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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후)

시중쉰(習仲勛)이 말년에 12년간 선전(深圳)에 거주한 내막은...?

by 중은우시 2024. 7. 24.

글: 왕우군(王友群)

2023년 10월 15일은 시진핑의 부친 시중쉰의 탄생110주년 기념일이다. 중국대륙에서는 여러 기념활동이 있었다. 여기에서는 시중쉰이 말년에 왜 12년간 선전에 거주했는지라는 이슈를 다뤄보기로 한다.

시중쉰은 중공의 제1대, 제2대 집단지도성원이다. 모택동이 집권했을 때, 시중쉰의 관직은 국무원부총리 겸 국무원 비서장이었다. 등소평이 집권했을 때, 시중쉰의 관직은 중공정치국위원, 전인대 부위원장이었다.

1988년 4월, 시중쉰은 제7대 전인대 부위원장이 된다. 그러나 그는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중도에 '퇴임'한다.

  1. 시중쉰이 선전으로 유배당하다.

전 전임대 법률공작위원회 연구실주임이었떤 가오카이(高鍇)의 회고에 따르면, 1990년 10월 30일, 시중쉰은 마지막으로 전인대 상무위원회 회의에 참석한다. 이날 그는 컨디션이 좋았고, 말도 많이 했다.

다만, 다음날, 전인대 상무위원회가 속개되었을 때, 대회부비서장은 이렇게 통보한다: 시중쉰 부위원장은 병환으로 인하여, 중앙에서 그가 남방으로 가서 휴양하는 것을 비준했다.

가오카이는 이렇게 썼다: 시중쉰은 이날부터 더 이상 전인대 상무위원회에 나오지 않았다. 비록 그의 임기는 1993년 3월까지였지만." 즉, 시중쉰은 임기를 2년5개월 앞두고 '퇴임'한 것이다.

1990년 10월부터, 시중쉰은 선전에 장기간 거주한다. 2002년 2월 병이 위중해지자 베이징으로 돌아와 치료받는다. 그는 선전에 12년간 거주했던 것이다.

시중쉰이 말년에 왜 선전에 12년간 머물러야 했을까?

근본원인은 당시 실제로 중공의 최고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등소평이 그를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왜 당시 등소평은 시중쉰을 용납하지 못했을까? 현실적인 원인도 있고 역사적인 원인도 있다. 개괄하자면, 주요 원인은 네 가지이다:

첫째, 시중쉰은 항상 반대의견을 가진 사라을 보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90년 10월 30일, 시중쉰이 조기 '퇴임'하기 전날, 전인대 상무위원회 회의에서 무엇을 말했는가?

가오카이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당시 서북지구에서 혁명했던 역사를 이야기했다. 각 근거지간의 관계는 아주 복잡했고, 어떤 사람은 서로 의심했으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다. 그는 아주 감동적으로 말했다. 전체적인 뜻은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반대파'로 보지 말고, 더더구나 '반동파'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반대의견도 보호하고, 반대의견을 중시하고 연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전에 전인대에서 시중쉰은 여러 차례 그의 부하들에게 말한 바 있다. 반대의견을 존중하고 보호해야 한다고.

한번은 <민법통칙>의 수정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시중쉰은 이렇게 말했다: "누구든 듣기 좋은 말, 자신의 의견에 찬성하는 말을 듣기좋아한다. 다만, 이런 말들은 많은 경우 거짓말이다. 어떤 경우는 아부이고, 어떤 경우는 그저 남들이 하는대로 따르는 것이다. 우리가 의견을 청취하는 목적은 원래 각종 보충의견을 수집하려는 것이다. 다만, 사라들은 비교적 날카로운 반대의견을 듣게 되면 왕왕 불쾌해 한다. '너 이 자식이 나를 망쳐!' 권력있는 사람이 이런 생각을 가지는 건 아주 위험하다."

