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che
강아륜(江亞輪)은 원래 1939년 일본의 "동아해운주식회사"가 건조한 여객화물선 "흥아환(興亞丸)"으로 "영파환(寧波丸, 나중의 江靜輪)과 자매선이다. 길이는 102.4미터, 너비는 15.3미터, 깊이는 4.7미터, 배수량은 3365.7톤(3730총톤), 2500마력, 항속 12-14노트, 원설계승객수는 1186명이다. 2차대전승리후, 강아륜은 해군총사령부에서 접수한다. 국민정부는 국영초상국에 대한 전쟁기간동안의 선박침몰 및 항구봉쇄에 대한 손실을 보상받는 것으로 하여 적산(敵産)인 강아륜등 5척의 윤선(輪船)을 교통부에서 초상국으로 넘겨주어 운영하게 했다. 초상국에서 개조를 거친 후, 이 선박은 적재승객 2250명으로 되었으며, 상해초상국의 6대 신형여객선중 하나였다. 사고때 선박은 겨우 건조한지 10년밖에 되지 않았다. 외관,설비등이 모두 당시 최고수준이었다. 강아륜은 1946년부터 항해시간이 12시간인 상해에서 영파까지의 짧은 항로를 운항했다. 매번 승객을 싣는 외에 화물도 1500톤 실을 수 있었다. 사고때까지 강아륜은 이미 이 항로를 800번이나 왕복했다.
사고당일 출발보고서에 기록된 것을 보면, 선박에 승객이 2607명(일설에는 2285명)이 있었고, 선장 심달재를 비롯한 선원이 179명이 있었다. 화물은 175톤(일설에는 460톤, 모두 비위험물품인 잡화였다)이 실려 있었다. 그러나, 배에 탄 실제승객수는 이 숫자를 훨씬 넘어섰다. 영파인여호동향회 강아륜참안선위회의 조사통계에 따르면, 당시 배위에는 표없이 탄 승객(표를 사지 않아도 되는 군인, 보따리장사꾼등)과 어린아이(어린이는 표를 사지 않아도 된다)를 합하면 실제승객은 4000명에 달할 것이다. 심지어 4600명이상으로 보기도 한다.
1948년 12월 3일 오후 4시정각, 상해-영파항로 운항임무를 띤 '강아륜'은 상해 십육포 3호부두에서 승객과 화물을 가득싣고 닻을 올리고 영파로 향했다.
18시 45분, 2번부통(浮筒)을 지나서 약 7분쯤 항해했을 때, 오송구 바깥 횡사서남쪽 백룡항 해면수도에 들어섰다. 강아륜의 우현의 뒷부분 제3실에서 돌연 폭팔음과 같은 거대한 소리가 들렸다(일설에는 두번), 선체는 격렬하게 진동했고, 모든 전등은 바로 꺼져버렸다. 폭팔한 곳에 인접한 전보방도 순식간에 무너졌고, 두 명의 무선통신원은 이미 폭발로 온 몸이 날아가 버렸다. 전보기기도 훼손되어 외부와의 연락이 끊겼다. 구조신호마저 보내지 못하게 된 것이다. 뱃머리의 조종실의 구원요청 기적도 상징적으로 한번 울렸을 뿐, 다시는 소리를 내지 못했다. 선창내는 칠흑과도 같았다. 차가운 해수는 콸콸 쏟아져 들어왔다. 남녀노소 모두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고, 정신없는 와중에 서로 앞다투어나가려고 싸웠다. 속속 갑판으로 달려갔다. "놀라서 소리지르고 비명을 지르고, 도살장과 같고, 세상의 종말이 온 것같았다. 노약자와 부녀아동들 중에는 밟혀서 죽은 사람이 많았다." 그 와중에 밟혀 죽는 사람, 물에 빠져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당시는 낙조였고, 동북풍이 약간 불었으며, 날씨는 맑았다. 폭발은 선체의 뒷부분에서 발생했고, 선미는 금방 가라앉았다. 먼저 횡액을 당한 사람은 3,4등실의 여객이었다. 당시 폭발전에 배표를 검사하기 위하여 철문은 잠겨 있었고, 그래서 도망칠 수가 없었다. 십여분후, 쏟아져 들어오는 해수가 이미 갑판을 뒤덮었다. 많은 사람들은 짧은 몇 분내에 가장 높은 갑판으로 올라가서 구조를 기다리지 못하고 선실 속에서 익사했다. 사고지점은 얕은 바다였다. 그리하여, 굴뚝, 난간 및 구명정은 여전히 수면 위에 나와 있었다. 그러나 어지러운 속에 하늘도 칠흑같아서 아무도 구명정의 줄을 풀지 못했다.
