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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약사(郭藥師): 요나라출신으로 송에 투항하고, 다시 금에 투항한 삼국의 교란자.

by 중은우시 2024. 7. 25.

글: 팽배신문(澎湃新聞)

요나라 보대4년(1122년) 구월, 대요제국의 "상승군(常勝軍)" 총사령관 곽약사는 탁주(涿州), 역주(易州) 두개 주를 바치면서, 부하 8천명을 이끌고 송나라에 투항한다.

일찌기 동북아를 웅패했던 대요제국은 이때 이미 국력이 쇠퇴하여 위기에 처해 있었다.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가 1114년에 거병한 후, 여진기병의 말발굽이 대요제국의 절반을 짓밟고, 거란병사들은연전연패했다. 요나라의 천조제(天祚帝) 야율연희(耶律延禧)는 1112년 봄에 이미 협산(夾山, 지금의 내몽골 토목특좌기)으로 도망쳤다. 그리하여, 제국의 내부는 인심이 흉흉했고, 나라의 앞날이 보이지 않었다.

곽약사는 바로 그런 상황에 처해 있었다.

요, 금, 송의 3대제국이 서로 운명을 걸고 싸우는 시대배경하에서, 곽약사는 원래 별로 두드러지지 않는 보통사람이었다. 1116년, 즉 요금전쟁이 3년째 접어들고 있을 때, 사서에 곽약사의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 요나라가 동북에서 현지의 굶주린 백성들을 끌어모아 군대를 만들었는데, "원군(怨軍)"이라고 칭했다. 그리고 곽약사는 기껏해야 이 잡종부대의 장군중 한명이었다.

요나라가 전투에서 계속 패배하자, 전투력이 강하지도 않았던 이 잡종군의 지위가 크게 중요해진다. 그러면서 곽약사의 몸값도 올라간다. 세상에 영웅이 사라지니, 아무나 유명해지는 셈이었다. 게다가 곽약사는 이리저리 눈치를 잘 살피고 내부투쟁을 진행하는데 뛰어난 실력을 가졌다. "원군"은 정규군의 의미가 농후한 "상승군"으로 재편된다. 그리고 곽약사는 요나라조정에 의해 상승군의 '통령'으로 임명된다. 그는 요나라 군부내의 새로 떠오르는 인물이 된 것이다.

그러나, 곽약사가 요나라에서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1122년 사월, 남쪽에서는 송나라가 요나라를 공격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곽약사가 막 통령으로 임명되어 기세좋게 부대를 이끌고 북상하여 금나라와 일합을 겨루어 요나라의 사기를 끌어올리려고 하고 있었는데, 송나라가 갑자기 요나라를 공격한다는 소식에 곽약사는 남아 있던 희망이 사라진다고 느꼈다.

당시의 '국제정세'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알고 있겠지만, 요군이 금군과 단독으로 싸우는 것은 그럭저럭 가능한 상황이지만, 만일 송군까지 참전한다면, 송군이 아무리 전투력이 약하다고 하더라도, 요나라로서는 도저히 버틸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점을 눈치빠른 곽약사가 모를 리 없다. 하물며 곽약사는 비록 순수한 한족이 아니긴 하지만 그렇다고 거란인도 아니었다. 요나라에 대하여 그다지 생래적인 동질감같은 것은 없다. 제국의 앞날이 암흑천지라면, 그는 잡종군의 총사령관으로서 재빨리 배를 갈아타는 것이 좋다.

곽약사같은 배경을 가진 사람에 있어서, 그가 신봉하는 실력철학은 바로 손아귀에 병력만 가지고 있으면 어느 황제의 밑에 있더라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요나라라는 큰배가 침몰하기 직전이라면, 곽약사는 자신이 배바닥에 구멍을 몇개 더낸다고 하여 개의치 않는다. 그렇다면, 곽약사에게 남겨진 선택은 아주 간단하다. 둘중 하나이다: 송에 투항하느냐, 금에 투항하느냐.

몇달간 관망한 후, 곽약사는 과감하게 송에 투항하기로 결정한다.

만일 순수하게 계산적으로 보면, 곽약사의 선택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여진인의 금제국은 중천에 떠오른 해와 같고, 금나라의 철기는 천하무적이다. 그러나 송나라는 비록 천하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이기는 하지만, 전투력은 평범했다. 만일 곽약사가 강자에 의탁하려고 생각한다면 당연히 금나라가 가장 좋은 선택이다.

다만, 문제는 실력은 아마 곽약사가 고려한 것중 하나에 불과하고, 아마도 편안하게 살아오지 않았던 곽약사로서는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을 오히려 선호했을 수 있다. 송나라를 선택한 이유는 아마도 다음의 몇 가지일 것이다:

첫째, 송군이 비록 약하여, 요나라와 개전한 이래 이미 물에 빠진 개 신세인 요군도 이기지 못했지만, 그의 상승군은 능히 싸울 수가 있다. 곽약사가 자신의 상승군의 전투력은 너무 높게 스스로 평가했는지는 몰라고, 논리적으로는 이해가 된다. 송군이 잘 못싸울수록, 송나라는 곽약사와 그의 부대에 더욱 의존할 수밖에 없고 그에게 더욱 많은 봉록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반대로 그의 상승군이 금군에 무엇을 가져다 줄 수 있는가? 금나라에는 호랑지사가 많다. 곽약사가 없더라도 상관이 없다. 곽약사가 투항하더라도 그다지 많은 상을 하사받지는 못할 것이다.

둘째, 곽약사도 알고 있었다. 연운십육주(燕雲十六州)가 송나라와 송휘종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송나라를 도와 연운십육주를 회복하면 송나라에는 개세의 공을 세우는 것이 되어, 그로서는 제후에 봉해지고 재상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럼 한번 도박을 걸어볼 만하다.

셋째, 곽약사는 아마도 요나라가 멸망한 이후의 복잡한 정치국면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을 수도 있다. 곽약사는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 금과 송은 동맹을 맺었고, 금제국은 당시에 연운십육주에 대하여 그다지 크게 흥취를 나타내지 않았다. 그래서 요나라를 멸망시킨 후, 송나라와 다시 신속히 전투를 시작할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하물며, 전쟁을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상승군이 버티고 있지 않은가?

넷째, 곽약사는 아마도 약하기는 하지만 민족감정을 가졌을 수 있다. 그가 송나라에 투항할 때 조정에 올린 감정이 충만하고, 한족을 강조하는 항서를 보면 그러하다. 당연히 거기에는 연기하는 면도 없지 않겠지만, 혈통이 불명확한 곽약사는 그 자신을 스스로 절반의 한족이라고 여겼을 수 있다. 특히 그의 상승군내에는 한족의 비율이 아주 높았다. 송나라에 투항하는 것은 "해외의 떠돌이(遊子)가 나라로 되돌아가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이익충돌만 없다면,곽약사는 이런 민족주의적인 표현을 하는 데 전혀 반감이 없었다.

송나라에 투항한 후, 곽약사는 한때 매우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자신을 중흥명장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처럼 보였다.