그는 또한 이런 말도 했다: "나는 오랫동안 계속하여 한 가지 문제를 생각해왔다. 바로 어떻게 반대의견을 보호할 것이냐이다. 당의 역사를 보면, 반대의견이 일으킨 화가 너무 컸다. '반당연맹', '반혁명집단', '우경투항', '좌경투기'등등. 내가 겪은 것만 수십건, 백건이상이다. 다만 마지막에 조사를 끝내고 보면, 절대다수는 그저 반대의견을 제시한 것일 뿐이다. 사상문제에 속한다. 그리고 적지 않은 의견은 정확한 것이었다...내 생각에, <반대의견보호법>같은 것을 제정해야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어떤 상황하에서 반대의견을 제기하는 것을 허용하는지, 설사 제기한 의견이 잘못된 것일지라도 처벌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누군가 "어느 누구도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졌다는 것을 이유로 형벌에 처해져서는 안된다"는 의견을 제기했을 때, 시중쉰은 이렇게 말한다: "형벌에 처해지지 않더라도, 비투(批鬪), 금폐(禁閉), 강직(降職), 전보(調離), 제명(開除)등 처분이 있다. 내가 말하는 보호라는 것은 반대의견을 가진 자의 일체 권리를 보호하여, 형벌을 받지 않고, 기타 처분도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사람들이 마음놓고 의견을 제시할 수 있게 된다."

누군가 어떤 고위간부가 반당,반사회주의언론을 발표할 수 없다고 규정했다고 하자, 시중쉰은 이렇게 말한다: "이건 경계선을 긋기가 아주 어렵다. 예를 들어, 개혁초기, 내가 광동성에서 일을 했는데, 중앙에 경제특구를 설립하자고 건의했다. 당시 일부 사람들은 '해외자산계급에 투항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만일 현행정책에 다른 의견을 내는 것이 반당, 반사회주의라면 개혁이 가능하겠는가?"

1990년 10월, 시중쉰은 전인대 상무위원회 회의에서 반대의견보호를 크게 주장한다. 당시 실제 최고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덩샤오핑(鄧小平)으로서는 듣기 거북한 말이었을 것이다.

덩샤오핑도 말년에 "정어일존(定於一尊)"을 꾀했었다.

중공원로 천윈(陳雲)은 자주 다른 의견이나 반대의견을 냈다. 전 중공중앙총서기 자오쯔양(趙紫陽)에 따르면, 등소평이 보이보(薄一波)를 시켜 천윈에게 말을 전하게 한다: "이 당에 할머니는 함명만 있어야 한다." 그 뜻은 그가 의사결정권자라는 것이다.

2. 시중쉰은 덩샤오핑이 후야오방(胡耀邦)을 강제로 하야시키는데 반대했다.

1986년말, 문혁이 끝난 후 처음 민주를 요구하고 자유를 요구하는 학생운동이 일어난다.

덩샤오핑은 펑쩐(彭眞), 양샹쿤(楊尙昆), 왕쩐(王震), 보이보등 중공원로들과 학생운동이 발생한 책임을 당시 중공중앙총서기였던 후야오방에게 떠넘겼다. 그리고 비밀리에 결정한다: 후야오방을 하야시키기로.

1987년 1월, 덩샤오핑의 지시에 따라, 중공원로들은 소위 '민주생활회'를 개최한다.

후야오방의 비서인 린무(林牧)에 따르면, 회의에서 시중쉰은 보이보, 펑쩐, 왕쩐등이 후야오방은 하야해야 한다고 발언하는 것을 들은 후, 보, 펑, 왕등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희들 지금 뭐하는 짓이냐. 이건 '궁중정변' 그 장면이 아니냐."

그는 탁자를 내려치며 말했다: "이건 정상이 아니다. 생활회는 당의 총서기 거취문제를 토론하는 곳이 아니다. 이건 당의 원칙에도 위반된다. 너희가 이런 선례를 남기게 되면, 장래 당과 국가의 안전과 단결에 화근을 심는 것이 될 것이다. 나는 너희가 이렇게 하는 것을 절대 반대한다."

후야오방이 일어나서 그를 말렸다: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이미 생각을 마쳤읍니다. 저에게 하지 말라고 하시면 저는 사직하겠습니다!"

덩샤오핑은 비록 그 생활회를 소집했으나 그 생활회는 후야오방 총서기의 거취문제를 토론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실제상 그 생활회에서 토론한 것은 총서기의 거취문제였다. 그리고 생활회에서 최종결정까지 내려버렸다. 1987년 1월 16일 개최된 중공정치국확대회의에서, 후야오방은 사직의사를 전달하고, 회의는 후야오방의 사직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는 형식이었고, 기정사실을 확인하는 절차일 뿐이었다.

