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사회/중국의 사회

북경의 어느 폐품수집왕의 인생유전

중은우시 2008. 3. 10. 18:31

글: 유이화(劉怡華)

 

폐품을 모아서 '부자'가 된 사람들도 이미 적지 않다. 북경에서 주택을 사고, 작은 공장을 꾸린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업종의 특수성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다른 업종에 비하여 훨씬 복잡하다. 그중, '폐품수집왕'중에서 대표적인 인물이던 교보봉(喬保峰)의 성공타락사는 음미해볼만하다.

 

교보봉은 1970년에 태어났고, 1980년대중반에, 그는 초기의 폐품수집인으로 북경에 왔다. 그가 북경에 왔을 때는 15살이었고, 소년공이었다. 당시 농민들은 고향을 등지는 것을 싫어했다. 그는 집안경제환경이 급격히 악화되어 어쩔 수 없이 고향인 하남성 고시현을 떠나게 된다. 그보다 10여세 많던 형은 현지에서는 가장 먼저 돈을 번 사람이었다. 그는 작은 배를 하나 사서, 현지촌민들이 강을 건너게 해주었는데, 매일 적지않은 수입을 올렸다. 돈을 벌게 되자 간이 커졌다. 처음에는 1,2명을 싣다가, 나중에는 여러명을 싣게 되고, 나중에는 십여명씩 정원을 초과하여 실었다. 자그마한 배에 30여명이 타기도 하였다. 교 사장이 희희낙락하면서 현금을 마대자루에 담고 있을 때, 결국 사고가 터졌다. 초과인원으로 작은 배가 뒤집힌 것이다. 그리하여 한꺼번에 30여명이 사망했다. 이것은 하남성 뿐아니라 전국을 놀라게한 큰 사고였다. 현지의 신문은 이 내용을 크게 보도했고, 그의 형을 견리망의(見利忘義)의 소인으로 묘사했다. 교보봉은 이전에 없던 압박을 받았고,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교보봉의 이후 행위를 보면, 최소한 가난에 찌들었던 그의 집안은 돈을 벌기 위해서는 뭐든지 하지만, 최소한의 도덕교육도 받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15세의 교보봉은 둘째형을 따라 북경 창평으로 왔다. 당시 창평은 아직 현(縣)이었고, 경제는 도심에 비하여 많이 낙후되었다. 가난에 찌들었던 교씨형제는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들은 공사현장에서 모래를 고르는 일을 맡았다. 그들은 매일 수도없이 기계적으로 한가지 동작만을 반복했다. 수천번을 반복하면서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고, 바닥에까지 땀이 흘렀다. 비록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였지만, 그들 형제 둘은 만족해 했다. 그러나, 이런 일을 오래 지속할 수는 없었다. 그의 둘째형은 그에게, "우리 여기서 더 이상 배곯지 말자. 우선 배부터 채워야 뭐라도 할 거 아니냐. 나는 진황도로 가겠다. 거기에 아는 사람이 있으니, 거기서 자리잡으면 너를 데리러 오겠다" 둘째형이 떠난 후에, 교보봉의 주머니에는 겨우 며칠간 먹을 돈박에 없었다. 거의 절망적인 상태였다. 하루는 그가 봉두난발을 하고 어느 정부기관의 문앞을 지나가는데, 간부모양을 한 사람이 그를 불러세웠다: "어이, 쓰레기줍는 친구!" 그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왜냐하면 자기는 쓰레기줍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우리 사무실에 폐품이 적지 않으니, 네가 가져가라." 교보봉은 아주 난감해서, "저는 돈이 없는데요."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는 "됐다. 빨리 깨끗하게 처리해주면 된다" 교보봉은 마음 속으로,  "어떻게 이렇게 좋은 일이 있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건물안으로 들어가서, 아주 깔끔하게 각종 신문잡지, 폐품을 챙겨나와서 폐품수집소로 가서, 30여위안을 벌었다. 30여위안이면 1980년대의 정식직공의 반달치 월급이었다. 하늘에서 내려준 이 좋은 기회는 그에게 하나의 계시를 주었다: "폐품만 주워도 돈을 벌 수 있겠구나. 그리고 다른 직업보다 훨씬 많이 벌 수 있겠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 교보봉은 그의 주변환경을 살펴봤고, 그는 북경사람들이 체면을 중시해서 쓰레기를 잘 줍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외지인도 많이 않아서 이 업종은 경시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먼저 국유기업에 주목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폐품을 아무렇게나 버렸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시멘트공장에서는 수미터높이의 시멘트포대가 쌓여있었다. 그는 먼저 폐품수거소의 수거가격을 알아본 후에, 시멘트공장의 공장주임과 협의했다. 공장주임은 마침 시멘트포대를 처리하지 못해서 골치아파하고 있었으므로 시원스럽게 그에게 팔아주었다. 이번 거래 하나로 그는 200위안을 벌었다.

