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劉基 1311-1375). 자는 백온(伯溫).
현재 많은 책에서는 그를 지혜가 탁월하고, 일을 예측하는 것이 신과 같으며, 문도무략이 뛰어나며, 주요한 전투마다 계책을 내고, 묘책을 기획하여 주원장을 도와 천하를 통일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군정, 재무등 각 방면에서 명나라의 제도를 완비하였고, 명초의 성세를 이룩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전조군사제갈량, 후조군사유백온(前朝軍師諸葛亮 後朝軍師劉伯溫)", "전 500년을 알았고, 후 500년도 알았다"는 등의 말들이 전해진다.
그렇다면, 역사상의 진실한 유백온은 과연 이처럼 위대할까? 작가인 동평이 최근에 쓴 글에 읳면 그는 걸출한 군사재능을 가진 지략가도 아니고, 성공한 대정치가도 아니었으며, 심지어 고결한 은사도 아니고, 그는 그저 관직에 연연한 유생일 뿐이었다고 한다.
유백온을 언급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는 풍채가 뛰어났고, 성격이 강직하였으며, 포부가 남달랐고, 주원장이 한번 보자 매우 기뻐하여 유기를 군사로 삼았다. 주원장이 원을 무너뜨리고 여러 군웅을 제압하고, 천하를 통일하는데 기여한 유기의 공은 한나라초의 장량보다 적지 않다"는 말이 있는데, 유백온은 정말 천재적인 군사(軍師)였는가?
유백온이 군사에 관해서 썼다는 책이 두 권이 있다. 하나는 <<백전기략(百戰奇略)>>이고, 다른 하나가 <<시무십팔책(時務十八策)>>이다. 그러나, 이 두 권의 책은 역사상 어디에도 인용된 바가 없고, 심지어 구체적인 내용도 거의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런 두 권의 책이 무슨 큰 가치가 있는지 알 수 없다.
유백온이 군대를 따라다닌 기록은 두 가지가 있는데, 일부분은 원나라때 관청에서 군사참모를 지내면서 농민반란을 제압한 것이고, 일부분은 농민반란군의 주원장에게 몸을 의탁한 후의 농민군의 참모를 지낸 것이다. 원나라 관부에서 3,4년간의 군경력이 있는데, 이 때 그다지 뛰어난 군사적인 재능을 보였다는 기록은 없다.
1360년부터 1363년 9월까지 그는 주원장의 종군참모를 지냈다. 이 기간중 반년 정도는 고항에 돌아가서 부모상을 치렀다. 실제로 군대를 따라다닌 기간은 억지로 잡더라도 2년정도이다. 게다가 주원장의 여러 참모중의 한 명이었고, 심지어 아무런 관직도 받지 못한 보통 참모의 하나였다. 1363년 9월 주원장이 다시 출정할 때는 이미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이때는 아직 주원장이 천하를 다 얻지 못한 때였다. 이 점에서 볼 때 유백온이라는 군사참모는 주원장의 입장에서 볼 때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진우량을 먼저 치고, 그 후에 장사성을 치라는 것이 유백온이 세운 "천하를 평정하는 대계"였다는 말이 있다. 일부 서적에서 주원장이 먼저 진우량을 치고 나중에 장사성을 치도록 하는 계책을 세운 것이 유백온이라고 적고 있다. 심지어 이 계책을 제갈량의 융중대와 비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순전히 견강부회이고 역사적 사실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이 전쟁은 개략 1363년에 발생했고, 유백온은 1360년초에 주원장의 수하가 되어 군사참모가 된지 이미 3년이 지난 때였다. 그러나, 주원장은 진유량이 배를 몰고 쳐들어 올 때서야 비로소 급히 전선을 만들고 응전하였는데, 어디 먼저 진우량을 치는 천하평정대계를 세웠다는 말인가. 더우기, 이 전투에서 주원장은 적군에 포위되어, 부하장수인 한성이 주원장과 옷을 바꿔입고, 주원장이 물에 떨어져 자살하는 것처럼 꾸며서 속이지 않았더라면 그는 하마터면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을 뻔도 했다. 만일 유백온이 뛰어난 군사라면 어찌 이처럼 주군을 위험에 빠뜨리도록 하겠는가.
이 전투의 승리로 주원장이 천하를 얻는 국면은 형성이 된다. 만일 유백온이 이 전쟁의 주요공신이었다면, 주원장이 공신들을 봉할 때 그를 생각하지 않았을리 없다. 그러나, 주원장이 1370년에 공신들을 봉할 때 명단중에 유백온의 이름은 아예 들어있지도 않다. 다 끝나고 20일이 지난 후에 두 명의 삼등백(三等伯)을 추가로 봉하는데, 그중 맨 마지막이 바로 유백온이다.
동평은 주원장이 유백온을 마지막으로 봉한 것은 그의 군사적인 공헌때문이 아니라, 더많은 것은 그가 등극을 준비하고, 남경성을 건설하고, 어사령을 담당하며, <<대명률>>을 만들고, 과거를 회복하는 등의 건국측면에서의 공헌을 참작한 것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원나라의 관리였고, 이미 그를 따른지 10년이 되었으며 나이고 60이 넘었으므로 상징적으로 작위를 하나 내린 것이라고 본다.