린무는 이렇게 말했다. 당장에 따르면, 중공정치국은 총서기를 파면하고 새로운 총서기를 선임할 권한이 없다. 왜냐하면 중공중앙총서기는 중앙전체회의에서 선출된 것이기 때문에 중앙전체회의만이 총서기의 거취를 결정할 권한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당장에 따르면, 덩샤오핑등이 후야오방의 퇴임을 압박한 것은 불법이다. 시중쉰이 말한 바대로 '궁중정변'이다.

3. 시중쉰은 덩샤오핑의 은퇴를 권했다.

1977년, 덩샤오핑은 문혁후에 다시 나왔을 때 나이가 이미 73세였다. 1987년 중공13대에 이르러 덩샤오핑은 이미 83세의 고령이었다.

덩샤오핑은 비록 여러번 신로교체(新老交替)를 얘기했고, 공개적으로 자신은 물러날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가 진심으로 물러나고자 한 것은 아니고, 계속 권력을 장악하고 싶었다. 그의 속마음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여러 경로로 덩샤오핑에게 남아 있어달라는 뜻을 표시했다.

린무에 따르면, 중공13대준비공작을 토론하는 정치국회의에서 후차오무(胡喬木)이 이런 말을 한다: "덩샤오핑은 우리 당의 제2대 지도자이다. 내 생각에, 우리 국가정치제도가 전환점에 서 있고, 덕망있는 지도자가 계속 우리를 이끌어 이 전환을 완성해야 한다. 이는 내가 강력하게 덩샤오핑이 13대에 계속 당중앙으로 유임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이유이다."

왕쩐, 양샹쿤, 펑쩐, 야오청즈(廖承志), 쑹런츙(宋任窮)등도 모두 후차우무의 의견에 동조했다. 후야오방, 녜룽쩐(聶榮臻), 시중쉰, 양더즈(楊得之), 우란푸(烏蘭夫), 니즈푸(倪志福)등은 모두 덩샤오핑이 물러나는데 찬성

시중쉰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제 한 정치학전문가와 얘기를 나누었다. 그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법치는 현대정부가 사회를 관리하는 가장 좋은 방식이다. 즉 우리가 곤경을 벗어나고 내일을 향해 나아가려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다. 오늘 이 회의는 바로 오늘과 내일간에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앞에는 두 개의 길이 놓여 있다: 하나는 계속하여 전지전능한 정부로 나아가는 것이고, 즉 '인치'의 옛날 길을 그대로 가면서 한 위대한 지도자의 명령에 의존하고, 계획에 따라 분배하고, 심지어 국가가 전매하는 방법으로 착취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지도자의 말씀을 학습하고 혹은 사상정치공작과 도덕교육을 통하여, 권력을 사적으로 이용하는 문제, 부패타락하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기율을 더욱 강화하여 사상, 이론, 문화계의 시비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하려고 한다면, 샤오핑이 백살까지 산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체제전환문제를 해결해내지 못할 것이다."

왕쩐은 시중쉰의 말을 끊으면서 말했다: "네 말은 권위를 부정하려는 것이냐. 샤오핑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냐?" 완리(萬里)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개인권위를 수립해서는 안된다. 집체의 권위를 수립해야 하고, 민주의사결정 과학의사결정의 권위를 수립해야 한다."

시중쉰이 이어서 말했다: "봉건전제가 혁명의 겉옷을 입고 완고하게 통치지위를 차지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지금부터 우리는 안치에서 법치로의 과도를 견지해야 한다. 법률앞에 만인평등을 견지해야 한다. 법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견지해야 한다. 개혁을 위하여, 전진과 발전을 위하여, 샤오핑이 앞장서서 당중앙에서 물러나야 하고, 은퇴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자손후대들에게 다시 한번 큰 공을 세우는 것이 될 것이다."

다만, 덩샤오핑은 물러나지 않았다. 1987년 중공13대에서, 덩샤오핑은 계속하여 중앙군사위주석을 맡아, '총부리'로 전당을 호령했다.

1989년 덩샤오핑이 20만군대를 동원하여 베이징에서 '6.4'천안문진압을 함으로써 그의 통치지위를 유지했다.

시중쉰이 덩샤오핑의 은퇴를 권유한 것도 분명 덩샤오핑은 불쾌했을 것이다.

4. 시중쉰과 덩샤오핑은 역사적으로 원한이 쌓여 있다.