19시반, 마침 부근에 있던 어선 화부1호, 2호가 소리를 듣고 구조하러 온다. 그리고 강아륜을 대신하여 S.O.S신호를 보낸다. 그리고 물 위로 떠오른 승객 26명을 구조하여 어시장쪽으로 가서 해안에 내려준다.
21시반, '금리원(金利源)'호가 지나가다가 소리를 듣고 구조를 한다. 선주 장한정은 선원을 이끌고 긴 밧줄을 강위에 던진다. 그리하여 물에 빠진 사람들이 줄을 붙잡고 올라올 수 있게 해주었다. 이어서,'금리원'호는 뱃머리를 침몰한 배에 대고, 갑판에서 구조를 기다리던 사람들을 순서에 따라 배에 오르게 해주었다. 거의 사람이 다 찼을 때, 장선주는 사람을 구하는게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싣고 있던 귤등 화물을 바다에 버리고, 다시 배를 돌려 사람을 실었다. 이 배는 모두 453명을 구한다. 선주 장한정은 이로 인하여 상해시 첫번째 '영예시민'의 칭호를 받는다.
이어서 모리륜과 몇척의 배가 와서 구해준다. 모리륜은 모두 223명을 구했다. 구조된 사람은 모두 811명이었다.
그러나, 일부 배들은 수수방관하거나, 혹은 해상에 떠있는 화물을 주워가기도 했다.
추정에 따르면, 강아륜으로 죽은 사람은 3000명이상(선원은 58명)이다. 사망자수는 타이타닉호보다 훨씬 많았다. 사망자중 절대다수는 영파사람이었다. 그중에는 온가족이 죽은 경우도 있었고, 조손삼대가 함께 죽거나, 온 가족중 오직 1명만이 살아남은 경우도 있었다. 시신과 모자 수건등 유물이 차가운 강물위를 가득 채워서, 차마 바라볼 수 없이 참혹했다. 이는 중국현대항운사상 드물게 보는 대참극이었다. 사회여론도 비등했다.
초상국은 사고후 90여명의 잠수부와 십여척의 선박을 동원하여 시신을 건져올린다. 대다수는 이미 찾을 수 없게 되었고, 성명을 찾을 수 있는 시신이 1383구였다. 그중 남자가 629명, 여자가 414명, 남자아이가 208명, 여자아이가 132명(시신일부만 건진 경우는 제외)이었다.
전문가들의 여러 차례에 걸친 사고분석에 따르면, 항로를 잘못 들어선 것도 아니고, 보일러폭발도 아니었다. 일본국적의 잠수부인 마쓰모토(松本滿次)는 2개조를 이끌고 두 번에 걸쳐 전체 선박을 탐색했다. 그리고 강아륜의 폭발한 곳의 구멍의 직경은 30인치였고, 구멍이 난 곳의 강판의 상부가 바깥으로 나와 있으며, 아래는 안으로 들어갔다. 형상이 기이하여 구분하기 힘들었다. 제3후갑판의 화물실 일대는 바깥으로 부풀어 올랐다. 당시 항해전문가인 진간청, 진정여 및 조선공학학회 섭재복, 양준생등은 '수뢰(水雷)"가 선체를 공격하고 나중에 선내에서 폭발했다' 보았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아마도 선내에서 폭발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말한다. 살아남은 강아륜의 화물관리원은 화물을 실을 때 폭발물은 들어있지 않다고 했다. 몸에 휴대하고 들어간 폭탄으로는 이정도 큰 폭발을 일으킬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여러 측면의 조사를 거쳐 최종적인 의견은 대체로 수뢰를 잘못 건드린 것이라는 것이었다. 중국어륜공사 고구관은 "나는 아마도 전시에 남겨진 수뢰의 일종일 것으로 본다"고 했다.
