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석학봉(石學鋒)
장춘시에 거주한 적이 있는 중노년인은 대부분 자신이 거주하는 도시가 일본에 14년간 점령되었던 고통스런 역사를 명확히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장춘이 '만주국'의 수도로 '신경(新京)'으로 개명되었던 것도 기억이 새롭다.
당시 동북삼성의 성회(省會, 성정부 소재지) 도시의 규모를 보면, 장춘은 막 발전하기 시작한 신흥도시에 불과했다. 심양, 하르빈과 비교하면 차이가 컸다. 그렇다면, 당시 침략자인 일본은 왜 '만주국'의 수도로 장춘을 선택한 것일까? 이것은 깊이 음미해볼 만한 역사문제이다.
1932년 3월, 일본인이 도와서 건립된 괴뢰정권 만주국이 성립된다. 일본인의 뜻에 따라 연호도 '대동(大同)'으로 하고, 장춘을 수도로 정하면서 신경이라고 이름짓는다. 당시 심양에 거주하던 일본인에 있어서, 장춘을 수도로 정했다는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일본의 관동군사령부는 심양에 있었다. 일본의 공상업자들도 심양을 근거지로 경영한지 이미 오래되었다. 많은 일본인들은 당시 심양의 미래지위에 대하여 기대가 컸다. 즉 만주국의 수도로 심양이 될 것이라고 바랐던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1923년 3월, 일본인이 주체가 된 심양상공회의소는 일본관동군에 진정을 한다. 도시계획과 장춘을 수도로 정한 일을 재고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관동군사령부는 대세가 이미 정해졌으므로 수정할 수 없다고 했다. 이렇게 하여 심양에 거주하던 일본인들도 점차 심양을 공상업도시로 발전시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같은 해 8월, 심양상공회의소는 일본정부 내각, 만철, 만주국에 심양공상업진흥전략을 건의한다.
장춘이 일본인들에 의하여 만주국의 수도로 정해지게 된 것은 아마도 장춘이 늦게 개발되었고, 규모가 작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일본정부가 보기에, 하르빈은 예로부터 러시아의 정치거점이어서, 만주국의 수도가 되기에 부적절했다. 봉천(심양)은 중국인과 러시아인들의 정치세력이 존재해서, 국도로 삼기에 부적절했다; 고도 길림은 교통대동맥인 남만철도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리하여, 동북지구의 중앙에 위치하고, 인구가 겨우 13만명인 신흥도시 장춘을 관동의 다른 2개의 대도시를 물리치고 일본관동군의 주목을 끌게 된 것이다. 이후 14년에 걸치는 만주국의 수도로서의 역사가 시작된다.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만주국이 성립되기 2개월전에, 일본관동군은 이미 비밀리에 사람을 장춘으로 파견한다. 대규모로 장춘구시가의 주요건축물을 조사하고, 기본적으로 만주국 신정부임시사무실지점을 설치할 준비업무를 완성한다. 그리고 길림시와 당시의 길림성장 희흡(熙洽)과 교섭하여, 장춘을 중심으로 하여 20리의 사방구역에 토지매매금지령을 내린다. 토지투기가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1932년 3월 '만철' 산하의 경제조사회는 장춘도시건설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4월, '만주국'의 국도설립국이 자체연구를 시작한다. 나중에 일본군측, 만철, 만주국의 3방면이 공동으로 협상한 후, '만주국'정부에 위탁하여 실시계획을 집행하기로 결정한다.
궁전과 관공서거리의 위치에 관하여, 만철과 만주국정부는 의견이 달랐다. 만철은 중국의 도성조직원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형에 따라, 궁전이 남쪽을 향하지 않는 것으로 계획을 마련했다. 그러나, 황제 부의는 '절대로 남쪽을 향해야 한다고 엄중히 성명"을 발표한다. 새로운 상업지역은 이미 시가지의 남측에 두고, 기차역, 공업지구등에 대하여는 양자가 의견이 기본적으로 일치했다. 나중에 여러번 의견교환을 거쳐 1932년 11월, 최종방안이 나온다. 쌍방이 타협을 하여, 궁전을 행화촌으로 정하고, 정문은 남쪽을 향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만주국' 신경도시계획을 보면, 만주국의 수도건설계획지구는 200평방킬로미터이다. 계획건설지역은 100평방킬로미터이다. 구시가지는 21평방킬로미터였다. 제1기 5년간 20평방킬로미터(나중에 21.4평방킬로미터로 수정)를 개발한다. 수용인구는 50만명으로 최종결정된다.
신경도시계획은 장춘시건설에 소요되는 자금이 아주 컸다. 제1기 오년의 건설비용만 6000만엔이었다. 이는 모두 차관으로 조달하고, 토지매각대금으로 상환하고자 계획했다. 당시의 '만주국' 관리들은 프랑스연합재단에 차관을 요청한다. 그리고 이는 프랑스정부외교부의 지원을 받는다.
나중에 일본관리와 군대 및 만철이 프랑스인의 설계와 시공에 반대의견을 제시한다. '만주국' 수도건설국은 부득이 비용계획을 대폭 감축한다. 첫해에 500만엔의 차관만을 받는다. 최종적으로 프랑스인의 설계방안과 공사건설은 배제되고, 외교부청사 하나만 지금의 신민대가에 서 있게 된다. 이로 인하여, 우리가 오늘날 볼 수 있는 장춘의 구시가지는 철저한 일본현대건축과 계획의 실험지로 바뀐다. 지금까지도 일본의 토목건축사상 많이 거론되고 있다.
