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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청일전쟁 배상금은 일본의 근대화에 얼마나 기여했을까?

by 중은우시 2025. 7. 23.

글: 상희문사(尙曦文史)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한 후, 청나라정부가 일본에 지급한 거액의 전쟁배상금은 일본에 얼마나 큰 작용과 영향을 끼쳤을까? 이에 대하여, 필자는 두 가지 측면에서 논의해보고자 한다: 첫째는 이 전쟁배상금의 계산, 지급방법, 관리방식 및 이로 인해 일본의 금융체계에 조성된 변화이고, 둘째는 전쟁배상금이 빈중의 전쟁의식에 어떤 영향을 가져왔는지 하는 것이다. 앞의 문제는 단기적이고 구체적이며, 금융체계의 변화는 주로 청일전쟁이후 일본의 금본위경제체제를 실시한 것과 관련된다. 뒤의 문제는 장기적이고, 추상적이며, 이런 민중의식의 변화는 심지어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대외관계에 영향을 끼쳤다.

청일전쟁(중국에서는 甲午戰爭이라 함)의 배상금총액은 2억3,150만고평냥(庫平兩, 청나라관방계량단위) 백은(白銀)으로, 당시의 일본화폐로 환산하면 3억5,836만엔이 된다. 당시 일본의 몇 가지 중요한 경제수치와 비교해보면 이 금액은 엄청난 액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94년 일본재정수입(일반회계)
 
9.817만엔
1894년 일본재정지출(일반회계)
 
7,813만엔
1893년 기업자본총금액
 
2억 987만엔
1894년 통화발행량총액
 
2억 3,040만엔
1894년 중앙은행화폐발행량총액
 
1억 4,981만엔
1894년 무역수출총액
 
1억 1,325만엔
1894년 무역수입총액
 
1억 1,748만엔
청일전쟁 배상금
 
3억 5,836만엔

위 수치는 명치재정사편찬회가 편찬한 <명치재정사(明治財政史)> 제2권, 동경 환선주식회사, 1905년, 제224-225페이지에 나와 있다.

청일전쟁이 끝난 후, 특히 1896년-1898년 사이에 일본은 사상유례없는 무역적자가 발생한다; 만일 엔화로 계산한다면, 1896년의 무역적자는 5,883만엔에 이르고; 1897년에는 약 5,455만엔, 1898년에는 약 1조1,162만엔에 이른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대규모 무역적자가 지속적으로 발생하면 외채가 누적되거나 국가자산이 유출된다. 일본은 그 때, 외채가 누적되지도 않았고, 국가자산이 유출되지도 않았다. 이는 확실히 청일전쟁 배상금이 무역적자를 메워주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거대한 전쟁배상금은 일반인으로 하여금 정상적인 경제계산습관을 망각하게 만든다. 여기에서, 필자는 몇 가지 구체적인 기술적문제를 언급하고자 한다. 이 배상금은 언제, 어느 곳에서, 어떤 방식으로 일본에 지급되었을까? 일본은 이 거액의 배상금을 받은 후 어떻게 보관하고 관리했을까? 일본정부는 이 의외로 얻은 돈을 가지고 무엇을 했을까?

일반인들은 이 거액의 배상금으로 일본은 교육, 공공시설의 건설등에 큰 촉진작용을 했다고 생각한다. 두 가지 명백한 사례가 있다. 교토제국대학 및 야하타제철소(八幡製鐵所)의 건설이다. 일본 최초의 국립대학은 1877년에 건립된 도쿄제국대학이다. 그후 1890년과 1892년에 제국의회에서 어떤 의원이 교토제국대학의 설립을 제안한다. 다만, 자금문제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었다. 청일전쟁후 당시의 문부대신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는 배상금중 일부 자금으로 교토제국대학을 건립하는 기금으로 삼자고 제안한다. 그후 일본의회는 1896년 청일전쟁배상금의 일부 금액으로 교토제국대학을 설립하는 예산안을 통과시킨다. 그리하여 1897년, 교토제국대학이 건립된다. 그외에 일본의 제2차세계대전때 필요한 철강총량의 절반이상을 제공했던 야하타제철소도 청일전쟁후, 일부 배상금으로 기금을 조성하여 건립된 것이다.

