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전)

오덕(吳德) : 모택동 말년의 4 총신(寵臣)

중은우시 2006. 12. 18. 20:31

 

 

오덕은 노동운동으로 일어선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계속하여 백구(白區)에서 생활했다. 동시에 그는 진찰기(晋察冀) 사람이어서 이중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주요한 것은 그는 사람됨이 멍청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상급자들은 그에 대하여 방비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덕은 충성심이 강한 사람이다. 일단 명령을 받으면 일체를 돌보지 않고 집행한다. 그래서 모택동의 신임을 받았다.

 

오덕은 도시에서 업무한 경험이 있고, 그래서 그는 팽진, 유인등과 함께 행동했다. 평원성에 가서 일을 , 유소기가 그를 친히 찍어서 보냈다. 그리하여 그는 유소기의 일당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그가 길림성 1서기를 맡은 후에 그랬다. 그러나, 1966 팽진, 유인이 타도된 이후에는 모택동이 오덕에게 북경시 2서기 시장을 맡겼다. 이것은 사람들의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사실, 모택동의 용인원칙을 알면 바로 있듯이, 모택동은 계속하여 외부에서 그가 한가지 유형의 사람들만 쓴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애썼다. 특히 문혁초기에는 그는 더더구나 사람들이 그의 권력욕에 의하여 문혁을 일으켰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했고, 그래서 중간적인 인물을 많이 등용했다. 예를 들면, 이설봉, 오덕, 기등규, 진석련등이 그런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을 사용하는 중요한 원칙의 하나는 충실하게 그의 지시를 이행할 있느냐는 점이었다. 일단 그들이 시키는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면 즉시 파면했다. 예를 들면, 9 2중전회에서의 이설봉이 그런 예이다.

 

오덕은 북경시위에 들어온 , 강청이 그와 얘기한 적이 있다. 그의 업적을 언급한 , 정중하게 그의 착오가 상당히 엄중하다는 점도 지적하였다. 오덕은 진찰기의 우두머리중의 하나이고, 계속하여 팽진등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주석 비록 오덕을 다시 쓰기는 했지만, 혁명의 소장들을 그에 대하여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 강청의 오덕에 대한 이런 말은 이후 10여년간의 정치생활과 정치적인 방향을 정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작용을 하였다. 오덕은 그의 모택동에 대한 무한한 충성심을 표시하고, 좌로 방향을 급선회하였다. 특히 유인의 죽음에 대하여 오덕은 벗을 없는 책임을 지고 있다. 유인에게 오랫동안 수갑을 채우게 것도 오덕의 결정이다. 이후 오덕은 소위 북경시위를 청소하는 과정에서 매우 뛰어난 활약을 했다. 그리고 그는 이설봉을 빼고 직접 강청등에게 북경시의 현황을 보고했다. 이로써 자신의 개조후의 북경시혁명위원회 부주임의 지위를 유지할 있었다.

 

오덕의 일생에서 유일하게 멍청하지 않은 일을 것은 모택동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1970 3 여산회의후, 모택동은 임표집단에 대하여 조치에 착수한다. , 오덕은 자기의 생각을 발표한다. 오덕은 “이 노선투쟁은 유소기의 때와는 다르다. 이번은 군대쪽이다. 그리고 처리가 적시에 제대로 되지 않으면, 인민군대내부에 이반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반드시 주석이 친히 모습을 나타내어야 하며, 위대한 영수 모주석 지휘하에 많은 사람들이 깨달을 있도록 해야 한다당시 모택동은 확실히 군대내부에 대대적인 수술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계속 지방업무를 해왔던 오덕이 모택동의 내심의 의도를 제대로 읽은 것이다. 이것은 모택동이 그를 괄목상대하게 하였다. 9.13사건후, 모택동은 오덕의 의견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였다.