계획의 대강이 결정된 후, 국도건설국이 제정한 실시계획은 1933년 1월 '만주국'정부의 인가를 받는다. 지형측량업무는 1935년에 완성한다. 1936년부터 92.7평방킬로미터의 농지를 매입한다. 1937년에 1년여의 시공건설을 거쳐 신도시는 첫모습을 드러낸다.
계획상의 장춘도시배치는 동심원구조이다. 대동광장 즉 지금의 인민광장을 중심으로 하여, 세로방향으로 대동가가 있다. 지금의 신민대가이다. 가로방향으로는 흥인대로 즉 오늘날의 해방대로가 축선을 이룬다. 이렇게 하여 비교적 완벽한 신도시지역을 이룬다.
이 기간의 도로는 두 선이 직각으로 교차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여기에 방사선계통, 순환계통의 모습을 갖춘다. '만철'부속지구의 도로계통은 대각선도로였다. 그리하여 각도가 날카로운 교차점이 나타난다. 그러나, 장춘의 다른 지역은 방사선간선도로, 차간선도로등 비교적 좁은 도로도 교차하는 모습으로 설계했다. 나중에 일본군은 항일유격대를 타격하기 위하여 다시 계획실시구역외에 환상도로를 건설한다. 이때의 장춘은 간선도로의 너비가 개략 26-60미터이고, 빠른차량선과 느린차량선으로 나누었다. 만몽차량연구위원회를 설립하여 동북지구의 화물적재마차문제를 해결하도록 한다.
장춘가도의 특징은 시가지내에 뒷골목도로가 있는 것이다. 상하수도, 가스, 심지어 전신케이블선도 모두 이 뒷골목에 두었다. 이로 인하여 장춘의 간선도로에는 수목이 자유롭게 생장하는 특징을 가진다. 장춘을 정원도시로 만드는 기초가 된다. 지금까지, 장춘은 남북방향은 '가(街)', 동서방향은 '로(路)'라고 부르는 명명법칙을 지키고 있다. 당시의 도로명칭은 모두 만주국정부총리 정효서가 명명했다.
장춘의 하수도건설은 오수와 우수를 나누는 모델을 채택한다. 우수는 시내공원의 인공호수로 모여들게 설계하고, 오수는 이통하로 흘러들어가도록 설계했다. 그러나, 이런 오수정화방식은 일본이 패배할 때까지 완성되지 않았고, 처리장도 착공하지 못했다.
장춘시지역의 기복이 있는 지형구조는 전문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작은 하천이 흘러 들어가는 저지대는 기본적으로 인공호를 파고 공원으로 만든다. 주택용지로 쓰지 않았다. 1940년, 장춘의 공원, 운동상, 묘포의 면적은 10.8평방킬로미터에 달하여, 1인당 31평방미터의 높은 수준을 이룬다.
1937년말, 5년간의 건설을 거쳐, 장춘은 이미 33만인구를 가진 근대도시로 발전한다. 1937년 9월, 만주국국도건설기념행사가 대동광장에서 거행된다. 그리고 신경도시계획의 추진과 국도건설국이라는 기구는 당시 신경특별시정부당국에 이관된다.
제1기계획에서, 도로, 상하수도등 업무는 모두 대체로 완성된다. 그리하여 남령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시설, 녹지공원건설이 제2기사업의 중심이었다. 운동장, 식물원은 모두 건설이 시작된다. 지성대로는 60미터까지 넓힌다. 각 대학과 연결시킨다. 그러나 계획에 있는 도서관, 미술관과 대회당등은 일본인들이 시종 착공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
1939년을 전후하여, 장춘인구가 급증한다. 1941년에는 50만에 이른다. 거주, 교통과 물품공급상황이 심각해진다. 주도시구역외에도 주택이 건설되기 시작한다. 맹가둔 주택지역이 그 예이다. 전시에 에너지가 부족하여, 공공교통이 아주 곤란했다. 결국 수력발전과 철도자원을 가지고 지상전차를 건설한다.
실제로 신경도시계획은 장춘의 도시교통에 지하철을 도입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제2기건설을 시작하자마자, 임시로 설립된 국도건설국은 오사카시의 교통국 기술진을 불러, 반년의 시간을 들여서, 지하철계획을 만든다. 장춘의 지질조건이라면 오사카의 절반가격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진행되면서 이 계획은 소리없이 사라진다.
만주국의 황궁은 일본이 투항할 때까지, 겨우 지하부분만 완성했다. 지상부분은 나중에 모방하여 완성한 것이다. 즉 오늘날 우리가 보는 길림대학 지질궁이 그것이다. 황궁주위의 배치를 보면, 고전적인 중국황궁의 방식을 채택했다. 이 도시지역의 중축선은 순천대가(지금의 신민대가)이다. 북쪽끝의 황궁은 황제가 정무를 처리하는 곳이다. 황궁의 앞에 넓은 지역은 황제와 신민이 쉬는 장소(지금의 문화광장)이다. 오늘날 장춘제1자동차가 있는 곳은 방대한 황궁의 예비용지였다. 이를 보면, 일본은 장기간 장춘을, 동북지방을 점령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중국인이라면 이 역사를 잊어서는 안된다.
'중국과 역사사건 > 역사사건 (민국 후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만영(滿映): 일본의 문화침략도구 (0) | 2010.07.21 |
---|---|
1949년 미군의 칭다오철수 내막 (0) | 2010.06.19 |
강아륜(江亞輪)침몰사건: 세계최대의 선박사고 (0) | 2010.04.10 |
녹영장부대(綠領章部隊): 중공의 KGB (0) | 2009.11.12 |
소련은 동북(만주)에서 얼마나 많은 재물을 빼앗아갔는가? (0) | 2009.07.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