1981년, 전 초상국 총경리 호시연은 <<항해>>잡지에 쓴 글에서 <<내가 아는 강아륜침몰진상>>에서 이렇게 말했다: 상해가 해방되기 전날, 초상국 동사장 서학우는 국제반점에서 국민당 해군부장 계영청과 양식으로 식사를 했는데, 호시연이 같이 참가했다. 식사동안에 계영청은 그들에게 대만으로 가자고 권유했다. 그리고 '강아륜이 오송구 밖에서 침몰한 것은 우리 해군비행기가 폭탄을 떨어뜨려 격침시킨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한 사람의 말 뿐이고, 다른 방증이 없다.
강아륜을 건져올리려는 계획은 1949년초부터 시작된다. 초상국은 먼저 주일대표단을 통하여 동경에서 인양전문가등 8명을 부르고 이들은 1월 17일에 상해에 도착한다. 10일, 초상국 해사과 과장인 범륜은 '제안'호를 타고 사고지점을 함께 가서 조사를 한다. 그런데, 파도가 너무 세서 25일에 되돌아온다. 3월중순, 일본의 인양업자가 다시 상해로 온다. 전체 인양비용으로 19만달러의 예산을 내놓는다. 나중에 초상국은 다시 미국인양업자를 불러서 선박침몰지점을 살펴보게 한다. 그러나 인양할 방법은 없고, 그저 폭파시키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나중에 조류충격등의 원인으로, '강아륜'은 점차 두 동강이로 나뉘어진다.
1956년, 상해시인민정부는 정치적인 고려와 항로는 준설한다는 뜻에서 강아륜을 인양하기로 결정한다. 그해 2분기에 인양공정국이 공사를 시작한다. 8월 20일에 후단을 인양하고, 항구로 끌고 온다. 10월 30일, 침몰선박의 전반부도 건져올려져서 보산 부근의 얕은 바다에 놓아둔다. 모두 160일의 시간이 걸려서 마침내 강아륜은 다시 물위로 올라왔다.
인양과정에서 전문적인 유골, 물자수집팀을 만든다. 유골이든 자잘한 금붙이이든 모두 건져올린다. 어떤 시신은 두골내가 진흙으로 가득했는데, 인양하면서 깨끗이 씼어서 상자에 넣었다. 모든 물자는 습득인, 수집인이 행정기관간부와 함께 현장에서 확인하고 도장을 찍고 밀봉했다. 그 후에 인양공정국이 보관하여, 통일적으로 상해시인민위원회에 보내어 처리하게 했다. 통계에 따르면, 이번 인양으로 유골 큰상자 2개, 작은상자 4개분, 각종 악세사리 천개이상, 금덩이 21개, 작은 금덩이 5개, 금팔찌 51개, 금가락지 228.5개, 모두 금 287냥가량이었다. 이외에 다이아몬드반지, 보석반지, 은, 은기, 외화등이 있었다. 이들 물품중 개인적인 표시가 있는 것은 소수였고, 대부분은 아무런 표시가 없었다.
"강아륜"의 인양은 상해각계인사의 주목을 받는다. 그리고 사망자유족들의 마음을 울렸다. 많은 사람들이 상해시인민위원회 및 상해인양공정국에 연락해서 인양작업의 진전을 물었고, 강아륜의 침몰원인을 물었다. 가족의 유골을 찾아서 안장할 수있기를 바랬다. 어떤 사람은 건져올린 강아륜을 직접 보려고 했다. 그리고 배가 침몰한 곳에서 사망자의 원혼을 조문하려고도 했다. 국민당 중앙은행의 직원을 지낸 황체안은 모친과 결혼한지 11개월밖에 안되고 임신한 처가 모두 강아륜사고로 죽었다. 시신은 찾지를 못했다. 그는 선박이 침몰한 강변으로 가서, 잠수부들에게 가족의 유골을 찾아달라고 눈물로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찾지를 못했다. 나중에 그는 여러번 황포강변을 배회하며, 바라보고 묵묵히 차가운 겨울을 보냈다. 그는 인민정부가 인양작업을 한다는 말을 듣고, 즉시 서신을 쓴다. "다시 한번 강아륜을 보게 허용해달라. 나의 모친과 처는 이 배의 1등실 3호방안에 있었다..."비통한 마음은 충분히 엿볼 수 있었다.
