한 여러 민족의 반란자의 가족중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했을 것이다. 운남에서 남경으로 가는 길은 가장 멀고 가기 어렵다. 이들 운남의 사내아이들은 아마도 홍무15년 십일월 초하루에 증설된 제2차 내사일 것이다. 수량은 76명이다. 어린 삼보, 나중의 정화는 아마도 이 76명중 하나일 것이다. 미리금이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더라면, 어린 삼보는 환관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나중에 세계에 이름을 떨치는 항해가 정화도 없었을 것이다.
정화는 23년후, 이지강에게 묘지명을 써달라고 부탁한다. 미리금이 반란에 참가한 것은 피하고 쓰지 않는다. 심지어 부친의 진실한 이름도 쓰지 않는다. 그러나 중간에 약간의 평가와 탄식을 포함시킨다. 문자고수인 이지강은 이를 정확히 포착했다. 묘지명에 쓴 "자신을 숙이고 다른 사람에 빌붙지 않았다."는 것은 은근히 표현한다. 미리금등 원나라때의 귀족들은 명군이 운남에 진입한 것에 대하여 적대감을 가졌고, 굴복하지 않았으며, 부러질 지언정 굽히지는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원나라 양왕은 비록 자살했지만, 기회만 되면 권력과 지위를 잃은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홍무15년 3,4월 사이에, 이족(彛族) 지역의 오살(烏撒)부의 여성지도자 실복(實卜)은 반란을 일으킨다. 부우덕, 남옥, 목영등의 대군이 운집하여 동북방향의 오살로 향했다. 일시에 곤명이 비어버린다. 성을 수비하던 군사들은 대부분 병약자였다. 양식도 매우 부족했다. 이렇게 하여 양저, 미리금등은 기회를 잡고, 그들은 신속히 서로 연락하여, 5,6월경에 각부족 20여만명을 모아서 곤명성을 공격한다. 확실히 일단 성이 격파되면 명군과 각 문무관리들은 도살될 것이다.
당시 여남후 매사조는 운남포정사로 행정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반원명, 오인, 장담(張紞)등 각급행정장관이 모두 성안에 갇힌다. 압력이 아주 컸다. 성박은 시커멓게 20만이 둘러싸고 있었다. 성을 지키는 두 명의 명나라장수는 도독 사웅, 풍성(명나라공신 풍국용의 아들, 풍승의 조카)이었다. 그들은 "성을 굳게 지키며, 전투를 준비했다. 그리고 궁노를 설치하여 쏘았다. 왕왕 활을 맞고 죽었다. 적이 잠시 태만하면, 정예병을 출동시켜 공격했다" 이를 보면 성밖에 사람이 많기는 했지만, 군사소양은 이들 2선의 명군만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지막에 이 20만명은 곤명을 함락시키지 못한다.
목영은 오살에서 이 소식을 들은 후, 급히 정예기병 1만명을 돌려보내 지원하게 한다. 곡정에 도착했을 때, 기병부대는 다시 성으로 사람을 보낸다. 생각지도 못하게 이 통신원은 곤명성 바깥의 20만반군에게 생포된다. 심문을 당할 때, 그는 총병관 목영이 대군 30만을 데리고 곧 도착한다고 거짓말을 한다. 실제로 어찌 그렇게 많은 인마가 있을 것인가? 그러나 반군은 놀라서 간담이 서늘해진다. 속속 본영을 버리고 도망친다. 이를 보면 이들은 임시로 모인 오합지졸임을 알 수 있다. 이들 반군은 각자 잘 아는 거점을 지킨다. 안녕, 나차, 소전, 부민,진녕,대기,강천등이다. 사실, 모두 곤명성에서 100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지점들이다. 목영이 오살에서 전투를 마친 후, 대부대를 데리고 밀려온다. 양신의 보고에 따르면 반군의 수급 8만급을 얻었다고 한다. 당시 운남인구를 다 합쳐봐야 수십만명일텐데, 냉병기시대에 3천명을 죽이르면 자신들도 800명은 죽는다. 명군의 자체손실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이를 보면 쌍방간의 전투가 매우 잔혹했음을 알 수 있다.
모두 주의해야할 곳이 있다. 진녕이다. 원나라때 이곳은 진녕부였다. 진지에서 서쪽으로 50리를 돌아가면 바로 곤양주이다. 어린 삼보의 집은 바로 이 곳이다. 동으로는 진지에 접해 있다. 이곳은 미리금이 진양후로 봉해진 원인이기도 하다. 1950년 곤양현정부는 현재의 위치로 옮겨서 성관진을 설치한다. 1958년, 곤양현은 진녕현에 편입된다. 진녕현정부는 성관진에서 업무를 본다. 1965년 이 성관진은 곤양진으로 명칭이 변경된다. 이것은 모두 현지의 월산화대촌에서 정화의 부친 미리금-마하지의 묘비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보면 명인효과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현재 이곳에는 정화공원이 있다. 여기서 한 마디 보충하자면, 현재 곤양현의 화대촌은 민국초기의 화대촌이 아니다. 80년대에 만든 것이고, 이름만 빌렸다.
정화 및 그의 형인 마문명(마문명도 분명히 그의 부친처럼 아랍이름이 있었을 것이지만 전해지지 않는다)에 있어서 미리금은 자애로운 부친이고 어른이다. 일찌기 가족의 영광이었다. 운남에 주둔한지 9년된 목영으로 말하면, 미리금은 기존의 귀족지위를 잃고 싶어하지 않고 명나라군대의 조국통일대업에 항거하는 반혁명폭도에 불과할 것이다.
역사의 평가에서 핵심은 자신이 어떤 입장에 서느냐에 달렸다.
마문명에 있어서, 부친이 진압되고, 동생 삼보는 명군에 붙잡혀 간다. 원나라때 가족이 누렸던 왕, 제후의 특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명나라초기의 새로운 사회에서 꼬리를 말고 조용히 살아가는 것이 유일한 선택이다. 다행히 목영은 강대한 군대를 이끌고 있어서 반군의 가족들까지 모조리 처결하지는 않았다. 이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누가 알았으려 23년후, 동생 삼보가 돌연 나타난다. 이미 신황제 명성조 영락제의 아끼는 심복이 되어 있었다. 그의 인생은 비극에서 희극으로 그네를 탄다. 민간에 이런 속담이 있다: 인생의 앞 삼십년은 부친이 자식을 돌보고, 뒤 삼십년은 자식이 부친을 돌본다. 삼보태감 정화는 그의 특수한 공훈으로 부친에게 대명의 백성으로서는 받을 수 없는 존경을 받게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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