 

과연 한마디로 사람을 놀라게 것이었다. 오덕은 이후 10차전당대회에서 중궁중앙 정치국위원이 되고, 사부치가 맡았던 북경시의 1인자 북경위수구, 북경군구의 1인자의 지위를 차지한다. 명실상무한 직예총독 것이다. 이후 오덕은 주덕의 후계자가 되어, 왕홍문이 오랫동안 탐내오던 인대중공당조서기의 지위를 차지한다. 이로써볼 , 이번 한번의 멍청하지 않은 행동이 오덕에게 무한한 덕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을 있다. 오덕에 관련된 사건은 1973 11월의 주은래총리방조사건 1976 4월의 “4.5사건이다. 1973 11, 모택동의 수권을 받아, 기등규, 강청, 장춘교, 오덕, 진석련, 요문원, 이덕생, 소진화, 이선념등은 소위 중앙에서 총리의 착오를 인식하도록 방조하는 소조를 만든다. 오덕은 소조가 성립된 3개월동안 열심히 업무를 한다. 북경시의 문제로 여러 차례 주은래 총리를 곤란하게 만들고, 주은래를 당내의 주공(周公)”이며, 공자노자의 극기복례 꽤하는 인물이라고 비난한다. 가장 주요한 것은 그가 동시에 창끝을 같은 소조의 구성원인 이선념에게 향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중에 오덕은 강청등에 의하여 대상과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강청의 직접적인 질책을 받았는데, 이것은 오덕으로 하여금 사인방에 대하여 반감을 갖게 원인이 된다.

 

1976년의 4.5사건에서 오덕은 북경시민에 의하여 무덕(無德)”하다고 지목받는다. 그는 모택동등의 의도를 받들어 군중을 체포하고, 많은 잘못된 사건들을 양산한다. 이로써 나중에 오덕을 비판하는 회의에 열석했던 북경시위 1서기 임호가는 오덕 동지가 범한 중대한 잘못은 한권으로 있을 정도이고, 많은 간부군중은 오덕 동지에 대하여 많은 반감을 지니고 있다. 그가 혁명운동을 진압한 행위는 북양군벌, 국민당 반동파들이 걸은 길과 같다고 본다. 그와 같은 사람이 수도의 지도자의 지위에 계속 있었던 것은 사실 사인방이 자리를 계속 차지하고 있던 것과 동일한 효과를 냈다 말한다.

 

오덕은 스스로 그가 사인방의 눈에 심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화국봉과 사인방이 분쟁이 생기자, 그는 아무런 미련없이 화국봉의 편에 서서, 사인방 체포를 열렬히 지지한다. 그리고 전체 행동에서 그는 오충과 함께 매우 노력하여 힘을 쏟는다. 이것은 아마도 나중에 사람들이 그에게 점수를 주는 이유일 것이다. 사인방이 체포된 , 오덕은 다시는 총명해지지 못한다. 그가 화국봉을 따른 결과는 그가 하루빨리 자기의 정치생애를 종결짓는 것으로 끝났다. 113중전회후에 정치국이 개최한 민주생활회에서 오덕과 왕동흥등은 여러 사람의 표적이 된다. 오덕은 휴직하고 자아비판하도록 요구받고 회의장에서 쫓겨난다. 그가 회의장을 떠난 그에 대하여 신속히 결론이 내려진다. 그는 엄중한 잘못을 저질렀고, 그는 모든 직위로부터 파면된다고. 진운은 이렇게 말했다. “오덕동지는 진정한 시비의 관념이 없다.” 이것은 결국 멍청하다는 말이다.

 

1980년이후, 국가의 정치분위기는 점차 호전된다. 12차전당대회에서 호요방, 만리는 오덕에게 중앙고문위원회 위원을 맡기자고 제안한다. 어쨌든 그는 사인방을 체포하는데 공헌하였다는 것이다. 결의가 통과되면서 오덕은 안도하게 된다. 그는 바닥까지 떨어지지는 않은 것이다.

 

오덕의 아들 오정륜(吳正倫) 현재 최고인민검찰원 판공청 비서3 국장을 맡고 있다. 그는 북경시공안국 간사, 과장, 부처장, 처장을 거쳤고, 북경시위 정법위 1 부주임, 주임, 북경시 국가안전국국장조리, 부국장, 최고인민검찰원 판공청 비서3국국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