 

교보봉은 장삿머리가 잘 돌아갔다. 그는 이렇게 많은 시멘트포대를 가져가서 200위안밖에 못받는 것은 아깝다고 생각했다. 그는 더 높은 가격을 줄 수 있는 것을 찾았다. 그는 사방을 알아봐서, 산동의 폭죽을 만드는 곳을 알았다. 그는 기차를 타고 산동으로 가서 그들에게 시멘트포대를 우피지를 대신해서 쓸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협상끝에 그는 1만여위안을 벌 수 있었다.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러나, 교보봉은 교활했다. 그는 상업기밀의 중요성을 잘 알았다. 그는 자기가 북경창평에서 왔다고 말하지도 않았고, 시멘트공장의 이름을 말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하여 중간에서 차액을 많이 챙겼다. 교보봉은 최소한 북경창평지역에서 폐품수집을 처음 시작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교보봉은 사람들이 선망하던 "만원호(萬元戶)"가 되었다.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부지런히 일했다. 그는 여전히 폐품수거의 제일선에서 뛰었다. 스스로 삼륜자전거를 몰고, 각종 악취를 견뎌가며 폐품을 모아서 팔았다. 그의 다리는 자주 부어올랐고, 그는 수시로 피곤해서 아무데서나 앉으면 잠이 들었다. 그래도 부지런한 그는 6시이전에 잠이 깨지 않은 적은 없었다.

 

교보봉은 자기의 폐품수집사업에 진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폐품은 모두 그 한 사람이 모아서 팔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고향에서 사람들을 데려왔다. 그는 이들도 내용을 알면 그를 따라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들에게 적지 않은 규칙을 정했다. 그는 이익앞에서는 규칙도 무시된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리하여 운송차량을 하나 구매하고, 폐품을 보관할 수 있는 넓은 장소도 임차했으며, 규모와 효율을 살렸다. 아무도 그를 위협할 수 없게 한 것이다. 그의 "폐품수집왕"의 지위는 아무도 흔들 수 없을 정도였다. 교보봉과 함께 일해본 사람이라면 모두 느꼈다. 그는 인민폐 말고는 아무 것도 몰라보는 사람이다. 친척의 정이나 고향사람의 정도 돈앞에서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의 사업은 갈수록 커졌다. 폐품수거의 경영범위도 넓혀갔다. 그는 폐지, 비닐과 같은 싼물건으로는 큰 돈을 벌 수 없다고 보았다. 반드시 강철과 같은 폐품을 취급해야 했다. 그는 북경, 하북, 산동의 일부 강철공장과 연락했고, 적지 않은 수량의 폐강철을 공급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그는 주민의 집에서 고물구리나 낡은 철을 사모았을 뿐아니라, 맨홀두껑, 전선과 같은 훔친 것임에 분명한 것들도 취급했다. 교보봉은 도둑질한 물건도 돈만되면 상관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의 폐품수거소는 북경 최초의 장물취급거점이 되었다.

 

그 몇해동안, 교보봉은 며칠에 한번씩 은행에 돈을 예금했다. 18세가 되던해, 교보봉은 이미 백만위안의 부자가 되었다. 그의 명성은 널리 알려졌고, 일부 매체도 그에 대하여 보도하기 시작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북경의 창평에 하남의 농민이 폐품수집으로 큰 돈을 벌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돈을 벌어 기고만장해진 교보봉은 갈수록 교만해졌다. 그는 돈이 있으면 모든 게 다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창평이라는 곳의 폐품은 그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제력을 갖추게 되면, 가격을 마음대로 하고 시장을 독점하는 것은 여러 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추악한 현상이다. 창평의 적지 않은 사람은 다 알고 있다. 이곳에서 주운 폐품은 모두 교보봉에게 진공해야 한다. 그가 동의하지 않으면, 무력을 써서라도 해결한다. 폐품수집인원중에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다 모여 있다. 문화수준이 낮고, 자질이 떨어지며, 졸부가 된 후의 추태가 많이 드러난다. 나중에 교보봉은 절도와 중혼(重婚)으로 죄를 지었는데, 이 두가지 죄를 피했다고 하더라도, 결국 조폭조직으로 발전하는 것이 추세이고, 그랬다면 교보봉에게는 더 큰 징벌이 내렸을 것이다.

 