교토제국대학과 야하타제철소를 제외하고, 필자는 더 많은 배상금이 경제건설과 교육사업에 투입된 사례는 발견하지 못했다. 사실상, 청일전쟁 배상금의 대부분은 군대무장과 군비확장에 사용되었고, 직접적으로 민용경제와 국민교육방면에 쓰인 것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아래의 표는 이 배상금의 구체적인 사용경로를 보여준다:

 
금액
비율(%)
임시군비특별회계전입
7,896
23.0
육군확장비
5,404
15.7
해군확장비
12,527
36.4
제철소건설비
58
0.2
1897년 임시군비운수통신비일반호계전입
321
0.9
1897년도 일반회계보충
1,200
3.5
황실비용편입
2,000
5.8
군함어뢰정보충기금
3,000
8.7
방재준비기금
1,000
2.9
교육기금
1,000
2.9
합계
34,406
100.0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이 거액의 배상금이 직접적으로 확장에 쓴 비율이 84.7%에 이른다는 것이다. 교토제국대학건립비와 야하타제철소건설비를 다 합쳐도 전체의 3.1%밖에 되지 않는다. 부인할 수 없는 점은 군사확장에 쓰인 비용도 공업발전에 기여했다 .특히 중공업발전에. 다만 전체적으로 보면, 청일전쟁배상금의 운용방식은 일본의 현대화를 추진하는 과정으로 보면, 상당히 기형적이었다. 예를 들어, 2,000만엔의 교육기금과 방재준비기금의 보관방식은 국내공채를 보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3,000만엔의 군함어뢰정보충기금은 정부에서 기금에 절반이상을 국제시장에서 신용도가 비교적 높은 외국공채로 보유하도록 요구했다. 언제든지 화폐로 바꿀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 거액의 배상금의 지급관리방식과 금본위제도의 시행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시모노세키조약>에서 배상금총액 및 8년으로 분할하여 지급한다고 규정하는 외에 지급방식등 세부적인 내용은 규정되어 있지 않다. 조약체결후, 일본정부는 5월에 <배상금수수순서안>을 초안하고, 그후 청정부와 합의를 통해 안을 확정한다. 나중에 <요남조약(遼南條約)>에서 속료(贖遼)배상금을 추가하면서 기본적으로 이런 방식을 사용한다. 합의서에는 배상금을 영국파운드화로 환산하여, 런던에서 일본정부의 대리기관에 지급한다. 고평은에 대하여는 최종적으로 1고평은냥이 575.82그램순은으로 정한다. 영국파운드와 은량의 환가비율은 합의서가 확정되기전 3개월간 즉 1895년 6월부터 8월까지의 시장평균가격을 기준으로 하기로 한다. 최종적으로 1온스백은=30.4429펜스로 해진다.