1952년, 모택동은 5개 대구(大區)의 서기를 북경으로 불러들였다. "오마진경(五馬進京)"이라고 불리는 일이다. 그중에는 동북국 제1서기 가오강(高崗), 서북국 제2서기 시중쉰(제1서기 팽덕회는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시중쉰이 실제로 서북국의 업무를 주재하고 있었다), 서남국 제1서기 덩샤오핑, 중남국 대리제1서기 덩쯔후이(鄧子恢), 화동국 제1서기 요수석(饒漱石).

베이징에 들어온 후, 덩샤오핑은 정무원 부총리를, 시중쉰은 중공중앙 선전부장을 맡는다.

"오마진경"후 처음 숙청당한 사람은 가오강이다. 가오강이 북경으로 들어왔을 때 동북국 제1서기를 맡고 있었다. 다만 가오강은 서북지구에서 발전했고, 그와 시중쉰은 모두 섬북근거지의 창건자이다. 가오강도 서북국서기를 맡은 적이 있다.

1953년에서 1955년까지 모주석은 "고강,요수석반당연맹"비판운동을 할 때, 덩샤오핑이 중공중앙비서장, 중앙조직부장으로 모택동의 조수역할을 수행한다.

덩샤오핑은 모주석을 도와 가오강을 숙청하고, 가오강의 동북국 부하들까지 일망타진하며, 가오강의 서북국의 옛 부하들까지 타격을 크게 입는다. 시중쉰을 포함해서.

시중쉰은 이렇게 회고했다. 1955년, 그는 "고강과의 사이에 선을 확실히 긋지 않은 문제"에 대하여 중앙회의에서 반성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앞의 2번은 모두 통과되지 못했고, 세번째만데 겨우 통과될 수 있었다. 당시 시중쉰을 통과시키지 않은 사람이 바로 덩샤오핑이다.

가오강을 숙청하고, 시중쉰을 억누르면서 가장 큰 혜택을 본 사람이 바로 덩샤오핑이다.

1956년 중공8대에 덩샤오핑은 중공정치국상위, 중앙서기처서기, 중공중앙총서기로 당선된다. 시중쉰은 겨우 중앙위원이 된다.

1962년 모주석은 시중쉰이 소설 <유지단(劉志丹)>을 이용하여 반당했다는 핑계로, 그를 반당집단 두목으로 지목한다. 이때부터 시중쉰은 16년간 박해받는다. 모주석을 도와 시중쉰을 박해한 사람이 바로 덩샤오핑이다.

결론

1992년, 덩샤오핑이 남순하며 선전을 찾는다. 시간은 1월 19일부터 23일까지이다. 그동안 덩샤오핑은 시중쉰을 찾아가 만나지 않는다. 시중쉰도 덩샤오핑을 찾아가 만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당시에 선전영빈관의 서로 다른 건물에 있었다. 그러나, "닭이나 개가 짖는 소리도 서로 들을 수 있을 정도의 거리였는데, 끝까지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당시 덩샤오핑을 영접하고, 난감한 장면이 연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광동과 선전에서는 덩샤오핑이 도착하기 전에 미리 시중쉰을 잠시 선전에서 떠나도록 안배했다. 광저우로 며칠간 시찰을 다녀오게 한 것이다.

1990년 덩샤오핑에 의해 선전으로 유배된 후 1997년 덩샤오핑이 사망할 때까지, 7년간 시중쉰과 덩샤오핑이 만났다는 아무런 기록도 없다. 덩샤오핑이 사망할 때까지 시중쉰은 북경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상의 상황을 보면, 시중쉰은 당시 중공당과 국가지도자 중 한명으로, 전인데 서열1위의 부위원장으로서 임기를 채우지도 않았는데, 강제로 북경을 떠나도록 한 것은 분명 덩샤오핑의 결정이라 할 것이다.

시중쉰은 일생동안 세번 숙정당한다. 1935년, 중앙이 섬북에서 '숙반'을 진행할 때, 22세의 시중쉰은 처음 숙정당한다. 거의 생매장당할 뻔했다. 1962년 49세의 시중쉰은 두번째로 숙정당한다. 면직당하고, 조사받고, 갇히고, 시골로 쫓겨난다. 16년간 쫓겨나 있었다. 1990년때, 77세의 시중쉰은 세번째로 숙정당한다. 다시 강제로 관직을 잃고, 북경에서 쫓겨나 선전으로 유배간다.

시중쉰이 세번 숙정당한 경력을 보면, 특히 말년에까지도 숙정당했던 경력을 보면, 중공의 내부투쟁은 끝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