많은 폐품수집상들과 마찬가지로, 교보봉은 처음부터 도둑질과 함께 했다. 이 업종은 확실히 폐품수집상과 함께 가는 업종이다. 양자를 겸하지 않고서는 크게 성공하기 힘들다. 그는 17세 되던해 음주운전으로 구류 7일을 살고, 22세가 되던 해에 장물매매로 행정구류 14일을 살았다. 30세 되던 해에는 공무방해죄로 구류 4개월을 살고, 집행유예 6개월을 받았다. 교보봉은 십여세부터 작은 도둑질을 했고, 사장이 된 후에는 큰 도둑질을 했다. 교보봉은 창평구의 개인연강(煉鋼)공장을 구매해서, 원가를 아끼기 위하여, 전기를 훔치기 시작했다. 간이 갈수록 커져서 나중에는 거의 미치광이수준이 되었다. 그의 부하중에서 그에게 "이렇게 하다가 전력국에서 조사하면 큰 일입니다" 그러나, 교보봉은 "아이를 아끼면 늑대를 잡을 수 없다. 나는 이렇게 살아온 사람이다. 쓰레기나 줍던 어린아이가 지금은 천만부호가 되었는데, 내가 뭐 꺼리는 것이 있었다면, 지금까지도 가난뱅이였을 것이다" 이렇게 하였으니 관리당국의 주의를 끌게 마련이다. 창평구 전력국은 화북전력국, 북경전력국에 보고한 후, 교보봉에게 <<전기중단처벌통지서>> 및 <<선로개수통지서>>를 보냈다. 공장에 전력을 끊겠다는 통지서를 받은 후, 교보봉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부하들을 데리고 창평구 전력국의 국장사무실로 쳐들어갔다. 그는 국장의 눈앞에 손가락질을 하면서, "나한테 전기를 주지 않으면, 목숨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라고 소리쳤다. 창평전력국은 바로 공안국에 신고했고, 조사와 측정을 거쳐, 교보봉의 백부주조창의 선로에서 2002년초에서 2003년 상반기까지 국가의 900만와트전력손실을 안겼고, 인민폐로 400만위안에 상당하는 금액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실로 대담한 도둑이었다.

 

교보봉의 절도죄에 대하여, 북경시창평구인민검찰원의 비준을 거쳐, 북경시공안국 창평분국은 교보봉에 대한 구속결정을 내린다. 교보봉은 절도범뿐아니라, 중혼죄와 국가기관인장위조죄도 함께 걸렸다. 이 폐품수집왕은 1처2첩을 두었고, 그 사이에 4남2녀를 낳았던 것이다.

 

교보봉이 18세에 부자가 되자, 고향에서 그의 명성을 듣고 시집오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업에서 성공을 거두고 북경에서 살고 있는 젊은이이니 인기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먼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당이민(唐伊敏)과 결혼했다. 교보봉의 큰 형이 사고를 일으킨 후, 고향사람들이 그의 집안을 멸시했었는데 오직 당이민만이 그에게 동정과 호감을 표시했었던 것이다. 나중에 교보봉이 북경에서 곤란을 겪을 때, 당이민이 편지와 물건을 우송해주었다. 그녀는 교보봉의 비천함과 160여센티미터밖에 되지 않는 작은 키도 싫어하지 않았다. 동방화촉의 밤에 교보봉은 온갖 맹세를 다 하였다. 그러나, 이미 폐품수집대왕이 된 그의 마음은 예전같지 않았다. 먼저 여인들이 그에게 꼬리를 쳤다. 용모도 예쁘고 몸매도 좋은 마명미(馬明媚)라는 여자가 그의 능력과 경제력을 선망하여, 오가다가 결국 일이 생겼다. 그러나, 마명미는 숨은 애인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처의 지위를 요구했다. 법을 모르고 법을 두려워하지 않던 교보봉은 아무렇지도 않게 동의했다. 모르면 용감한 법이다. 그는 고향에서 가짜 증명서를 떼어와서, 두번째 혼인도 마쳐버린다. 그래도 두 여인은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잘 지냈다.

 

2년이 흐른 후, 교보봉은 또 마음이 동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문화수준이 앞의 두 여자보다 높은 고향출신 요소엽(姚小葉)이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이 여자도 가난하여, 자기의 신분지위는 불문하고, 그저 온 식구가 가난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좋다고 생각하였다. 그녀도 교보봉에게 결혼은 요구했다. "폐품왕"은 예전에 했던 방식대로 가짜증명서를 위조하여, 혼인신고를 마쳤다. 웃기는 것은 이번에 위조한 인감은 "하남성"을 "남성하"로 하였는데도 통과되었다는 것이다.

 

난감한 일은, 세 여인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는 점이다. 그도 자원을 분배하여, 세 여인에게 동일한 주택지에 세 개의 주택을 사고, 세 여인에게 각각 산타나, 혼다, 미쓰비시 자동차를 사주었다. 세 여인은 성공적으로 폐품왕을 위하여 후손을 낳아주었다; 첫번째 처인 당이민은 1남2녀를 낳았고, 두번째 처인 마명미는 2남을 낳았고, 세번째 처인 요소엽은 1남을 낳았다. 폐품왕은 그녀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그들에게 돈을 준비해주고, 4명이 앉아서 마작을 함께 하기도 했다. 돈은 따는 사람이 가지는 것으로 했고, 세 여인도 즐겁게 놀았다. 저녁이 되면, 그는 세 여인중 아무 집에나 가서 잤다. 교보봉을 아는 사람에 의하면, 만일 그에게 문제가 터지지 않았더라면, 사업을 더 크게 벌였을 것이고, 아마도 고대의 황제처럼 삼궁육원을 두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감옥에 들어갔지만, 자기의 여자들을 얘기하면서 그는 눈한번 깜박하지 않았다: "마누라가 뭐냐. 돈으로 사는 옷 몇 벌같은 거 아니냐. 돈있으면 예쁜 걸로 사면 되고, 돈없으면 못생긴 것으로 사면 된다"

 

이 근면하고, 총명하며, 우매하고, 교활하고, 이기적인 풍운인물은 절도, 중혼, 국가기관인장위조죄로 유기징역 18년형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