배상금 단위로 사용된 것은 기준이 국제적으로 명확하지 않은 '고평냥'이었다. 기준에 관해 아무런 논쟁의 여지가 없는 '세관냥'이 아니라. 그리하여 고평은의 기준에 대해 중국과 일본 쌍방은 이견이 있었다. 그리고 이 이견에 대해 중국과 일본의 학자들의 견해도 서로 다르다. 왜냐하면 파운드로 지급하기 때문에, 고평냥의 은함유량을 높게 정할 수록 일본은 더 많은 파운드화를 받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부 일본학자들은 이렇게 지적한다. 일본측이 1고평냥=579.84그램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고 요구하였지만, 청정부가 받아들이지 않아, 할 수 없이 1고평냔=575.82그램을 기준으로 하기로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중국학자들은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1고평냥=575.82그램이라는 기준은 청나라정부가 일본측의 압력으로 부득이 받아들인 것이라고 한다. 그 외에, 백은과 파운드화의 환산방식에 있어서도 중국과 일본의 학자들은 견해가 달라진다. 대다수는 백은의 황금에 대한 가격이 날로 하락하는 상황하에서, 이전의 백은가격으로 파운드금액을 확정한 것은 일본측에 유리한 것이라고 본다. 고노(小野)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런 계산 방식은 일본에 있어서, "결과적으로 볼 때 상당히 유리한 것이다" 그러나, 경제학의 각도에서 보면, 시장가격이 변동하는 상황하에서, 거래완성후 유리하다는 것이 거래완성전의 불공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척기장(戚其章)은 다른 평가방식과 환산방식으로 계산해낸 금액과 실제지급한 금액을 비교하였다. 다만, 고평은냥의 평가 및 백은파운드의 환산방식은 중국이 지급하고 일본이 얻은 2억 3,150만냥백은의 전쟁배상금과 비교하면 세발의 피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시모노세키조약>에서 규정한 배상금전액이 8차에 걸쳐 7년내에 지급해야 했고, 최종기한은 1902년이었지만, 청정부는 4차에 걸쳐 1898년 5월에 전액을 지급완료했다. 사전에 배상금을 완납한 가장 큰 이유는 이자비용을 줄이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조약에서 분할지급을 규정한 후, 연리를 5%로 정했기 때문에, 이자부담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보면, 파운드방식으로 지급하는 자체는 청정부에 있어서, 영국을 대표로 하는 다른 열강에 있어서 나쁜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일본에 있어서 이런 방식이 가져온 이익은 더욱 분명하다. 첫째, 중국 자체가 은생산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 거액의 은을 모으고 운송하는 것은 아주 힘든 임무라고 할 수 있다. 파운드로 지급하는 것은 청정부로 하여금 그런 번잡함을 회피할 수 있게 해주었다. 동시에, 이런 대규모 은의 집중지급은 국제시장에 큰 충격을 가져다 줄 수 있다. 그런 시장에 대한 충격을 피하기 위하여, 일본은 파운드로 수수하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이는 영국을 우두머리로 하는 기타 열각국가에 있어서도 안심되는 처리방식이다. 둘째, 은화와 은량은 당시 일본의 주요화폐형태였다. 만일 대량의 백은이 돌연 일본으로 유입된다면, 반드시 화폐체계 및 가격체계의 혼란을 불러일으킬 킬수 있다. 파운드는 당시 가장 신용이 높은 금본위화폐였다. 대량의 파운드를 보유하는 것은 일본에 있어서 금본위화폐체계로 진입하는 첩경이었다. 그외에, 일본은 삼국간섭으로 요동을 반환했다. 특히 러시아의 중국 동북지방에서의 확장 그리고 조선의 일본에 대한 항쟁에 고민이 많았다. 긜고 일본은 청일전쟁이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와신상담"하여 러시아와의 대전을 준비한다. 다음 번 전투를 준비하려면 반드시 국외에서 군함 및 무기를 충분히 구매해서 준비해야 한다. 파운드를 보유하는 것은 가장 좋은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일본정부는 일본은행을 지정하여 배상금의 수령과 관리업무를 책임지게 한다. 일본은행은 다시 이 임무를 전문적으로 외환업무를 담당하는 요코하마쇼킨은행(Yokohama Specie Bank, 橫濱正金銀行, 지금의 미쓰비시은행) 런던지점에 위탁한다. 이전에 요코하마쇼킨은행은 영국에 계좌를 개설하려 했으나, 거절당한 바 있다. 다만 이번 업무를 위탁받은 후, 1896년 요코하마쇼킨은행의 계좌요구는 영국은행으로부터 시원스럽게 승락을 얻어낼 수 있었다. 당시 이처럼 큰 파운드자금을 가진 기관은 많지 않았다. 일본은행은 1900년이후 10년동안 영국은행의 최대고객이 된다. 이를 보면, 전쟁배상금이 일본의 해외금융기관의 국제시장에서의 신용을 크게 제고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런던에서 파운드의 형식으로 일본에 지급한 전쟁배상금은 각종 복잡한 절차를 거쳐, 일본은행이 화폐를 발행하는 준비금이 된다. 그리하여, 1897년 10월 1일 시행한 <화폐법>에서 1엔당 황금 750밀리그램으로 태환할 수 있다고 규정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정식으로 금본위제를 시행한다. 말할 것도 없이, 금본위제의 최대특징은 화폐가치와 황금가치를 하나로 묶어두는 것이다. 이런 화폐제도는 이점도 있지만 폐해도 있다. 이점은 만일 상대방도 금본위제를 채택한다면, 양국간의 화폐가치비율(환율)이 안정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안정은 무역 및 국제투자의 리스크를 감소시킬 수 있다. 나아가 물가를 안정시키는데 무시할 수 없는 작용을 한다. 폐해는 금본위제를 채용한 국가는 화폐량을 통제함으로써 경제를 조정하는 자유를 상실하게 된다. 그외에, 환율의 안정은 단지 마찬가지로 금본위제를 채용한 국가간에 만일 상대방이 금본위제를 채택하지 않는다면, 이런 환율안정은 이루어질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점이 폐해보다 클까, 아니면 폐해가 이점보다 클까? 역사는 이미 명확한 대답을 내놓았다. 1930년대에 세계적인 경제위기가 발발하면서, 금본위제를 실행하는 국가는 속속 금본위제를 포기한다. 제2차세계대전이후 1970년대초까지, 미국을 위시한 구미각국은 비록 금본위제와 유사한 고정환율제(브레튼우즈시스팀)를 실행한 바 있지만, 닉슨이 달러와 황금의 태환을 정지한다고 선언하면서 끝이 난다. 현재, 기본적으로 이미 그 어느 나라도 금본위제를 유지하지 않고 있다. 이 역사 자체는 금본위제를 부정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일부 서방학자들은 구미대국이 일지기 금본위제에 연연하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은 그 경제효과에 대한 고려때문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일종의 정신작용(mentality)때문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1897년 금본위제의 실시는 일본에 얼마나 경제적이익을 가져다 주었을까? 이 문제에 대하여, 특히 최근 들어 발표된 연구성과중에서, 갈수록 많은 학자들은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나카무라 다카후사(中村隆英)은 계량경제학의 방법으로 1895년-1916년 금,은의 가격비교 및 홍콩의 대중무역간의 관계를 분석했고, 이렇게 결론내렸다: 은의 가격파동은 직접적으로 일본의 대중수출에 영향을 끼친다. 은가격의 하락은 1908-1909년 일본의 대중수출이 부진했던 주요 원인이다. 그후, 그는 이렇게 지적한다: "금본위제는 마쓰다카 마사요시(松方正義)의 의지와 정치적 영향하에 실현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마쓰다카는 "근본적으로 현재의 경제득실을 신경쓰지 않았다." 마쓰다카는 이렇게 생각한다: "일류국가로서 세계를 영도하려면 황금이 필요하다" 그외에 나카무라 소우에츠(中村宗悅)도 이렇게 지적한다: 비록 금본위제의 실시는 일본이 은본위제국가에 대한 투자 및 일본의 기타 금본위제국가에 외채를 발행하는데 일정한 촉진작용을 했지만, 금본위제에 의지하여 수출을 장려하고, 경제를 안정적으로 발전시키려고하는 것은 완전한 공상이다.