곽약사의 개인적 군사생애에서 가장 빛나고 가장 체면이 상한 전투는 바로 소위 "연경(燕京)기습"이었다.

곽약사는 아마도 이소(李愬)가 눈오는 밤에 채주(蔡州)를 기습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같다. 송, 요 두 군대가 노구교의 양안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그는 아주 상상력이 풍부한 작전계획을 제시한다: "요군이 중병을 보내 나와 맞서싸우고 있으니, 분명 연산의 방어는 허술할 것이다. 만일 정예병사를 바로 연산성으로 보낸다면, 한족들은 송군이 왔다는 말을 듣고 반드시 성안에서 호응할 것이니, 연산을 함락시킬 수 있다."

기습의 전반부는 곽약사의 극본대로 진행되었다. 심지어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쉬웠다. 곽약사의 선봉은 일반백성으로 위장하여 손쉽게 연경성내로 잠입한다. 그리고 격전을 펼치지 않고 기본적으로 전체 성을 장악한다.

성공에 도취한 곽약사는 나중에 멍청하기 그지없는 것으로 증명되는 명령을 내린다: "한족의 투항만 받아주고, 거란인은 모조리 죽여라!" 솔직히 말해서 곽약사가 이렇게 하는 것은 정치적인 지조가 없는 것이다. 요나라는 어찌 되었던 자신의 고국이 아닌가. 개인의 공명을 위하여 투항한 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네가 일부러 예전에 같이 있던 사람들을 굳이 죽일 필요야 있겠는가. 다만 이건 아마도 거의 모든 역사상 투항한 장수들의 공통된 노선선택으로 보인다. 새 로운 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보이기 위하여 자신이 예전 나라와는 관계를 완전히 단절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리고, 투항후의 모종의 심리적인 왜곡으로 인하여, 적극적으로 새로운 나라의 군인들보다 더욱 잔인하게 살륙을 벌이게 된다. 오삼계(吳三桂)도 그러했고(영력제를 죽임), 곽약사도 그러했다.

이때 연경성에는 북요(北遼)의 소조정과 소태후(蕭太后) 외에, 적지 않은 거란인과 해인(奚人)이 있었다. 원래 대다수의 거란인과 해인들은 대세가 기운 것을 보고 저항할 의지같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곽약사의 군대가 연경성에서 정말 그들에 대한 대도살을 시작하자, 오히려 요행심리를 버리고, 죽기를 각오하고 곽약사의 군대에 저항하게 된다.

그리하여, 곽약사는 손쉽게 얻을 수 있던 승리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린다. 성안의 거란인들은 황궁을 지키고 있던 소태후를 보호하며 죽기살기로 저항했다. 곽약사의 군대는 이때 이미 승리를 거머쥐었다고 생각하여, 요나라의 잔여세력을 소멸시키는데 전력을 다하지 않고, 술을 마시고, 약탈하고 부녀자를 간음하느라 바빴다. 그리하여 요군에게 한숨돌리며 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그후 노구교의 전선에 있던 요군의 명장 소간(蕭干)이 병력을 이끌고 돌아와 오히려 송군을 기습한다. 그리하여 송군은 대패하고, 수천의 정예병사들이 연경성안에서 죽는다. 의기양양하던 곽약사는 낭패하게 부하들을 버리고 밧줄 하나에 의존하여 연경성밖으로 도망쳐야 했다.

초전에 승리를 거두고 나중에는 패배한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우세한 상황하에서 오히려 요군에게 역전을 당했다. 이런 곽약사가 무슨 명장의 반열에 들 수 있단 말인가.

고굉의(顧宏義) 선생은 <천열(天裂): 십이세기 송금화전실록>이라는 책에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이때 군대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은 악비(岳飛)도 연경기습전투에 참가했다. 송군이 대패한 후, 악비는 부친상으로 인하여 고향에 돌아가게 된다. 이는 악비가 참전한 평생 최초의 전투였다. 그리고 아마도 가장 형편없는 전투였을 것이다.

아마도 패전은 송군내에서는 항상 있는 일이어서인지, 곽약사는 그 후에도 관운이 형통했다. 그는 금방 대송의 연경지구 최고군사장관이 된다. 자세히 생각해보면, 송군의 당시 실력이나 사기를 보면, 연경이라는 최전선에 유명한 장수들은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았을 걳이다.

선화5년(1123년) 육월, 몇년전까지 잡종군의 소두목이던 곽약사는 송휘종의 명에 따라 조정에 들어가서 황제를 만난다. 곽약사는 동경 변량에서 대장군의 개선같은 최고의 예우를 받는다. 미국의 한학자 페트리샤 버클리 에브리(Petricia Buckley Ebrey, 伊佩霞, 1947- )가 <송휘종>이라는 책에서 쓴 바에 따르면, 송휘종은 귀빈의 예로 곽약사를 대했다. 확실히 송휘종은 그가 '당나라의 번장(蕃將)들 처럼 북방변경을 지켜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송휘종은 그에게 저택과 미녀를 하사한다. 그리고 곽약사를 데리고 변경에서 가장 유명한 황가원림 금명지(金明池)로 가서 용주(龍舟)경기를 관람하고, 곽약사를 궁으로 불러 특별히 그를 위해 준비한 주연도 베푼다. 주연에서 송휘종은 한가지 부탁해도 되겠는지 물어보고, 곽약사는 "죽음으로 보답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송휘종이 곽약사에게 요나라의 천조제를 생포하여 "연의 사람들이 절망하게" 만들어달라고 하자, 곽약사는 대단한 연기실력을 보인다. 그는 눈물 콧물을 흘리면서, "엣주인을 범할 수는 없습니다!"라는 이유를 대며 송휘종의 부탁을 거절하고, 다른 장수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게 해달라고 말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송휘종은 그를 질책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그가 옛주인을 잊지 않는 충신이라고 말하며, 오히려 상을 내렸다고 한다.

곽약사는 이런 행동으로 송휘종의 마음을 확실히 얻는다. 비록 곽약사가 정말 천조제에 대하여 어느 정도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지 여부는 알 수가 없지만, 그가 이전에 연경성을 기습하여 거란인을 도살한 잔인한 일면을 보면, 거짓으로 쇼를 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이런 우둔한 충성심을 보임으로써 황제의 환심을 사는 것은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수법이다. 안록산이 바로 그런 방식으로 당현종을 현혹하지 않았던가.

송 선화7년(1125년) 이월, 곽약사의 "엣주인" 천조제가 금군에 포로로 잡히고, 요나라가 멸망한다(여기에서는 야율대석의 서요는 고려하지 않기로 한다).

그 해 시월, 백전백승의 금군이 송나라를 공격한다. 곽약사는 연운십육주를 수복한 대공신에서 일거에 송군의 대금전선의 최선봉에 서는 대들보인 장수가 된다. 전체 대송은 곽약사의 상승군이 멋지게 싸워서 금군의 기세를 꺽어주기를 기대했다.

