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중국은 왜 대일전쟁 10년후에 선전포고를 하였는가?

중은우시 2011. 1. 2. 00:26

글: 유계흥(劉繼興)

 

1931년, 국내외를 깜짝 놀라게 한 "9.18" 사변후, 중국은 일본군과 혈전을 벌였다. 동북의 백성들과 군인들은 항일투쟁에 속속 나섰다. 이들 항일무장세력은 동북항일의용군이라고 한다. 비교적 유명한 것으로는 마점산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흑룡강항일구국군, 왕덕림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길림중국국민구국군, 이두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길림자위군, 등철매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동북민중자위군, 경계주를 두령으로 하는 동북민중항일의용군, 소병문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동북민중구국군등이 있었다. 동북항일의용군에 참여한 사람은 노동자, 농민, 학생, 지식인, 동북군관병, 지방관리, 신사들이 포함되고, 동북각지의 녹림무장세력과 홍창회, 대도회등도 망라했다. 이리하여 일본군은 동북에 병력을 증파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곧이어 일본군은 시선을 동북삼성 바깥으로 돌린다. 1932년 1월 18일, 일본은 상해로 침입하고, 19로군을 위주로 한 중국군민의 저항에 부닥친다. 여기서 유명한 1.28 송호항전이 벌어진다. 이는 송호보위전이라고도 부른다.

 

국제관례에 따르면, 교전국은 일단 장기적으로 전투를 하게 되면, 단교를 선언하고 전쟁상태에 진입한다. 그러나, 이후 10년간, 중국과 일본의 양국정부는 모두 정식 선전포고나 단교를 하지 않는다. 1941년 12월이 되어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나서야 비로소 중국이 일본에 정식으로 선전포고한다.

 

중국은 왜 일본이 침입한 후 10년이 지나서야 선전포고를 했을까? 거기에는 무슨 숨은 이유가 있을까? 그 이유는 아마도 중일 쌍방이 모두 이해관계를 따져본 결과라고 할 것이다.

 

원래, 장개석을 우두머리로 한 국민당정부는 일본에 대하여 환상을 지니고 있었다. 1937년, 노구교사건이 일어난지 3일째 되는 날, 장개석은 여전히 외교부장으로 하여금 일본주중대사에게 조회를 보내어, 일본에 협상을 요구하며, 평화적으로 사태를 해결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협상제안은 즉시 일본에 의해 거절당한다. 일본은 오만하게 말한다: "군도를 이미 뽑았는데, 어찌 피를 보지 않고 다시 집어넣을 것인가?"

 

협상이 결렬되자, 장개석은 더욱 난감해졌고, 고뇌에 빠진다. 7월 16일, 장개석은 화를 참고, 국민정부 행정원에 회의를 소집한다. 그리고 대일선전포고문제를 논의한다. 회의에서 중일의 사태발전과 국제형세의 분석을 거쳐, 참석인원은 이해관계를 고려해서, '선전포고하지 않는다. 단교하지 않는다. 이것이 대일관계의 상책이다." 그 이유는 다음의 몇 가지이다.

 

첫째, 중국원조물자의 해상운송라인이 단절될까 우려했다. 중국의 군수물자는 자급자족에 미치지 못하였고, 절대다수를 외국에서 수입해야 했다. 만일 중국이 공개적으로 일본에 단교와 선전포고를 하게 되면, 일본은 교전국의 신분으로 각국에 일체의 군수품과 군수원료를 중국에 수출하지 말 것을 요청할 수 있다. 그리고 중국의 해상운송라인을 단절시킬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은 대랑의 외국원조물자의 해상수입을 보호할 능력이 없었다.

 

둘째, 독일의 군수장비가 중국으로 들어오는 것이 막힐까 우려했다. 중국은 군대의 장비를 정비하는데 독일고문단을 통하여 독일장비로 무장한 독일기계화사단을 만들었다. 당시 독일과 계약한 많은 군사장비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었다. 만일 선전포고하면, 일본은 당당하게 독일에 대중국군수물자수출을 금지할 것을 요구할 수 있다. 이는 중국이 항전을 지속하는데 아주 불리했다.

 

셋째, 쌍방의 교민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만일 단교와 선전포고를 하게 되면, 중국은 일본에 있는 교민들이 축출당하거나 체포당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은 교민을 철수시키거나 보호할 능력이 없었다. 이와 반대로 일본의 중국에 있는 교민들은 영국조계, 프랑스조계등으로 들어가서 계속 중국내에 머물 수 있다. 그리고 중국정부는 이들을 축출하거나 간섭할 수가 없다.

 

이상의 여러가지 요소를 고려했기 때문에, 장개석은 꾹 참고 선전포고를 발하지 않은 것이다. 상당히 장기간동안의 항전과정에서, 그는 한편으로 방어하면서 한편으로 평화협상을 요구하는 전략을 쓴다. 그러나 장개석이 조직한 몇 차례의 보위전은 정말로 참혹했다. 최종적으로 실패하기는 했지만, 일본의 기세를 꺽는데는 큰 역할을 했다.

 

중국침략전쟁이 전면적으로 발발한 후, 일본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선전포고문제를 아주 중시한다. 내각은 여러차례 중국에 대한 선전과 단교문제를 논의했다. 군측의 주장은 일관되게 '선전포고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선전포고는 중국과 제3국의 경제교류를 저지할 수 있고, 중국의 군수장비수입을 최대한 절단할 수 있지만, 일본도 자원이 부족한 섬나라이다. 대부분의 군용물자는 외국에서 수입한다. 만일 선전포고하면, 중국을 동정하는 국가에서 대일전략물자의 수출을 제한할 수 있다. 일본은 심지어 국제적인 경제제재도 받을 수 있다. 이것은 일본에 폐해가 이익보다 큰 것이 분명하다.

 

참고, 또 참는다. 그러다가 마침내 기회가 왔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국제형세가 크게 변화했다. 반파시스트진영은 갈수록 강대해졌다. 이때 장개석은 비로소 더 이상 이해관계를 따질 필요가 없게 된다. 철저히 일본과의 평화적해결을 단념하기에 이른다. 1941년 12월 9일은 장개석이 기세를 드날린 날이다. 이 날, 장개석정부가 대표하는 중국은 정식으로 일본, 독일, 이탈리아에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제2차세계대전은 이때부터 새로운 페이지를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