금본위제의 실시와 관련하여, 오우치 효에(大內兵衛)도 이렇게 생각한다: "일본화폐사상 최대의 사건일 뿐아니라, 또한 금본위제는 신생자본주의국가인 일본을 세계경제무대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이는 또한 세계사의 일대기념탑이다." 테라시마 가즈오(寺島一夫)의 견해는 더욱 투철하다: "메이지30년(1897년) 금본위제의 확립은 일본이 반식민지로 전락할 위험을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하고, 일본의 자본주의가 새로운 단계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일본은 독립된 국가로서 다른 강대국들과 세계시장에서 각축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보면, 금본위제의 실시는 그것이 일본에 어느 정도 직접적인 경제적이익을 가져다주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라기보다. 당시 일본통치자가 금본위제를 일종의 '일류국가"의 상징이라고 보았기 때문이고, 열강으로 들어가는 입장권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2

이어서, 우리는 본문의 두번째 문제를 얘기해보기로 하자. 청일전쟁의 배상금은 전체 국민의 의식에 어떤 영향을 가져다 주었을까? 먼저 일본의 저명한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은 <이 국가의 형상>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왜 황급히 건립하기 시작한 해군규모를 절반으로 줄여서 단지 스스로 방어하는데 필요한 규모로 축소시키지 않았을까?"