다만 대송조정이 곽약사에게 거는 기대가 이렇게 높았던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몇달 전, 송휘종의 측근중 가장 병법을 잘 안다는 환관 동관(童貫)이 곽약사의 군으로 가서 열병에 참석한 바 있다. 사람이라고는 없는 황야에서 곽약사가 동관의 앞에서 깃발을 한번 흔들자, "순식간에, 사방의 산에서 철기(鐵騎)가 나타나고, 그 수가 얼마인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곽약사의 이런 모습에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동관일행도 감탄을 한다. 그는 조정으로 돌아온 후 송휘종의 면전에서 곽약사를 "필능항로(必能抗虜, 반드시 오랑캐를 막아낼)"의 장수라고 극력 치켜세운다. 당연히 동관이 송휘종에게 말하지 않은 것도 있다. 곽약사가 자신을 만났을 때, 자신에게 공손하고, 심지어 자신이 부친을 대하는 예로 자신에게 큰 절을 올렸다는 것은.

송나라조정에 전해지는 한가지 전설이 있다. 금나라의 사신이 오는 길에 곽약사의 군대를 만났다. 감히 곽약사의 군대를 건드리지 못하고 도로 한켠으로 비켜주었다. 곽약사군은 대담하게도 사신단의 양을 빼앗아갔는데, 강인한 금나라사람도 감히 반항하지 못했다. 송나라조정의 이에 대한 이해는 곽약사의 "위명이 사방에 떨쳐지고 있다". 그가 있으면, 금군도 쳐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그리하여 송군은 더더욱 전쟁에 대비하는 준비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곽약사는 금군과 딱 한번 싸우고는 바로 투항해 버린다.

다만, 곽약사가 미리 투항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확실히 송나라를 위하여 큰 공을 세워 과관대작이 되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1125년 십이월, 즉 금나라와 송나라가 전쟁을 시작한지 석달째 되는 때, 곽약사는 4만5천의 군대를 이끌고 백하(白河)에서 금군을 맞이싸운다. 다른 것은 놔두고, 곽약사는 비록 절개가 없기는 하지만, 싸울 때는 위험을 무릅썼고, 군대의 전투력은 괜찮았다. 최소한 대다수의 송군보다는 몇단계 위였다. 전투중 곽약사는 정예기병을 이끌고 삼십리를 싸우며 금군의 군영으로 쳐들어간다. 금군은 버티지 못하고 퇴각했다. 그러나, 누가 생각이나 했으랴. 상승군내에 평소 곽약사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대장 장령휘(張令徽)가 중요한 순간에 부대를 버리고 도망친 것이다. 그리하여 송군의 전선이 붕괴된다. 곽약사는 이전에 연경을 가습하는데 성공한 후에 다시 실패했지만, 이번의 패배는 정말 그 개인의 책임은 아니었다.

이 전투가 끝난 후, 곽약사는 금군을 격패시키겠다는 자신감을 완전히 잃는다. 송나라에서 제후가 되고 재상이 되겠다는 야심도 물건너갔다. 사실상, 곽약사로서는 이때 금나라에 투항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상승군은 원래 "누구를 위하여 싸우든" 상관이 없었다. 대장기를 바꾸는데 익숙한 군대이다. 패전한 후 상승군은 투지를 완전히 잃었고, 내부의 여러 세력은 모두 각자 금나라에 투항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심지어 어느 상승군장수는 밀사를 금군의 총사령관에게 보내어, "살아있는 곽약사를 원하십니까. 죽은 곽약사를 원하십니까?"라고 묻기도 했다.

즉, 만일 곽약사가 금에 투항하면, 계속하여 상승군을 이끌면서 자신의 지위를 보전할 수 있지만, 만일 금에 투항하지 않겠다고 하면, 이 군대는 사분오열될 것이었다.

하물며, 곽약사는 송나라조정을 위하여 혈전을 끝까지 벌이면서 목숨까지 잃을 생각은 없었다. 싸워서 이길 수 없다고 생각되자, 그는 조그만치의 망설임도 없이 신속히 연경을 내놓고, 금군에 투항하기로 결정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금군의 총사령관인 완안종망(完顔宗望)은 항서를 받아들고 무슨 상황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며칠 전의 승리는 그저 요행때문인데, 어찌 바로 투항한단 말인가?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백하전투이후, 송휘종은 곽약사를 다독이기 위하여, 급한 마음에 곽약사를 "연왕(燕王)"에 봉하고, 또한 왕의 작위를 자손에게도 물려줄 수 있도록 하는 조서를 내려 곽약사의 투지를 불러일으키고자 했다. 그러나 조서가 경성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곽약사는 투항해버렸다.

곽약사가 금에 투항한 것에 관하여, 금군의 실력이 강하고, 곽약사를 우두머리로 하는 상승군이 원래 반복무상한 집단이라는 정치적 성격도 있었지만, 송나라조정 자신의 책임도 적지는 않다.

송휘종은 비록 곽약사를 아주 신임하였고, 하사품을 무수히 내렸지만, 송나라조정은 요나라에서 투항한 장수에 대하여 태도가 수시로 바뀌었다. 특히 1123년 연말의 "장각사건(張覺事件)"은 곽약사와 상승군을 크게 실망시켰다.

장각은 가장 유명한 요나라에서 투항해온 장수였다. 그는 먼저 금나라에 투항했다가. 다시 평주(平州)를 바치며 금나라를 배신하고 송나라에 투항해왔다. 원래 송나라는 그를 원하지 않았다. 그를 받아들이는 것은 공공연히 금나라와 척을 지는 일이었고, 금나라로 하여금 거병할 명분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송휘종과 신하들은 평주라는 영토를 탐내어, 장각의 투항을 받아준다. 장각이 금군에 패배하여 연경으로 도망쳐 오자, 금나라는 사신을 보내 송나라에 장각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송나라의 관리는 먼저 용모가 유사한 자를 내놓고 장각이라고 했으나, 금나라사람들에게 들통난다. 그러자, 담량이라고는 전혀 없는 송나라는 장각을 죽이고, 그의 수급을 금나라에 바친다.

신용도 없고 담량도 없는 이런 행동은 상승군으로 하여금 송나라를 멸시하게 만들었을 뿐아니라,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도 크게 우려하기 시작한다. 곽약사는 당시 이런 말까지 했다: "만일 약사를 내놓으라고 하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 그 말에 숨은 의미는 송나라는 믿고 의지할 큰 나무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금나라에 투항한 후, 원래 송나라를 정벌하는 전투에서 크게 전공을 세우고자 했던 곽약사는 할 일이 별로 많지 않았다. 그가 금군에 한 최대의 공헌은 바로 완안종망이 연경을 점령한 후 만족하여 회군하고자 했는데, 곽약사가 이렇게 건의한다: "송나라의 주력은 모두 하동에 있고, 하북의 땅에는 병력이 비어 있습니다." 이렇게 완안종망을 부추겨 변경까지 직접 쳐들어가자고 한다.

