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천계굴릉(天啓掘陵): 명나라황실에 의한 대청용맥(大淸龍脈) 파괴사건

중은우시 2007. 3. 25. 15:13

글: 예방육(倪方六)

 

도굴은 도적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해이다. 중국의 도굴역사를 살펴보면, 대규모의 도굴은 대다수가 "관방행위(官方行爲)"였다. 일부는 심지어 황제 자신이 기획한 경우가 있었다. 명나라 말기 천계제(天啓帝)때 바로 이와같이 영향이 큰 황제릉도굴사건이 벌어졌다. 주원장의 자손이면서, 명나라의 끝에서 두번째 황제인 명희종(明熹宗) 주유교(朱由校) 즉, 천계제는 여진족의 왕기(王氣)를 끊고, 대청용맥을 절단할 필요에 따라, 북경 서남쪽 대방산(大房山)의 구룡산(九龍山) 부근에 있던 금나라 제왕릉을 모두 파괴해 버렸다.

 

금(金)나라는 비록 중국을 통일한 왕조는 아니었지만, 중국역사상의 지위는 가볍지 않다. 금나라가 중원사람들에게 조성한 재난과 마찬가지로 가볍게 평가될 수 없는 것이다. 금나라는 1115년에 탄생했고, 이해에 아구타(完顔阿骨打)는 회녕(會寧, 현재의 흑룡강성 아성)에서 황제에 올랐고, 역사상 금태조(金太祖)라 불리운다. 금나라는 군사력이 강성했고, 나중에 중원으로 치고 들어와서 조광윤이 개국한 북송을 멸망시키고, 나중에 천하통일을 시도하나 완성하지는 못하고, 남송과 대치하며, 중국을 남북으로 나누어 통치한다. 1234년이 되어 몽고와 남송의 연합공격하에 금나라는 비로소 멸망한다.

 

금나라는 모두 9명의 황제가 있었고, 120년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절반을 통치하였던 "백년왕조"는 그들이 만든 제왕릉은 중국고대황실 능침중에서 아주 휘황한 한페이지를 장식한다. 특히 능침의 풍수격국은 가장 전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주원장이 남경의 효릉을 만들기 전에, 일찌기 지모(智謀)화상, 나중에 연왕 주체의 찬위를 기획하게 되는 요광효등을 보내어 금나라 황제릉을 연구하게 한다. 명나라 직전의 원나라는 "비장제(秘葬制)"를 택하였으므로 참고할만한 황제릉이 없었다. 그래서 금나라때의 황제릉은 아주 좋은 모범이 된 것이다.

 

금나라의 황제릉은 북경의 서남쪽 대방산계통의 운봉산(雲峰山)에 있었다. 이름이 있는 능침이 모두 17개이다. 이 산은 아홉줄기의 산줄기가 용처럼 뻗어있다고 하여 구룡산이라고 불렀다. 금나라의 제왕릉은 원래 흑룡강가로 정해져 있었는데, 해릉왕 완안량(完顔亮)이 천리길을 멀다않고 이장시킨 것이다. 이것은 중국역사상 규모가 가장 컸던 황제릉의 "이장활동"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해릉왕이 구룡산 일대에서 사냥을 하다가, 산아래의 대홍곡에서 사슴을 한 마리 발견한다. 사슴을 쫓아갔으나 보이지는 않고, 눈앞에 황금빛이 찬란한 사묘(寺廟)가 나타났다. 해릉왕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사원을 들어갔는데, 기괴한 일막이 또 나타났다. 황홀한 가운데 해릉왕은 금태조, 금태종등 몇몇 돌아가신 선조들이 향안에 앉아계신 것을 보았다. 나중에 이 절은 용성사(龍城寺)라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마침 구룡산의 중봉인 용두(龍頭)에 놓여 있었다.

 

 

[구룡산자락]

 

해릉왕은 놀라는 와중에 조상들의 영혼이 나타난 것이고, 금나라의 도성을 아성에서 연경으로 이전하라는 계시이며, 중원을 차지할 수 있는 좋은 징조라고 생각했다. 이리하여, 멀리 흑룡강에 있던 조상의 능을 1155년, 도성을 옮기면서 함께 연경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중심릉의 위치를 바로 조상의 영혼이 나타났던 구룡산 용성사에 두었다. <<대금국지교증>> <<금호도경.산릉>>등의 사서의 기재에 따르면, 금나라 황제릉의 선택은 이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오랑캐들이 상경을 수도로 정하였는데, 원래 산릉은 없었다. 조종이래로 호국림의 동쪽에 장사지냈으며, 그 의제는 아주 간단했다. 완안량이 연경으로 천도하고나서 능을 둘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풍수사들로 하여금 연산의 사방을 둘러보게 하였다"  해릉왕은 정원 원년(1153년)에 연경으로 천도하고, 풍수사들에게 1년여를 찾게 한 후에야 용성사가 소재한 이 풍수승지를 발견했다. 해릉왕이 금태조가 향안위에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는 말은 후세인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이다.

