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4월 13일 나포박(羅布泊)에서 마른시체가 발견되었는데, 이 시체가 발견되자마자 26년전에 신비하게 실종된 저명한 과학자 팽가목인지 아닌지에 대하여 격론이 붙었고, DNA검사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이 사건은 이전에 팽가목이 실종된 사건을 다시 한번 되집어보게 하고 있다.
팽가목(1925-1980)
광동성 번우 사람. 한족.
1947년 남경 중앙대학 농학원졸업
북경대학 농학원 토양계 조교
1961년 상해화학연구소 연구원
1979년 신강과학원 부원장
실종경위
1980년 6월 5일 : 이 날은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팽가목이 이끄는 고찰대는 북에서 남으로 이미 말라버린 나포박(羅布泊)의 호수바닥을 종단하였고, 마침내 종착점인 미란에 도착하였다. 역사상 최초의 나파박 호수바닥의 종단업무를 완성한 것이다. 그들은 중국과학원 신강분원의 왕문선, 마인문, 염홍건, 심관성, 진백천, 그리고 운전기사 진대화, 왕만헌, 포기재와 군부대의 무선병 초만능이었다.
1980년 6월 11일 : 나포박을 종단하는데 성공한 고찰대는 미란농장에서 약간의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실크로드의 남쪽노선을 따라 나포박을 횡단하고, 돈황으로 가서 다시 우루무치로 가서 2개월여의 야외고찰업무를 마칠 예정이었다.
1980년 6월 16일 : 오후 2시경 고찰대가 쿠무쿠두크의 서쪽 8킬로지점에 도착했다. 이 때 차의 기름과 물은 이미 바닥이 났다. 계획에 따르면 아직도 400킬로미터의 길이 남아 있었다. 토론을 거쳐 그들은 물을 찾기로 결정했다. 그날 오후에는 찾지 못하였다. 저녁에 회의를 열어서 현지의 군부대에 전화를 하여 도움을 청하기로 하였다. 팽가목은 친히 전보문구를 만들었다. "우리는 물과 기름이 모자랍니다. 긴급하게 기름과 물 각 500킬로그램을 공급해주십시오"
1980년 6월 17일 : 오전 9시, 부대는 회신을 통하여 긴급히 물자를 공급해주기로 하였고, 숙영지의 좌표를 물었다. 오후 1시, 기사 왕만헌이 차로 돌아가 의복을 꺼낼 때, 지도책속에서 쪽지 하나를 발견하였다.내용을 읽어본 후 깜짝 놀랐다. "나는 동쪽으로 가서 우물을 찾겠다. 팽. 6월 17일 10시 30분." 팽가목은 50도의 고온에 홀로 물을 찾으러 나선 것이다. 이것은 사막에서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팽가목이 남긴 쪽지
역사상 다섯번이 수색활동
제1차 : 1980년 6월 18일, 19일
전체 과학고찰대원과 기사등 9명이 발자국을 따라 이틀연속으로 찾았다. 대원인 마인문(馬仁文)이 숙영지에서 동북으로 10킬로미터 떨어진 갈대밭에서 팽가목이 앉아 쉬었던 흔적을 발견하였다. 1장의 사탕포장지였는데, 이것은 바로 미란농장에서 팽가목이 샀던 그것과 같은 사탕이었다. 그러나, 발자국은 사라졌고, 다시는 찾을 수 없었다.
제2차 : 1980년 6월 20일에서 26일
현지 군부대와 과학고찰대원이 136인차 출동하였고, 공군은 9대의 헬리콥터, 2대의 안-2형비행기를 출동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제3차 : 1980년 7월 7일에서 8월 2일
181인, 차량 48량, 비행기 69대차로 지면을 100여시간 수색했고, 수색범위는 4000여평방킬로미터에 달하였다. 공안부에서는 6마리의 경찰견을 가지고 나포박(羅布泊)으로 왔으나 모두 차에서 내리려고 하지 않았다. 차에서 끌어내린 후 4 다리가 뜨거워 견디지 못했고, 모두 한 다리는 공중에 들고 열을 식히며 세 다리로 움직였고, 수시로 드는 다리를 바꾸곤 하였다. 결국 경찰견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였고, 팽가목은 여전히 행방불명이었다.
제4차 : 1980년 11월 10일에서 12월 20일
41일간, 1,029인차를 출동하였다. 소륵하 길을 따라 1011킬로미터를 수색하였으나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제5차: 2004년 4월 6일에서 4월 13일
탐험대일행 10인은 2개조로 나누어 도요타 찦차를 타고 우루무치에서 출발하여 수색대원들은 팽가목이 휴식했던 갈대밭에서 동, 북, 서로 말발굽형으로 노선을 정해서, 숙영지에서 서쪽8킬로미터지점에 있는 투야단등지까지 수색하였으나 아무런 결과가 없었다.
실종에 대한 9가지 소문
팽가목의 실종후에 여러차례에 걸친 수색에서도 찾지를 못하자, 그의 실종을 둘러싸고 여러가지 소문들이 돌기 시작했다. 주로는 9가지였다.
첫번째는 팽가목이 외계인에게 납치되었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팽가목이 미국으로 도망쳤다는 것이다.
세번째는 팽가목이 헬리콥터를 타고 소련으로 갔다는 것이다.
네번째는 팽가목과 의견차이가 있던 과학고찰단원에 의하여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다섯째는 팽가목이 방향을 잃어 숙영지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섯째는 팽가목이 불행하게 소택(沼澤)에 묻혔다는 것이다.
일곱째는 팽가목이 돌연 무너진 아단(雅丹, 작은 언덕)에 깔렸다는 것이다.
여덟째는 팽가목이 이리떼에 잡아먹혔다는 것이다.
아홉째는 팽가목이 갈대밭에서 더위를 피하다가 열기에 혼절하고, 바람이 불면서 모래에 묻혀버렸다는 것이다.
처음의 네가지 견해는 당시 팽가목이 나포박을 조사한 조사일지를 가지고 있었고, 이것이 상당히 귀중한 과학적 가치가 있었으므로 그것을 가지고 도망치거나, 납치당했다는 것으로 현실성은 없다.
다음의 네가지 견해는 현장조사결과 이리떼도 없고, 소택도 없으며, 무너져 사람이 죽고 깔릴만한 아단도 없었고, 현지 지형이 그다지 복잡하지 않아 야외경험이 풍부한 팽가목으로서는 길을 잃는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아홉번째 견해가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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