시바 료타로는 러일전쟁역사에 대한 해석에 상당한 실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일찌기 러일전쟁을 주제로 하여, 1968년-1972년에 장편역사소설 <언덕 위의 구름>을 발표했다. 일본방송협회는 2009년부터 2011년까지 이 소설을 드라마화한 TV드라마를 방영한 바 있다. <이 국가의 형상>은 <언덕 위의 구름>이 출판된 후 발표된 역사수필이다. 위의 말에 숨은 의미는 바로 만일 일본이 러일전쟁후 "적절한 선에서 멈추었어야 한다" 더 이상 군사확장을 하지 않았으면, 이후 패전의 비참한 국면은 겪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문제는 일본이 왜 "적절한 선에서 멈추지 않았을까?" 위의 말의 뒤에 시바 료타로는 이런 말을 남긴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완전히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러일전쟁의 승리는 일본국 및 일본인으로 하여금 이성을 잃게 만들었다. 이때 인민대중은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익에 이성이 마비되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이다. 많은 군중들은 크게 소리쳤다. 평화의 가치는 너무 싸다고. 우리는 평화협정을 폐기해야 하고, 우리는 계속하여 싸워야 한다고. <국민신문>이외의 각 신문은 이런 정서를 선동했다. 그리하여 히비야공원의 성토대회같은 것이 벌어진다. 3만명이 참가했다. 그들은 폭도로 변신하여, 두 개의 경찰서, 219개의 파출소, 13개의 교회, 53개의 주택을 불태워버린다. 일시에 전체 국가는 무정부상태로 전락한다. 정부는 결국 부득이 계엄령을 선포할 수밖에 없게 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 성토대회와 폭동은 이후 40년간 악마같은 광경의 출발점이라고. 이런 엄청난 에너지의 대중열기는 참모본부에 충분한 충전을 해주었고, 전체국가의 망상에 동력을 제공했다.

우리가 이 글에서 청일전쟁후 배상금문제를 토론하는 글에서 러일전쟁이후의 사건을 분석하는 것은 시바 료타로가 단지 이 사건의 결과만을 분석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사건의 전인(前因)은 언급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 말에 묘사한 내용의 배경을 살펴보기로 하자.

러일전쟁은 여러가지 연유와 우연으로 결국 일본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후, 1905년 9월 5일 미국의 알선하에, 양국은 포츠머스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한다. 필자가 앞에서 소개한 바 있듯이,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준비하기 위하여, 청일전쟁배상금중 절대다수의 금액을 군사확장에 사용한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러일전쟁에 소모된 재정지출이 약 18억엔이었다. 청일전쟁배상금으로 쌓은 자금을 모조리 써버렸을 뿐아니라, 거액의 내채와 외채를 일으켜야 했다. 이를 보면, 러일전쟁의 군사비지출은 청일전쟁배상금총액을 훨씬 초과한다.

다만, 많은 매체와 일반국민들은 모두 믿고 있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만 하면, 이 전쟁경비는 완전히 전쟁배상금으로 회수할 수 있다고. 도쿄제국대학 교수를 위시한 "제대칠박사(帝大七博士)"는 더더욱 러일전쟁의 승리가 일본에 30억엔의 배상금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들은 러일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내각총리대신과 외무대신에게 글을 올려, 강경한 어투로 개전을 주장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은 '칠박사'의 글에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세상에 반생불숙(半生不熟)의 학자의 멍청함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제대칠박사"는 수상 가쓰라 다로(桂太郞)의 관저로 가서 대러개전을 주장했다. 이에 대하여 가쓰라 다로는 그들이 단지 "우물안 개구리"라고 생각한다.

당시, 비록 1905년 일본해군이 러시아함대에 대승을 거두었지만, 탈진상태에 빠진 것은 일본이지 러시아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전에 러시아황제 니콜라이2세는 이렇게 명을 내린다: "한치의 땅도 일본에 양보할 수 없다. 한푼의 루블도 일본에 배상금으로 지급할 수 없다." 그래서 협상테이블에서, 패전국인 러시아는 오히려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싶어하지 않는 모습을 취하면서, 우리는 계속 싸울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러시아대표는 일본의 조선에서의 권익을 인정하고, 러시아의 여순항, 대련 및 관련수역의 조차권익을 양보하지만, 배상금은 한푼도 지급하지 않는다. 일본측 대표는 1905년 8월 28일에 개최된 어전회의에서 허가를 받은 후, 러시아와 합의에 달성한다. 정식 평화협정은 1905년 9월 5일 체결된다.