유백온은 한나라때의 장량처럼 일을 성사시키자 은퇴하여 은사가 되었다는 견해는 성립될 수 있는가? 이 부분도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고 있는 부분이다. 특히 명청양대의 유가사상을 존중하던 문인들은 고의로 유백온에게 장량의 옷을 입혀 공을 이루자 떠난 은사로 묘사한다. 이것이 맞는가?
유백온의 관직은 여러번 사직하였으나, 또 여러번 사직한 후 좋아하지 않았던 행적을 보면, 그는 매번 사직할 때마다 은사가 되겠다는 의도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백온의 첫번째 사직은 1340년이다. 원나라에서 4,5년정도 부현장을 한 후에 관직이 너무 낮다고 생각하고, 승진할 기회가 없다고 보았으며, 게다가 동료들과의 관계도 좋지 않아 사직했다. 1349년에 두번째 사직은 그가 보고계통을 어기고 직보한 것으로 인하여 질책을 받아 사직한 것이었다. 비록 두번의 사직경력이 있으나 1352년 친구의 추천으로 "평난"의 관직을 내리자 그는 아무런 망설임없이 관직을 받는다. 유백온이 원나라에서 마지막으로 1358년에 사직하는데 그것은 5품까지 올랐다가 다시 7품으로 강등당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에게 군사에 참여할 자격을 박탈한 것이고, 이에 화를 참지못하고 사직한 것이다. 다행히 그는 원나라에서 사직했기 때문에 마침 주원장에게 발탁될 수 있었다.
유백온은 원나라에서 25년간 지방관리를 지냈고, 주원장의 아래에서 10년간 중앙관리를 지냈다. 비록 유백온도 주원장의 개국공신의 하나이기는 하지만, 그는 그저 상징적이고 보충적으로 말석을 차지한데 불과했다. 이것은 관직욕심이 컸던 유백온에게는 아마도 못마땅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실망감과 그의 나이가 이미 60이 넘었다는 것으로 인하여 앞으로 더 이상 승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보고 사직이라는 초식을 한번 시험해 보았고, 주원장이 그를 만류하는지 아닌지를 보고자 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주원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를 집으로 가라고 허락해버렸다.
유백온이 죽은지 139년이 지난후에 명나라 조정은 왜 그를 신격화하였는가?
1514년은 유백온이 죽은지 139년이 지난 후이다. 명나라 조정은 갑자기 유백온에게 태사(太師)의 직위를 내린다. 시호는 문성(文成)으로 한다. 그리고 그가 "강개하고 뜻이 있었으며, 강인하고 계책을 많이 냈고, 학문은 황제의 스승이 되었고, 재주는 황제의 보좌인이 되었다" "도강책사무쌍, 개국문신제일(渡江策士無雙, 開國文臣第一)"이라고 칭송했다. 명나라 황제는 왜 유백온이 죽은지 139년이 지난 다음에 갑자기 그에게 이런 직위와 명예를 추존한 것일까?
그후 가정10년(1531년)에는 유기의 동향인 형부랑중 이유가 명세종 주후총에게 상소를 올려"유백온을 중산왕 서달과 마찬가지로 작위를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대신들이 이에 찬동한다. "태조가 여러 현명한 신하들을 모으는데 공을 세웠고, 계책을 세우고 중원을 얻는데 유기의 도움이 컸다. 그래서 당초 태조께서 천하를 얻기 전에 유기를 자기의 장량이라고 말한 바 있고, 나중에 유기에게 작위를 내리면서 제갈량에 비유한 바 있다. 유기는 당연히 태묘에 배향되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유기는 개국장군 서달과 같이 거론되는 수준으로까지 올라가고. 이것이 신격화의 시작이었다.
아마도 다음과 같은 몇가지 이유에서 일 것으로 생각한다.
첫째, 주원장을 따르던 개국공신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은 주원장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래서 유백온에게 차례가 돌아온 것이다. 역사학자들의 통계에 의하면 1370년에 공신에 봉해진 37인중에서 주원장의 사망전에 부친이나 으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충군(充軍)당하거나, 작위가 박탈된 사람이 31인이다. 여기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죽인 사람은 포함하지 않은 것이다. 이 사람들은 모두 주원장이 나쁜 사람으로 규정한 것이므로, 주원장은 신격화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 사람들을 다시 끌어올릴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원래는 40위권밖에 있던 유백온이 일약 개국문신제일의 지위를 차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둘째, 유백온은 주원장의 수하에서 태사령(太史令)을 담당했는데, 이 관직은 역서를 편집하는 것이외에 천문을 관찰하고, 문서, 명령을 기초하고, 사서를 기록하고 사서, 국가전적, 제사등을 편집하는 일을 맡는다. 유백온의 예언에 따라 주원장이 진명천자가 되었다고 하기가 쉬웠다.
셋째, 유백온은 많은 글을 썼었다. 이것은 문인들중에 선전하기 좋은 점이었다.
넷째, 유백온은 주원장의 개국공신중 학력이 가장 높았다. 원나라때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를 지냈다. 원나라때 진사를 지낸 지식인이 주원장의 스승이 된다는 것은 주원장의 체면을 살리는 일이기도 했다. 긜고 주원장보다 유백온이 나이가 20세정도 많았다.
다섯재, 유백온은 문인이면서 군대를 따라다닌 경험이 있었다. 신격화하여 문무에 고루 능한 사람으로 만들기 좋은 배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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