 

소위 풍수설에서 보면, 아주 좋은 풍수승지는 앞에 적어도 두 개의 "산"이 있어야 한다. 즉, "조산(朝山)"과 "안산(案山)"이다. 좌우에는 반드시 "호사(護砂)"가 나타나야 한다. 소위 "조산"이라는 것은 바로 조정신하들이 서 있는 곳이다. "안산"이라는 것은 홍제가 일하는 책상이 소재하는 곳이다. 위치상으로 보면, "안"이 가깝고 "조"는 멀다. 구룡산의 아홉마리 용은 높낮이가 다르고, 순서대로 내려와 있다. 중봉의 바로 앞에는 높은 산벽이 있고, 가까운 곳에는 중간에 약간 낮고 양쪽이 불룩 솟은 언덕이 있다. 동쪽으로는 끊이지 않는 산봉우리가 있고, 서쪽으로도 몇개의 작은 산이 있다. 당시 주봉의 아래에는 샘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일년내내 끊이지 않았다. 숲도 가득차서 자기가 서려 있었다. 구산룡의 지형은 바로 풍수들이 말하는 것과 들어맞았다. 멀리 높이 솟은 산벽은 "조산"이고,가까운 곳에 낮은 언덕은 바로 "안산"이다. 좌우에 이어진 산과 언덕은 바로 "호사", 즉 "좌청룡"과 "우백호"이다. 그래서 과거의 풍수선생들은 금나라 황제의 릉이 있는 구룡산은 풍수승지중의 전형적인 곳이라고 생각했고, 300년후에 여진족들에게 운세가 돌아가서 번성하고 발전할 수 있었다고 본다.

 

용성사가 소재한 위치가 바로 "용머리"였으므로, 해릉왕은 절을 철거하고, 개국황제인 금태조 완안 아구타의 예릉(睿陵)과 금태종 완안성의 화릉(和陵, 나중에 공릉으로 개칭함)을 이곳에 세운다. 흙을 판 후에 해릉왕은 친히 공사를 감독하고, 일꾼들에게 밤낮으로 산을 파게 한다. 적지 않은 일꾼들은 해릉왕에게 채찍을 맞아가며 일했다. 삼개월 후 예릉, 화릉의 두개의 능이 먼저 완공되었다. 이후 금맨종 왕안단의 사릉(思陵), 금세종 완안옹의 흥릉(興陵)등 20여개의 이름이 있거나 없는 제왕릉이 계속 건립되었으며, 황제능원이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해릉왕 자신은 죽은 후에 이 풍수승지에 묻히지 못하여, 풍수미몽을 누릴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해릉왕 완안량은 중국역사상 광포하고 호전적이기로 유명한 황음호색의 군주였다. 그의 부친인 완안종간은 금태조의 서자였다. 태조가 죽은 후, 동생인 완안성에게 황제위를 물려주었으니, 그가 금태종이다. 금태종이 죽은 후, 황제위는 조카이자, 금태조의 적손인 완안단에게 넘겨주니, 그가 바로 금민종(나중에 희종으로 개칭함)이다. 완안단의 부친은 어려서 죽었으므로, 여진의 풍습에 따라, 모친은 다시 숙부인 완안량의 부친 완안종간에게 시집갔다. 이러한 '형제'관계로 인하여, 완안량과 완안단은 함께 자랐다. 그래서, 완안단이 황제가 된 후에, 완안량은 자신도 황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역모의 마음을 품었고, 계속하여 아리출호(阿里出虎)와 같은 심복을 심었다. 천회9년(1149년) 12월, 아리출호는 궁중에서 당직을 맡고 있었는데, 완안량은 몰래 궁중으로 잠입해 들어가서 금민종을 처치하고자 하였다. 아리출호등이 완안단을 내리쳤으나, 죽지 않았는데, 완안량이 도착항 친히 아직 죽지 않은 완안단을 죽여버리고, 순조롭게 황제위를 차지한다. 역사상 그를 해릉왕이라고 칭한다. 황제가 된 후, 야심이 컸던 해릉왕은 먼저 연경으로 천도하고, 나중에 변경으로 천도하여, 전 중국을 차지하고자 하였다.