협정체결소식과 내용이 일본에 전해진 후, 큰 파란이 일어난다. 쿠로이와(黑巖)의 책에는 매체와 사회각계층인사의 반응 및 민중폭동의 경과를 상세히 소개한다. 쿠로이와는 1905년 9월 5일, 6일에 발생한 도쿄의 폭동을 "제도대소요(帝都大騷擾)"라고 불렀다. 각 매체는 <국민신문>을 제외하고 강력하게 정부의 연약함을 성토했다. 그리고 <국민신문>은 폭동때 주요공격대상중 하나가 된다. 민중들의 격분은 배상금이 없는 평화협정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다. 이런 격분은 다시 무릎꿇고 연약하다고 인식되는 정부를 겨냥했다. 심지어 평화협정체결의 여건을 마련해준 미국도 포함된다. 쿠로이와의 통계에 따르면, 이번 폭동에서 불에 탄 파출소가 264곳이며, 전체 도쿄시의 모든 파출소의 80%에 해당했다. 러일전쟁은 일본이 근대이래 외국과 벌인 두번째 대규모전쟁이었다. 제1차는 당연히 이보다 10년전에 발생한 청일전쟁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많은 매체 및 평민백성들이 러일전쟁승리후에 패전국으로부터 30억엔 심지어 50억엔의 배상금을 받아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게 되었을까?

먼저, 이건 정부의 전쟁선전때문이다. 정부는 단지 자신의 용맹함과 무적을 선전했지 객관적으로 전쟁의 냉혹함과 무정함을 얘기하지는 않았다. 동시에 이런 기대는 청일전쟁의 기억에서 왔다. 청일전쟁이 끝난 후 10년간, 전쟁승리로 얻은 거액의 배상금은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었다. 10년전에 순조롭게 실제비용보다 훨씬 큰 배상금을 받아낼 수 있었다면, 러시아에 승리한 후에도 다시 한번 이런 기대를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러시아가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싶으면 반드시 먼저 일본에 거액의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 이런 기대가 만족되지 못했을 때, 민중의 분노는 정점에 달한다. 그리하여 폭동이 일어난 것이다. 비록 정부가 계엄령을 반포하는 등의 조치로 이번 폭동을 제압했지만, 그후 정부는 부득이 수시로 이런 진상을 모르는 민중으로부터의 압력을 신경써야 했다. 그리고 언론자유를 더욱 엄격하게 통제한다. 이것이 바로 시바 료타로가 말한 "악마같은 광경"이다. 만일 청일전쟁후에 일본이 거액의 배상금을 받아내지 못했더라면, 아마도 이런 광경이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학자에게 가설은 있을 수 없지만.

3

청일전쟁배상금은 일본의 현대화에 큰 역할을 했다. 다만, 전쟁배상금은 일본의 현대화에 충분한 조건이 되지는 못했다.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청일전쟁이전의 20여년간, 일본은 구미국가와 비견할 수 있는 완벽한 법률체계를 갖추었다는 것이다. 이들 법률은 대부분 효과가 있었다. 그리하여 메이지유신은 전체 일본사회에 정치부터 교육까지 철저한 개혁을 진행할 수 있었다. 이 방면의 변화야말로 일본현대화의 진정한 동력이다. 그리고 청일전쟁의 거액배상금은 비록 단기적으로 경제문제를 해결했고, 매체와 진상을 모르는 민중들에게 "대포한번만 쏘면 황금만냥을 얻어낼 수 있다"는 생각을 품게 만들었지만, 시바 료타로가 분석한 것처럼 "전체국가의 망상"을 만드는 주요 동력이 되고, 결국 이후 4,50년간 수습불가능해진다. 결국 일본은 스스로에게 엄청난 비극을 불러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