완안종망은 곽약사의 간언을 듣고 곽약사를 길잡이(響導)로 삼아 대거 남하한다. 고굉의는 <천열>에서 곽약사의 공로를 이렇게 설명한다: "곽약사는 송나라조정의 허실과 진위를 잘 알았다. 금나라가 군대를 이끌고 깊이 쳐들어와서 전승을 거두고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곽약사가 도와준 공이 크다." <송사>에 따르면, 금군이 변경을 포위한 후,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내는데, 에를 들어 손자를 욕하듯이 송나라조정을 질책한다든지, 방법을 바꾸어 각종 재물을 요구한다든지 이런 것들이 모두 곽약사의 아이디어라는 것이다. 이번에 곽약사는 완안종망의 앞에서 '옛주인과의 정'같은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그런 말에 속아넘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완안종망과 금나라에서 곽약사는 확실히 송휘종에게만큼 총애를 받지 못했다. 사실상, 송나라를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곽약사가 한 주요역할은 참모역할이었다. 그가 기대했던 것처럼 부대를 지휘하는 군권을 갖지 못했다.

금나라사람들은 겉으로는 곽약사를 아주 중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때 그에게 '완안'이라는 성을 하사했다. 그러나 그들은 곽약사가 실제 군권을 쥐는데에는 상당히 민감했다. 그들이 곽약사의 배신의 또 다른 피해자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완안종망이 한번은 곽약사로 하여금 천명의 기병을 이끌고 길잡이를 하게 했다. 이는 전성기때 근 10만의 부대를 이끌던 곽약사에게는 아주 불만스러운 일이었다. 병력이 적다고 여겨서 명을 받아 출발하지 않으려 하자, 완안종만이 곽약사를 다독인 방식은 그에게 다시 1천명을 추가해주었을 뿐이다.

곽약사는 그래도 공신이고, 금나라에서 기껏해야 그의 군권을 빼앗았을 뿐이다. 그러나 상승군의 최후는 처참했다. 금군이 북송을 멸망시키는 전투에서 완안종망은 핑계를 잡아 상승군에게서 무기를 회수하고, 편제를 취소한다. 그리고 동북의 고향으로 돌려보낸다. 그저 곽약사등 몇명의 고위장군들만 남겼을 뿐이다.

상승군내에 스스로 공신이라 자처하는 장교들은 무슨 상황인지 이해를 하지 못해서, 완안종망에게 달려와서 따졌다. 완안종망은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이들에게 물었다: "천조제가 그대들에게 어떻게 대해주었던가?" 장교들이 답했다: "천조제는 우리에게 아주 잘 대해주었습니다." 다시 물었다: "송나라의 조황제는 어떠했는가?" 다시 대답한다: "조황제도 우리를 잘 대해주었습니다." 완안종망은 얼굴을 굳히면서 말한다: "천조제도 너희를 잘 대해주었는데 너희는 천조제를 배신했다; 조황제도 너희를 잘 대해주었는데 너희는 조황제를 배신했다; 내가 너희에게 금과 비단을 내리면 너희가 분명 나를 다시 배신할 터인데, 나는 너희들을 쓰지 않겠다." 상승군의 장교들은 그 말을 듣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흩어졌다.

상승군의 병사들이 동북으로 돌아가는 길에 완안종망은 매복을 설치해서, 무기를 소지하고 있는지를 검사한다는 명목으로 8천명을 일망타진한다. 부대를 따르던 가족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조리 죽여버린다.

이렇게 하여 북중국무대에서 수년간 활약하고, 일찌기 요, 금, 송의 3대제국의 흥망과정에 관건적이지만 자랑스럽지 못한 역할을 하던 상승군은 참초제근(斬草除根)식으로 역사에서 소멸해버리게 된다.

곽약사의 이때 심정은 아마도 토사호비(兔死狐悲)였을 것이고, 더욱 큰 것은 그래도 살아남아서 다행이라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곽약사가 요나라를 배신하고, 송나라를 배신할 때의 웅심이나 야심은 금나라의 칼날아래서는 일찌감치 조그만치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1132년 가을, 즉 곽약사가 금나라에 투항한지 7년째 되는 해, 곽약사는 돌연 감옥에 갇히게 된다. 구체적인 원인은 사서에 명확히 나와 있지 않다. 아마도 '막수유(莫須有)'일 것이다. 나중에 석방되기는 했지만, 그의 가산은 당시 금나라의 권력자였던 완안종한(完顔宗翰)이 가져가 버린다. 반평생 고생하며 모았는데 말년에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곽약사는 이때부터 우울하게 지내다가 생을 마감하게 된다.

<대금국지>는 이에 대하여 이렇게 평론한다: "대금은 미봉책으로 그를 기용했지만, 그 마음에 대해 어찌 의심하지 않았으랴. 처음에는 상승군의 무기, 말을 빼앗아 해산시키고, 이어서 그의 가산을 빼앗아 몰수했다. 곽약사는 죽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다. "

그렇다. 대금국은 최소한 곽약사의 목숨을 빼앗지는 않았다.

<금사>는 곽약사의 일생에 대하여 아주 멋지게 평론한다: "곽약사라는 사람은 요나라의 여얼(餘孼)이고 송나라의 여계(厲階, 화근이라는 의미임)이고, 금나라의 공신이다. 한 신하의 몸으로 삼국의 화복에 기여한 것이 이처럼 서로 다르다."

그 시대에 금나라는 유가에 기초한 정치윤리가 발전되어 있지 않았다. 또한 건륭시기처럼 공개적으로 <이신전(貳臣傳, 두 나라를 섬긴 신하. 즉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귀순한 신하를 가리킴)>을 쓰진 않았다. 그러나 곽약사같은 사람에 대한 혐오와 경계는 청나라때보다 훨씬 강했다. 만일 청나라때였다면 윤리적으로 질책하는 정도였겠지만, 금나라때는 참초제근하여 뿌리를 뽑아버렸다.

송나라는 더더욱 졸렬한 역할을 했다. 요나라를 배신하고 공나라에 귀순한 마식(馬植, 나중에 趙良嗣로 개명함)에서부터 요금송 세 나라를 오간 장각과 곽약사까지, 송나라는 그 시대에 이들 투항한 장수들을 받아들여 활용하는 수완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시 송나라에 등을 돌리게 된다.

도의적으로 말하더라도 송나라가 곽약사보다 나은 점이 없다.

곽약사의 아들 곽안국(郭安國)을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곽약사는 비록 일생동안 금나라에서 중용되지 못했지만, 곽안국은 해릉왕(海陵王) 완안량(完顔亮) 시대에 신속히 떠오른 정치스타가 된다. 완안량은 곽안국이 '장수집안의 자제'라는 신분을 이유로 그에게 병부상서의 관직을 주었다. 송나라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곽안국의 모습을 보면 입을 잘 놀리는 아첨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쟁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그는 완안량에게 글을 올려 이렇게 말한다: "황상꼐서 사전에 준비해주십시오. 조구(송휘종)를 포로로 잡은 후, 그를 어디에 가둬두면 좋겠습니까?"

이런 말을 완안량은 당연히 듣기 좋아한다. 이런 점을 보면 관리로서는 곽안국이 부친 곽약사보다 뛰어난 소질을 보였던 것같다.