 

정치적 업적으로 보면, 해릉왕은 대단한 황제이다. 금나라는 여진족이 건립한 정권이고, 당시는 아직 노예사회였다. 해릉왕은 중원지구의 선진적이고 성숙한 봉건제도를 좋게 보았고, 정치개혁을 실시했다. 해릉왕이 없었다면 금나라는 나중에 중원을 웅패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일찌감치 남송왕조에 의하여 멸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대에 황제위를 찬탈했던 황제들과 마찬가지로, 해릉왕의 결점도 그의 장점만큼 컸다는 것이다. 사람을 죽이기 좋아하는 습성이 그랬다. 황제가 된지 얼마되지 않아, 그와 의견이 맞지 않거나, 그에 반대하는 황실종실 100여명을 죽여버린다. 비록 정치개혁은 추진했지만, 후환도 같이 심어졌다.

 

금나라의 명장 금올술(金兀術)과 마찬가지로, 해릉왕도 남송정권의 오랜 적수였다. 그는 18세에 "봉국상장군"에 오른 후, 부친 종간은 그를 금나라 총사령관인 금올술의 수하로 보냈다. 그리하여 아들을 단련시키고자 한 것이다. 뛰어난 전적을 바탕으로 해릉왕은 표기상장군, 용호위상장군에 오른다. 그러나, 해릉왕은 아주 호색했다. 그래서 천하여색을 모두 차지한다는 악명도 남겼다. 한번은 그의 숙모를 보고 반해서 숙부를 죽이고, 숙모를 비로 삼기도 했다. 그래서, <<금사>>에는 "해릉왕은 군주가 되고자 그 군주를 죽였고, 나라를 차지하고자 그 모친을 죽였으며, 다른 사람의 처를 차지하고자 그 남편을 죽였으니, 삼강이 모두 무너졌으니, 그를 일컬어 무슨 인륜을 얘기하겠는가. 종족을 멸살하고 충신과 양신응 죽여버리고, 부구자매를 모두 비빈으로 삼았으며, 32총관의 병사로 천하를 도모하다가, 마침내 죽었고나니 천하의 후세인들이 무도한 군주는 해릉을 가장 먼저 꼽았다"고 평가하고 있다. 정륭6년(1161년), 해릉왕은 남송과 전투에서 패배한 후 도망치던 중에 자기의 부하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의 나이 39세때이며, 겨우 8년간 황제위에 있었다. 해릉왕의 시신을 운구해온후, 처음에는 구룡산의 금황제능지역에 묻었다. 나중에 금세종 왕안옹이 즉위한 후, 금나라도성도 변경에서 북경으로 옮긴다. 그리고 조서를 반포하여, 해릉왕을 서인으로 폐하고, 그의 능묘를 파내어 훼손하며, 그의 유해는 다시 금황제릉으로부터 100여리 떨어진 황야에 개장한다.

 

천흥3년(1234년) 정월, 송나라와 몽고의 두 부대가 하나는 남쪽에서 하나는 북쪽에서 금나라를 협공한다. 금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애종 완안수서는 막 황제에 올랐었다. 백관들의 하례의식도 막 끝났다. 보좌에 앉아서 자리가 따뜻해지기도 전에 경성이 공격을 받아 함락되었고, 완안수서는 어쩔 수 없이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이로써 금나라는 멸망했다. 그러나, 애종의 이 죽음은 비애를 보여준다. 금나라의 황제릉이 크게 훼손당하는 것이다. 처음에 몽고인들은 금나라를 적국으로 보아, 북경에 들어온 후, 보복목적에서, 금나라 제왕릉을 도굴하고 훼손시켰다. 그러나, 중국통일을 완성한 후에는 금나라를 한 집안으로 보아, 금나라 제왕릉에 대하여 다시 정리하고 제대로 매년 제사도 지내주었다. 그리하여 금나라 제왕릉은 일찌기 원나라때 유명한 경서팔경(京西八景)의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금나라가 망한지 388년후, 하나의 황조를 사이에 두고, 주유교가 황제가 된 명나라 천계2년(1622년_에 금나라제왕릉은 "왕기를 뽑아내고 용맥을 자른다"는 것으로 인하여, 대재난을 맞이한다. 역사서에서 말하는 "천계굴릉"이다.

 

당시, 여진족의 후예인 누르하치는 이미 여진의 건주각부를 통일하였다. 그리고, 명나라 만력44년에 동북에서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금(金)"(역사상 후금이라고 하고, 청나라의 전신임)이라 하였다. 처음에 이 국호를 쓴 뜻은 분명했다. 즉, 이전에 여진족이 건립했던 '금'나라를 다시 세우겠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요양을 도성으로 삼았는데, 이미 명나라에게는 하나의 위협이었다. 명나라는 환관 위충현이 조정을 좌지우지하였고, 부패가 극심했으며, 사회는 어지러웠고, 농민반란이 도처에서 일어났으며, 정권이 흔들렸다. 주유교는 후금이 일어난 것은 300여년전에 입장된 경서의 금황제릉의 왕기가 너무 성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믿었다. 그리하여, 여진족의 용운(龍運)이 아직 끊이지 않았다는 것을 믿어, 풍수를 파괴하고 용맥을 자르며, 왕기를 없애는 '묘계'를 받아들었다.