인민정부는 '강아륜'호의 사망자가족들의 심정을 고려해서, 신속히 성비화를 위원장으로 한 유골물자처리위원회를 조직한다. 그리고 해관빌딩에 사무실을 두고 가족들의 방문을 맞이했다. 1957년 2월 16일과 2월 20일, 위원회는 두번에 걸쳐 일부 사망자가족과 생환자들로 하여금 건져낸 강아륜의 잔해를 보도록 해주었다. 잔해의 강판이 바깥에서 안으로 굽은 폭파구멍을 보고 그들은 분기탱천했다. 속속 국민당정부가 당시 유언비어를 퍼트려 강아륜이 수뢰에 접촉하여 폭파된 진상을 감추었다는 것을 알았다. 위원회는 여러번 좌담회를 개최하여 사망자가족의 의견과 요구조건을 들었고, 청명절전에 고북로 영안공묘에 '강아륜사망자유골의 매장의식을 거행한다. 1957년 3월 19일, 350여명의 사망자유가족은 꽃과 초를 가지고, 매장의식에 참가한다. 그리고 위원회는 인양해낸 물건들 중에서 구체적인 표지가 있는 것들은 사망자가족 심덕보, 진제남, 습영연등에게 반환한다. 그들은 9년이나 지난 유물을 보고 모두 눈물을 흘렸다.
1957년 4월 23일, 위원회는 강아륜에서 인양한 물자의 사후처리목록을 발표한다. 인양한 물자(유가족에게 반환한 물품 제외)는 환산한 금액이 29400여위안이었고, 결산하고 남은 12000여위안은 위원회가 상해시구제회에 주어 통일적으로 처리하게 한다.
인양한 강아륜호는 비록 두 동강이가 났지만, 강판, 기기, 보일러등은 아직 괜찮았다. 수리한 후에는 다시 쓸 수 있을 정도였다. 선박공업관리국의 지시에 따라, 강남조선창은 1956년 8월 23일 상해해운관리국과 강아륜호 회복수리공사계약을 체결한다.
1957년 1월 상해해운관리국은 이 업무를 장강항운관리국에게 맡긴다. 나중에 장강항운관리국은 강남조선창과 수리계약을 체결하고, 그해 1월 10일, 선박의 제1단계 수리작업이 시작된다. 2월 26일, 앞뒤 두 부분이 연결된다. 선박의 제1기작업은 1957년 6월 10일에 끝이 난다.
제2기작업은 1957년 8월에 시작한다. 공장은 장강항운관리국에서 제공한 도면에 따라, 기계설비를 재설치한다. 이 공사는 재료공급이 늦어지는 등의 원인으로 1958년 11월에 완공된다.
1958년 11월 30일, 강아륜호는 완전히 수리를 마치고, 장강항운관리국에 교부된다.
1959년 2월 4일 오전, 새로 태어난 강아륜은 십육포항구에 나타난다. 선체를 온통 유백색으로 칠하고, 배에는 당시 사망자가족과 상해각계대표 400여명을 싣는다. 오전 9시정각, 기적소리와 함께 새로 태어난 강아륜은 시험항해를 시작한다. 2시간후, 여객선은 당시의 사고지점 횡사서남백룡항동쪽의 이동사 강위에 도착한다. 기적을 다시 한번 울리고, 애도를 한 후에 다시 골아온다. 이후 새로 태어난 강아륜호는 장강의 화물여객선이 되어, 상해와 무한의 항로를 오간다.
1966년 11월, 강아륜호는 '동방홍8호'로 개명한다. 1983년 동방홍8호는 퇴역한다. 그후 무한항구 월량만부두에 정박해서, 장륜무한공사 선박의 수상기지가 된다. 2000년 6월, 동방홍8호는 해체작업을 위하여 온주로 간다 그런데, 그해 7월 8일, 선박해체작업을 할 때, 선박내의 유류에 불이 튀어 화재가 나고, 선박은 완전히 불타버린다. 2001년 구정전에, '동방홍8호'의 잔해는 폭파된 후 고철로 팔려버린다. 강아륜호는 이제 나무키(木舵) 하나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 나무키는 현재 절동해사민속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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