곽안국의 최후는 이러했다. 완안량의 정변과정에서 피살된 후, 완안량의 총신잉었던 그도 자연히 같이 죽임을 당하게 된다.

글: 팽배신문(澎湃新聞)

요나라 보대4년(1122년) 구월, 대요제국의 "상승군(常勝軍)" 총사령관 곽약사는 탁주(涿州), 역주(易州) 두개 주를 바치면서, 부하 8천명을 이끌고 송나라에 투항한다.

일찌기 동북아를 웅패했던 대요제국은 이때 이미 국력이 쇠퇴하여 위기에 처해 있었다.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가 1114년에 거병한 후, 여진기병의 말발굽이 대요제국의 절반을 짓밟고, 거란병사들은연전연패했다. 요나라의 천조제(天祚帝) 야율연희(耶律延禧)는 1112년 봄에 이미 협산(夾山, 지금의 내몽골 토목특좌기)으로 도망쳤다. 그리하여, 제국의 내부는 인심이 흉흉했고, 나라의 앞날이 보이지 않었다.

곽약사는 바로 그런 상황에 처해 있었다.

요, 금, 송의 3대제국이 서로 운명을 걸고 싸우는 시대배경하에서, 곽약사는 원래 별로 두드러지지 않는 보통사람이었다. 1116년, 즉 요금전쟁이 3년째 접어들고 있을 때, 사서에 곽약사의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 요나라가 동북에서 현지의 굶주린 백성들을 끌어모아 군대를 만들었는데, "원군(怨軍)"이라고 칭했다. 그리고 곽약사는 기껏해야 이 잡종부대의 장군중 한명이었다.

요나라가 전투에서 계속 패배하자, 전투력이 강하지도 않았던 이 잡종군의 지위가 크게 중요해진다. 그러면서 곽약사의 몸값도 올라간다. 세상에 영웅이 사라지니, 아무나 유명해지는 셈이었다. 게다가 곽약사는 이리저리 눈치를 잘 살피고 내부투쟁을 진행하는데 뛰어난 실력을 가졌다. "원군"은 정규군의 의미가 농후한 "상승군"으로 재편된다. 그리고 곽약사는 요나라조정에 의해 상승군의 '통령'으로 임명된다. 그는 요나라 군부내의 새로 떠오르는 인물이 된 것이다.

그러나, 곽약사가 요나라에서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1122년 사월, 남쪽에서는 송나라가 요나라를 공격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곽약사가 막 통령으로 임명되어 기세좋게 부대를 이끌고 북상하여 금나라와 일합을 겨루어 요나라의 사기를 끌어올리려고 하고 있었는데, 송나라가 갑자기 요나라를 공격한다는 소식에 곽약사는 남아 있던 희망이 사라진다고 느꼈다.

당시의 '국제정세'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알고 있겠지만, 요군이 금군과 단독으로 싸우는 것은 그럭저럭 가능한 상황이지만, 만일 송군까지 참전한다면, 송군이 아무리 전투력이 약하다고 하더라도, 요나라로서는 도저히 버틸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점을 눈치빠른 곽약사가 모를 리 없다. 하물며 곽약사는 비록 순수한 한족이 아니긴 하지만 그렇다고 거란인도 아니었다. 요나라에 대하여 그다지 생래적인 동질감같은 것은 없다. 제국의 앞날이 암흑천지라면, 그는 잡종군의 총사령관으로서 재빨리 배를 갈아타는 것이 좋다.

곽약사같은 배경을 가진 사람에 있어서, 그가 신봉하는 실력철학은 바로 손아귀에 병력만 가지고 있으면 어느 황제의 밑에 있더라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요나라라는 큰배가 침몰하기 직전이라면, 곽약사는 자신이 배바닥에 구멍을 몇개 더낸다고 하여 개의치 않는다. 그렇다면, 곽약사에게 남겨진 선택은 아주 간단하다. 둘중 하나이다: 송에 투항하느냐, 금에 투항하느냐.

몇달간 관망한 후, 곽약사는 과감하게 송에 투항하기로 결정한다.

만일 순수하게 계산적으로 보면, 곽약사의 선택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여진인의 금제국은 중천에 떠오른 해와 같고, 금나라의 철기는 천하무적이다. 그러나 송나라는 비록 천하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이기는 하지만, 전투력은 평범했다. 만일 곽약사가 강자에 의탁하려고 생각한다면 당연히 금나라가 가장 좋은 선택이다.

다만, 문제는 실력은 아마 곽약사가 고려한 것중 하나에 불과하고, 아마도 편안하게 살아오지 않았던 곽약사로서는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을 오히려 선호했을 수 있다. 송나라를 선택한 이유는 아마도 다음의 몇 가지일 것이다:

첫째, 송군이 비록 약하여, 요나라와 개전한 이래 이미 물에 빠진 개 신세인 요군도 이기지 못했지만, 그의 상승군은 능히 싸울 수가 있다. 곽약사가 자신의 상승군의 전투력은 너무 높게 스스로 평가했는지는 몰라고, 논리적으로는 이해가 된다. 송군이 잘 못싸울수록, 송나라는 곽약사와 그의 부대에 더욱 의존할 수밖에 없고 그에게 더욱 많은 봉록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반대로 그의 상승군이 금군에 무엇을 가져다 줄 수 있는가? 금나라에는 호랑지사가 많다. 곽약사가 없더라도 상관이 없다. 곽약사가 투항하더라도 그다지 많은 상을 하사받지는 못할 것이다.

둘째, 곽약사도 알고 있었다. 연운십육주(燕雲十六州)가 송나라와 송휘종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송나라를 도와 연운십육주를 회복하면 송나라에는 개세의 공을 세우는 것이 되어, 그로서는 제후에 봉해지고 재상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럼 한번 도박을 걸어볼 만하다.

셋째, 곽약사는 아마도 요나라가 멸망한 이후의 복잡한 정치국면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을 수도 있다. 곽약사는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 금과 송은 동맹을 맺었고, 금제국은 당시에 연운십육주에 대하여 그다지 크게 흥취를 나타내지 않았다. 그래서 요나라를 멸망시킨 후, 송나라와 다시 신속히 전투를 시작할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하물며, 전쟁을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상승군이 버티고 있지 않은가?

넷째, 곽약사는 아마도 약하기는 하지만 민족감정을 가졌을 수 있다. 그가 송나라에 투항할 때 조정에 올린 감정이 충만하고, 한족을 강조하는 항서를 보면 그러하다. 당연히 거기에는 연기하는 면도 없지 않겠지만, 혈통이 불명확한 곽약사는 그 자신을 스스로 절반의 한족이라고 여겼을 수 있다. 특히 그의 상승군내에는 한족의 비율이 아주 높았다. 송나라에 투항하는 것은 "해외의 떠돌이(遊子)가 나라로 되돌아가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이익충돌만 없다면,곽약사는 이런 민족주의적인 표현을 하는 데 전혀 반감이 없었다.

송나라에 투항한 후, 곽약사는 한때 매우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자신을 중흥명장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처럼 보였다.

곽약사의 개인적 군사생애에서 가장 빛나고 가장 체면이 상한 전투는 바로 소위 "연경(燕京)기습"이었다.