 

속설에는 이 '묘계'는 바로 누르하치의 조상묘를 파헤치는 것이었다고 한다. 주유교는 두번에 걸처 사람을 보내어 구룡산의 능을 파괴하였다. 지상에서부터 지하까지, 안에서부터 바깥까지, 금나라 황제릉은 모두 파헤쳐지고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지상의 모든 건축물을 부순 후에, 다시 각 황릉의 지궁을 파헤쳤고, 땅바닥에 흩어진 석주, 난간같은 건축부자재와 굴러다니는 돌맹이로 막아버렸다. 이리하여 여진의 왕기를 철저히 단절시키려 한 것이며, 풍수사가 시키는데로, 금태조 예종능이 있던 "용두"에 있는 흙을 파헤쳐서 용머리를 자르고, 용머리 아래에 있는 '목'부위에도 큰 구멍을 파놓았다.

 

이것만으로도 부족할 것이 두려워, 더욱 철저하게 하기 위하여 각 황제릉이 있던 곳에 여러개의 관제묘를 만들어 여진의 왕기를 진압하려 했다. 그리고, 특히 예릉의 유지에는 "고탑(皋塔)을 만들어 세웠다. 그 이유는 당시 악비와 함께 금나라에 대항했던 남송의 명장 우고(牛)를 불러내서 '관우'와 함께 대명왕조로 하여금 금나라에 대항하도록 해달라는 것이덨다. 그렇다면 하필 우고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전설에 전해내려오는 "금올술을 화나서 죽게하고, 우고를 웃다가 죽게하였다"는 이야기때문이고, 그것이 바로 이곳에서 발생했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당시 건립한 묘, 탑의 유적은 아직도 남아 있다. "천계굴릉"의 이야기는 바로 이 곳에서 일어났으므로, 후세의 고고발굴자들에게는 큰 골치덩이를 남겨주었다. 요즘들어 북경의 현지 고고학자들은 대방산 일대에 대하여 고고학적 고찰을 하였고, 2003년에는 금태조 예를의 유적지를 찾아내었고, 그 해의 최대 고고학적 성과가 되었다. 현재 금나라 제왕릉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그러나, 금나라의 황제릉은 주유교에 의하여 파괴되었지만, 대청의 "용맥"은 단절되지 않은 듯싶다. 오히려 주씨성의 천자들은 운이 다하여, 자기 자신의 왕기만 소진시켜버렸다. 천총10년(1636년) '후금'은 '대청'으로 국호를 고치면서 더욱 강해졌다. 1644년 청나라 정권은 마침내 주원장이 개국한 대명왕조를 멸망시키고, 268년후인 1911년이 되어서야 비로서 청나라의 '용맥'은 단절되었다. 중화민국에 의하여 대체되면서 중국의 길고길었던 봉건사회는 끝이 났다.

 

말이 나온 김에 몇마디 더 하자면, 금나라 제왕릉이 주원장의 자손에 의하여 도굴된 사건에 대하여는 나중에 여러가지 견강부회적인 견해가 나오고 있다. 즉, 이것은 인과응보라는 것이다. 옛날 금나라의 대장군 점한이 북송의 도성 동경을 점령한 후, 가짜황제 유예는 지금의 하남성 공의시에 있는 북송황제릉에 대하여 미친듯이 도굴활동을 하고, 태조 조광윤의 영창릉, 태종 조광의의 영희릉, 진종 조항의 영정릉등 8개의 능이 하나도 화를 면하지 못했고 하나하나 모두 파괴되었었다. 주유교의 행위보다 더욱 야만적이었던 것은 그들은 북송의 황제, 제후, 배장신하의 시신을 능에서 끄집어내어, '폭해(暴骸)'하여, 시신을 욕보였다. 인과응보라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에서인지, 후세사람들에 의하여 "천계굴릉"이 심하게 비난받지는 않아왔고, 황제릉도굴에 대하여 글쓰는 사람도 이 일은 언급하지를 않는 경우가 많다.

 

지금 생각해보면, 주원장의 후손들은 정말 우습다. 자기의 정권에 문제가 생겼는데, 풍수를 의심한 것이다. 그런데, 더욱 우스운 일은 이런 '왕기를 절단하는' 황당한 짓거리가 나중에 장개석에 의해서도 발생하였다는 점이다. 해방전쟁기간동안 장개석은 모택동이 이끄는 중공정권이 계속 승리하고, 신중국이 곧 탄생하려하자, 장개석은 모택동의 조상묘가 진룡천자의 풍수승지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당시 '소제갈' 백숭희에게 명하여, 호남의 소산에서 모씨집안의 조상묘를 파헤치게 한 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