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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수호전

양산박의 최대파벌은....?

by 중은우시 2024. 6. 26.

글: 괴가(魁哥)

양산박은 왕륜(王伦), 조개(晁盖), 송강(宋江)이라는 세 명이 대채주(大寨主)들의 노력으로 규모가 갈수록 커지게 된다. 양산박은 왕륜시기에 오직 한명의 핵심만이 존재했다. 나머지 사람들인 두천(杜迁), 송만(宋万), 주귀(朱贵)들은 왕륜에게 모두 공손했다. 조개시기에 이르러, 전형적인 특징은 이원체제였다는 것이다. 즉 두 명의 핵심이 있었다. 각각 대채주인 조개와 이인자인 송강이었다. 이때의 양산박은 고속발전시기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다른 세력들을 흡수했다. 이를 통해 양산박의 실력을 증강시키는 동시에 서로 다른 파벌이 형성되어 내부적으로 분쟁이 일어나게 된다. 조개가 피살되면서, 송강은 양산박의 새로운 대채주에 오른다.

양산박 108호한들이 모였을 때, 여러 파벌이 있었다. 파벌이 난립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예를 들어, 송강파(宋江派), 노준의파(卢俊义派), 노지심파(鲁智深派)등등이다. 그렇다면 그중 실력이 가장 강한 파벌은 어디였을까? 송강파도 아니고, 노지심파도 아니며, 더더구나 양산원로파도 아니다.

우선 송강파를 살펴보자.

송강은 양산의 우두머리이다. 많은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송강파가 양산박에서 실력이 가장 강대한 파벌이고, 양산에 절대적인 지배력을 지녀, 양산박의 호한들을 호령하였을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았다. 송강파는 양산박 최대파벌이 아니었다.

송강의 심복은 적지 않다. 그중에는 오용(吴用), 이규(李逵), 화영(花荣)의 세명은 직계심복이고, 송강에 대한 충성심이 매우 강했다. 송강이 독살된 후, 오용과 화영은 자결했고, 이규는 송강이 독살당할 때 그에 의해 독살당한다.

오용, 이규, 화영의 세 심복외에도 송청(宋清)은 송강의 친형제이고, 공명(孔明), 공량(孔亮)은 송강의 제자이다. 자연히 송강의 직계이다. 그러나, 송청, 공명, 공량 세 사람은 모두 무력이 형편없었다. 전투력에서 양산박에서 꼴찌에 가깝다. 그리하여 송강파는 양산박에서 실력이 가장 강대한 파벌이라고 할 수가 없다.

다음으로 노시심파를 보자.

노지심은 양산박에 들어오기 전에, 이룡산(二龙山)의 우두머리였고, 삼산취의(三山聚义)떄의 큰형님이다. 이룡산의 실력은 아주 강했다. 양산에 가맹한 11개의 산적무리들 중에서 가장 강대했다. 법사 번서(樊瑞)를 보유한 망탕산(芒砀山)조차도 이룡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이룡산의 세 두목은 노지심, 무송(武松), 양지(杨志)이다. 이들이 힘을 합치면 실력이 너무 강대하다. 송강은 노지심을 만난 후, 그에게 "나의 스승(吾师)"이라고 존칭한다. 노지심파벌에는 세 두목외에 손이낭(孙二娘), 장청(张青), 조정(曹正), 시은(施恩), 사진(史进), 주무(朱武), 주통(周通)등이 있다. 노시심파는 양산박에서 비교적 실력이 강대한 파벌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여전히 양산박 최대의 파벌이라 할 수는 없다.

양산원로파를 보자.

양산원로파는 임충(林冲), 두천, 송만, 주귀의 왕륜시대부터 있던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 4사람 중에서, 가장 전투력이 뛰어난 사람은 임충이고, 나머지 세 사람은 형편없다. 양산박에서의 지위도 갈수록 내려갔고, 대취의때, 두천은 서열 83위, 송만은 서열 82로 모두 뒤쪽이었다. 주귀는 92위였다. 오직 임충만이 서열 6위에 오른다. 다만 임충은 반드시 두천, 송만, 주귀등과 같은 마음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양산원로파는 분명 양산박에서 실력이 가장 강한 파벌이 아니다.

양산박에서 실력이 가장 강대한 파벌은 항장파(降将派)이다.

항장파는 어느 한 거물이 주도하지 않는다. 다만 공동의 신분이 있고,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함께 모였다. 이들이 양산박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아주 크다. 예를 들어 마군오호장(马军五虎将)은 모두 원래 조정관리들이었고, 모두 체제로 복귀하고자하는 마음이 있었다. 양산박의 마군오호장중에서 관승(关胜)은 양산박에 가담하기 전에 포동순검(浦东巡检)이었고, 임충(林冲)은 양산에 오르기 전에 팔십만금군창봉교두(八十万禁军枪棒教头)였으며, 진명(秦明)은 양산에 오르기 전에 청주지휘사통제(青州指挥司统制)였고, 동평(董平)은 양산에 오르기 전에 동평부병마도감(东平府兵马都监)이었으며, 호연작(呼延灼)은 여녕군도통제(汝宁郡都统制)였다.

이 다섯 명 중에서, 임충만이 스스로 양산에 올랐고, 나머지 4명은 송강과 전투중에 생포된 후, 송강의 권유로 투항한 것이었다. 송강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단지 간신에게 모함을 받아서, 잠시 양산에 올라온 것이다. 장래 언젠가 조정의 초안(招安)을 받아, 조정으로 복귀할 것이다. 송강의 말은 관승등의 마음을 흔들었고, 그들은 결국 송강에 투항하였다.

마군오호장외에, 양산팔표기(梁山八骠骑)중의 서녕(徐宁), 색초(索超), 장청(张清)도 항장파에 속한다. 십욕소호장(十六小彪将)중에도 항장파가 적지 않다. 예를 들어, 황신(黄信), 선찬(宣赞), 학사문(郝思文), 한도(韩滔), 팽기(彭玘), 선정규(单廷圭), 위정국(魏定国)등이 그들이다.

조정항장파들은 지위도 높고 권한도 컸다. 사람수도 많았다. 만일 이들이 힘을 합친다면 송강조차도 어쩔 수 없을 정도이다. 그저 다독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항장파는 양산박에서 실력이 가장 강대한 파벌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송강이 나중에 초안을 극력 주장하고, 순조롭게 초안에 응할 수 있었던 원인이다. 양산박의 조정항장파는 주도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었고, 모두 초안을 지지했다. 송강도 조정항장파에 영합하기 위하여, 조개의 전략을 바꾸어 조정에서 초안을 받아주도록 계속 핍박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