곽약사는 아마도 이소(李愬)가 눈오는 밤에 채주(蔡州)를 기습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같다. 송, 요 두 군대가 노구교의 양안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그는 아주 상상력이 풍부한 작전계획을 제시한다: "요군이 중병을 보내 나와 맞서싸우고 있으니, 분명 연산의 방어는 허술할 것이다. 만일 정예병사를 바로 연산성으로 보낸다면, 한족들은 송군이 왔다는 말을 듣고 반드시 성안에서 호응할 것이니, 연산을 함락시킬 수 있다."

기습의 전반부는 곽약사의 극본대로 진행되었다. 심지어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쉬웠다. 곽약사의 선봉은 일반백성으로 위장하여 손쉽게 연경성내로 잠입한다. 그리고 격전을 펼치지 않고 기본적으로 전체 성을 장악한다.

성공에 도취한 곽약사는 나중에 멍청하기 그지없는 것으로 증명되는 명령을 내린다: "한족의 투항만 받아주고, 거란인은 모조리 죽여라!" 솔직히 말해서 곽약사가 이렇게 하는 것은 정치적인 지조가 없는 것이다. 요나라는 어찌 되었던 자신의 고국이 아닌가. 개인의 공명을 위하여 투항한 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네가 일부러 예전에 같이 있던 사람들을 굳이 죽일 필요야 있겠는가. 다만 이건 아마도 거의 모든 역사상 투항한 장수들의 공통된 노선선택으로 보인다. 새 로운 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보이기 위하여 자신이 예전 나라와는 관계를 완전히 단절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리고, 투항후의 모종의 심리적인 왜곡으로 인하여, 적극적으로 새로운 나라의 군인들보다 더욱 잔인하게 살륙을 벌이게 된다. 오삼계(吳三桂)도 그러했고(영력제를 죽임), 곽약사도 그러했다.

이때 연경성에는 북요(北遼)의 소조정과 소태후(蕭太后) 외에, 적지 않은 거란인과 해인(奚人)이 있었다. 원래 대다수의 거란인과 해인들은 대세가 기운 것을 보고 저항할 의지같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곽약사의 군대가 연경성에서 정말 그들에 대한 대도살을 시작하자, 오히려 요행심리를 버리고, 죽기를 각오하고 곽약사의 군대에 저항하게 된다.

그리하여, 곽약사는 손쉽게 얻을 수 있던 승리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린다. 성안의 거란인들은 황궁을 지키고 있던 소태후를 보호하며 죽기살기로 저항했다. 곽약사의 군대는 이때 이미 승리를 거머쥐었다고 생각하여, 요나라의 잔여세력을 소멸시키는데 전력을 다하지 않고, 술을 마시고, 약탈하고 부녀자를 간음하느라 바빴다. 그리하여 요군에게 한숨돌리며 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그후 노구교의 전선에 있던 요군의 명장 소간(蕭干)이 병력을 이끌고 돌아와 오히려 송군을 기습한다. 그리하여 송군은 대패하고, 수천의 정예병사들이 연경성안에서 죽는다. 의기양양하던 곽약사는 낭패하게 부하들을 버리고 밧줄 하나에 의존하여 연경성밖으로 도망쳐야 했다.

초전에 승리를 거두고 나중에는 패배한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우세한 상황하에서 오히려 요군에게 역전을 당했다. 이런 곽약사가 무슨 명장의 반열에 들 수 있단 말인가.

고굉의(顧宏義) 선생은 <천열(天裂): 십이세기 송금화전실록>이라는 책에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이때 군대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은 악비(岳飛)도 연경기습전투에 참가했다. 송군이 대패한 후, 악비는 부친상으로 인하여 고향에 돌아가게 된다. 이는 악비가 참전한 평생 최초의 전투였다. 그리고 아마도 가장 형편없는 전투였을 것이다.

아마도 패전은 송군내에서는 항상 있는 일이어서인지, 곽약사는 그 후에도 관운이 형통했다. 그는 금방 대송의 연경지구 최고군사장관이 된다. 자세히 생각해보면, 송군의 당시 실력이나 사기를 보면, 연경이라는 최전선에 유명한 장수들은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았을 걳이다.

선화5년(1123년) 육월, 몇년전까지 잡종군의 소두목이던 곽약사는 송휘종의 명에 따라 조정에 들어가서 황제를 만난다. 곽약사는 동경 변량에서 대장군의 개선같은 최고의 예우를 받는다. 미국의 한학자 페트리샤 버클리 에브리(Petricia Buckley Ebrey, 伊佩霞, 1947- )가 <송휘종>이라는 책에서 쓴 바에 따르면, 송휘종은 귀빈의 예로 곽약사를 대했다. 확실히 송휘종은 그가 '당나라의 번장(蕃將)들 처럼 북방변경을 지켜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송휘종은 그에게 저택과 미녀를 하사한다. 그리고 곽약사를 데리고 변경에서 가장 유명한 황가원림 금명지(金明池)로 가서 용주(龍舟)경기를 관람하고, 곽약사를 궁으로 불러 특별히 그를 위해 준비한 주연도 베푼다. 주연에서 송휘종은 한가지 부탁해도 되겠는지 물어보고, 곽약사는 "죽음으로 보답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송휘종이 곽약사에게 요나라의 천조제를 생포하여 "연의 사람들이 절망하게" 만들어달라고 하자, 곽약사는 대단한 연기실력을 보인다. 그는 눈물 콧물을 흘리면서, "엣주인을 범할 수는 없습니다!"라는 이유를 대며 송휘종의 부탁을 거절하고, 다른 장수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게 해달라고 말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송휘종은 그를 질책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그가 옛주인을 잊지 않는 충신이라고 말하며, 오히려 상을 내렸다고 한다.

곽약사는 이런 행동으로 송휘종의 마음을 확실히 얻는다. 비록 곽약사가 정말 천조제에 대하여 어느 정도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지 여부는 알 수가 없지만, 그가 이전에 연경성을 기습하여 거란인을 도살한 잔인한 일면을 보면, 거짓으로 쇼를 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이런 우둔한 충성심을 보임으로써 황제의 환심을 사는 것은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수법이다. 안록산이 바로 그런 방식으로 당현종을 현혹하지 않았던가.

송 선화7년(1125년) 이월, 곽약사의 "엣주인" 천조제가 금군에 포로로 잡히고, 요나라가 멸망한다(여기에서는 야율대석의 서요는 고려하지 않기로 한다).

그 해 시월, 백전백승의 금군이 송나라를 공격한다. 곽약사는 연운십육주를 수복한 대공신에서 일거에 송군의 대금전선의 최선봉에 서는 대들보인 장수가 된다. 전체 대송은 곽약사의 상승군이 멋지게 싸워서 금군의 기세를 꺽어주기를 기대했다.

다만 대송조정이 곽약사에게 거는 기대가 이렇게 높았던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몇달 전, 송휘종의 측근중 가장 병법을 잘 안다는 환관 동관(童貫)이 곽약사의 군으로 가서 열병에 참석한 바 있다. 사람이라고는 없는 황야에서 곽약사가 동관의 앞에서 깃발을 한번 흔들자, "순식간에, 사방의 산에서 철기(鐵騎)가 나타나고, 그 수가 얼마인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곽약사의 이런 모습에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동관일행도 감탄을 한다. 그는 조정으로 돌아온 후 송휘종의 면전에서 곽약사를 "필능항로(必能抗虜, 반드시 오랑캐를 막아낼)"의 장수라고 극력 치켜세운다. 당연히 동관이 송휘종에게 말하지 않은 것도 있다. 곽약사가 자신을 만났을 때, 자신에게 공손하고, 심지어 자신이 부친을 대하는 예로 자신에게 큰 절을 올렸다는 것은.

송나라조정에 전해지는 한가지 전설이 있다. 금나라의 사신이 오는 길에 곽약사의 군대를 만났다. 감히 곽약사의 군대를 건드리지 못하고 도로 한켠으로 비켜주었다. 곽약사군은 대담하게도 사신단의 양을 빼앗아갔는데, 강인한 금나라사람도 감히 반항하지 못했다. 송나라조정의 이에 대한 이해는 곽약사의 "위명이 사방에 떨쳐지고 있다". 그가 있으면, 금군도 쳐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그리하여 송군은 더더욱 전쟁에 대비하는 준비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곽약사는 금군과 딱 한번 싸우고는 바로 투항해 버린다.

다만, 곽약사가 미리 투항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확실히 송나라를 위하여 큰 공을 세워 과관대작이 되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1125년 십이월, 즉 금나라와 송나라가 전쟁을 시작한지 석달째 되는 때, 곽약사는 4만5천의 군대를 이끌고 백하(白河)에서 금군을 맞이싸운다. 다른 것은 놔두고, 곽약사는 비록 절개가 없기는 하지만, 싸울 때는 위험을 무릅썼고, 군대의 전투력은 괜찮았다. 최소한 대다수의 송군보다는 몇단계 위였다. 전투중 곽약사는 정예기병을 이끌고 삼십리를 싸우며 금군의 군영으로 쳐들어간다. 금군은 버티지 못하고 퇴각했다. 그러나, 누가 생각이나 했으랴. 상승군내에 평소 곽약사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대장 장령휘(張令徽)가 중요한 순간에 부대를 버리고 도망친 것이다. 그리하여 송군의 전선이 붕괴된다. 곽약사는 이전에 연경을 가습하는데 성공한 후에 다시 실패했지만, 이번의 패배는 정말 그 개인의 책임은 아니었다.

이 전투가 끝난 후, 곽약사는 금군을 격패시키겠다는 자신감을 완전히 잃는다. 송나라에서 제후가 되고 재상이 되겠다는 야심도 물건너갔다. 사실상, 곽약사로서는 이때 금나라에 투항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상승군은 원래 "누구를 위하여 싸우든" 상관이 없었다. 대장기를 바꾸는데 익숙한 군대이다. 패전한 후 상승군은 투지를 완전히 잃었고, 내부의 여러 세력은 모두 각자 금나라에 투항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심지어 어느 상승군장수는 밀사를 금군의 총사령관에게 보내어, "살아있는 곽약사를 원하십니까. 죽은 곽약사를 원하십니까?"라고 묻기도 했다.

즉, 만일 곽약사가 금에 투항하면, 계속하여 상승군을 이끌면서 자신의 지위를 보전할 수 있지만, 만일 금에 투항하지 않겠다고 하면, 이 군대는 사분오열될 것이었다.

하물며, 곽약사는 송나라조정을 위하여 혈전을 끝까지 벌이면서 목숨까지 잃을 생각은 없었다. 싸워서 이길 수 없다고 생각되자, 그는 조그만치의 망설임도 없이 신속히 연경을 내놓고, 금군에 투항하기로 결정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금군의 총사령관인 완안종망(完顔宗望)은 항서를 받아들고 무슨 상황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며칠 전의 승리는 그저 요행때문인데, 어찌 바로 투항한단 말인가?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백하전투이후, 송휘종은 곽약사를 다독이기 위하여, 급한 마음에 곽약사를 "연왕(燕王)"에 봉하고, 또한 왕의 작위를 자손에게도 물려줄 수 있도록 하는 조서를 내려 곽약사의 투지를 불러일으키고자 했다. 그러나 조서가 경성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곽약사는 투항해버렸다.

곽약사가 금에 투항한 것에 관하여, 금군의 실력이 강하고, 곽약사를 우두머리로 하는 상승군이 원래 반복무상한 집단이라는 정치적 성격도 있었지만, 송나라조정 자신의 책임도 적지는 않다.

송휘종은 비록 곽약사를 아주 신임하였고, 하사품을 무수히 내렸지만, 송나라조정은 요나라에서 투항한 장수에 대하여 태도가 수시로 바뀌었다. 특히 1123년 연말의 "장각사건(張覺事件)"은 곽약사와 상승군을 크게 실망시켰다.

장각은 가장 유명한 요나라에서 투항해온 장수였다. 그는 먼저 금나라에 투항했다가. 다시 평주(平州)를 바치며 금나라를 배신하고 송나라에 투항해왔다. 원래 송나라는 그를 원하지 않았다. 그를 받아들이는 것은 공공연히 금나라와 척을 지는 일이었고, 금나라로 하여금 거병할 명분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송휘종과 신하들은 평주라는 영토를 탐내어, 장각의 투항을 받아준다. 장각이 금군에 패배하여 연경으로 도망쳐 오자, 금나라는 사신을 보내 송나라에 장각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송나라의 관리는 먼저 용모가 유사한 자를 내놓고 장각이라고 했으나, 금나라사람들에게 들통난다. 그러자, 담량이라고는 전혀 없는 송나라는 장각을 죽이고, 그의 수급을 금나라에 바친다.

신용도 없고 담량도 없는 이런 행동은 상승군으로 하여금 송나라를 멸시하게 만들었을 뿐아니라,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도 크게 우려하기 시작한다. 곽약사는 당시 이런 말까지 했다: "만일 약사를 내놓으라고 하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 그 말에 숨은 의미는 송나라는 믿고 의지할 큰 나무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금나라에 투항한 후, 원래 송나라를 정벌하는 전투에서 크게 전공을 세우고자 했던 곽약사는 할 일이 별로 많지 않았다. 그가 금군에 한 최대의 공헌은 바로 완안종망이 연경을 점령한 후 만족하여 회군하고자 했는데, 곽약사가 이렇게 건의한다: "송나라의 주력은 모두 하동에 있고, 하북의 땅에는 병력이 비어 있습니다." 이렇게 완안종망을 부추겨 변경까지 직접 쳐들어가자고 한다.

완안종망은 곽약사의 간언을 듣고 곽약사를 길잡이(響導)로 삼아 대거 남하한다. 고굉의는 <천열>에서 곽약사의 공로를 이렇게 설명한다: "곽약사는 송나라조정의 허실과 진위를 잘 알았다. 금나라가 군대를 이끌고 깊이 쳐들어와서 전승을 거두고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곽약사가 도와준 공이 크다." <송사>에 따르면, 금군이 변경을 포위한 후,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내는데, 에를 들어 손자를 욕하듯이 송나라조정을 질책한다든지, 방법을 바꾸어 각종 재물을 요구한다든지 이런 것들이 모두 곽약사의 아이디어라는 것이다. 이번에 곽약사는 완안종망의 앞에서 '옛주인과의 정'같은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그런 말에 속아넘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완안종망과 금나라에서 곽약사는 확실히 송휘종에게만큼 총애를 받지 못했다. 사실상, 송나라를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곽약사가 한 주요역할은 참모역할이었다. 그가 기대했던 것처럼 부대를 지휘하는 군권을 갖지 못했다.

금나라사람들은 겉으로는 곽약사를 아주 중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때 그에게 '완안'이라는 성을 하사했다. 그러나 그들은 곽약사가 실제 군권을 쥐는데에는 상당히 민감했다. 그들이 곽약사의 배신의 또 다른 피해자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완안종망이 한번은 곽약사로 하여금 천명의 기병을 이끌고 길잡이를 하게 했다. 이는 전성기때 근 10만의 부대를 이끌던 곽약사에게는 아주 불만스러운 일이었다. 병력이 적다고 여겨서 명을 받아 출발하지 않으려 하자, 완안종만이 곽약사를 다독인 방식은 그에게 다시 1천명을 추가해주었을 뿐이다.

곽약사는 그래도 공신이고, 금나라에서 기껏해야 그의 군권을 빼앗았을 뿐이다. 그러나 상승군의 최후는 처참했다. 금군이 북송을 멸망시키는 전투에서 완안종망은 핑계를 잡아 상승군에게서 무기를 회수하고, 편제를 취소한다. 그리고 동북의 고향으로 돌려보낸다. 그저 곽약사등 몇명의 고위장군들만 남겼을 뿐이다.

상승군내에 스스로 공신이라 자처하는 장교들은 무슨 상황인지 이해를 하지 못해서, 완안종망에게 달려와서 따졌다. 완안종망은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이들에게 물었다: "천조제가 그대들에게 어떻게 대해주었던가?" 장교들이 답했다: "천조제는 우리에게 아주 잘 대해주었습니다." 다시 물었다: "송나라의 조황제는 어떠했는가?" 다시 대답한다: "조황제도 우리를 잘 대해주었습니다." 완안종망은 얼굴을 굳히면서 말한다: "천조제도 너희를 잘 대해주었는데 너희는 천조제를 배신했다; 조황제도 너희를 잘 대해주었는데 너희는 조황제를 배신했다; 내가 너희에게 금과 비단을 내리면 너희가 분명 나를 다시 배신할 터인데, 나는 너희들을 쓰지 않겠다." 상승군의 장교들은 그 말을 듣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흩어졌다.

상승군의 병사들이 동북으로 돌아가는 길에 완안종망은 매복을 설치해서, 무기를 소지하고 있는지를 검사한다는 명목으로 8천명을 일망타진한다. 부대를 따르던 가족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조리 죽여버린다.

이렇게 하여 북중국무대에서 수년간 활약하고, 일찌기 요, 금, 송의 3대제국의 흥망과정에 관건적이지만 자랑스럽지 못한 역할을 하던 상승군은 참초제근(斬草除根)식으로 역사에서 소멸해버리게 된다.

곽약사의 이때 심정은 아마도 토사호비(兔死狐悲)였을 것이고, 더욱 큰 것은 그래도 살아남아서 다행이라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곽약사가 요나라를 배신하고, 송나라를 배신할 때의 웅심이나 야심은 금나라의 칼날아래서는 일찌감치 조그만치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1132년 가을, 즉 곽약사가 금나라에 투항한지 7년째 되는 해, 곽약사는 돌연 감옥에 갇히게 된다. 구체적인 원인은 사서에 명확히 나와 있지 않다. 아마도 '막수유(莫須有)'일 것이다. 나중에 석방되기는 했지만, 그의 가산은 당시 금나라의 권력자였던 완안종한(完顔宗翰)이 가져가 버린다. 반평생 고생하며 모았는데 말년에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곽약사는 이때부터 우울하게 지내다가 생을 마감하게 된다.

<대금국지>는 이에 대하여 이렇게 평론한다: "대금은 미봉책으로 그를 기용했지만, 그 마음에 대해 어찌 의심하지 않았으랴. 처음에는 상승군의 무기, 말을 빼앗아 해산시키고, 이어서 그의 가산을 빼앗아 몰수했다. 곽약사는 죽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다. "

그렇다. 대금국은 최소한 곽약사의 목숨을 빼앗지는 않았다.

<금사>는 곽약사의 일생에 대하여 아주 멋지게 평론한다: "곽약사라는 사람은 요나라의 여얼(餘孼)이고 송나라의 여계(厲階, 화근이라는 의미임)이고, 금나라의 공신이다. 한 신하의 몸으로 삼국의 화복에 기여한 것이 이처럼 서로 다르다."

그 시대에 금나라는 유가에 기초한 정치윤리가 발전되어 있지 않았다. 또한 건륭시기처럼 공개적으로 <이신전(貳臣傳, 두 나라를 섬긴 신하. 즉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귀순한 신하를 가리킴)>을 쓰진 않았다. 그러나 곽약사같은 사람에 대한 혐오와 경계는 청나라때보다 훨씬 강했다. 만일 청나라때였다면 윤리적으로 질책하는 정도였겠지만, 금나라때는 참초제근하여 뿌리를 뽑아버렸다.

송나라는 더더욱 졸렬한 역할을 했다. 요나라를 배신하고 공나라에 귀순한 마식(馬植, 나중에 趙良嗣로 개명함)에서부터 요금송 세 나라를 오간 장각과 곽약사까지, 송나라는 그 시대에 이들 투항한 장수들을 받아들여 활용하는 수완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시 송나라에 등을 돌리게 된다.

도의적으로 말하더라도 송나라가 곽약사보다 나은 점이 없다.

곽약사의 아들 곽안국(郭安國)을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곽약사는 비록 일생동안 금나라에서 중용되지 못했지만, 곽안국은 해릉왕(海陵王) 완안량(完顔亮) 시대에 신속히 떠오른 정치스타가 된다. 완안량은 곽안국이 '장수집안의 자제'라는 신분을 이유로 그에게 병부상서의 관직을 주었다. 송나라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곽안국의 모습을 보면 입을 잘 놀리는 아첨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쟁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그는 완안량에게 글을 올려 이렇게 말한다: "황상꼐서 사전에 준비해주십시오. 조구(송휘종)를 포로로 잡은 후, 그를 어디에 가둬두면 좋겠습니까?"

이런 말을 완안량은 당연히 듣기 좋아한다. 이런 점을 보면 관리로서는 곽안국이 부친 곽약사보다 뛰어난 소질을 보였던 것같다.

곽안국의 최후는 이러했다. 완안량의 정변과정에서 피살된 후, 완안량의 총신잉었던 그도 자연히 같이 죽임을 당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