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정치/중국과 일본

잘못된 국가전략은 어떻게 수립되는가?

by 중은우시 2024. 5. 22.

글: 사로(思芦)

호타 에리(堀田江理)의 <일본 1941>은 일본이 1941년 미국에게 선전포고하는 정책결정의 내막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의 진주만기습은 전술적으로 성공이지만, 전략적으로 실패였다. 잘못된 결정은 세 가지 요인이 있었다: 첫째, 강경한 여론. 국가가 여론을 선동하다가, 여론이 국가를 압박한 것이다. 소는 꼬리를 흔들 수 있지만, 꼬리도 소를 흔들 수 있다. 둘째, 중하층 매파장교들이 추진했다. 셋째, 아무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았고, 서로 책임을 떠밀었다. 차량이 심연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데, 아무도 브레이크를 밟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큰 배를 차라리 침몰하더라도, 자신이 먼저 물에 빠져죽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이런 말이 있다. 세 명의 참모면 제갈량과 맞설 수 있다. 다만 잘못된 체제와 의사결정매커니즘하에서는 세 명의 제갈량도 한명의 참모를 당해낼 수 없다. 서로 책임을 미루면 아무 것도 이루어낼 수 없다. 한명한명은 모두 총명하지만, 함께 모이면 멍청한 결정을 내려버리게 되는 것이다.

대다수의 일본지도자들은 그 체제와 문화로 인하여 공개적으로 충돌하는 것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말을 할 때 우회적으로 한다. 특히 공개된 장소에서 여하한 연약한 모습도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설사 그들이 심각하게 우려하는 바가 있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공개적으로 전쟁선포에 반대하는 말은 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왜 같은 사람들이 시간, 장소, 경우에 따라, 전쟁을 지지하기도 하고, 전쟁을 반대하기도 했는지를 설명해준다. 예를 들어, 정부와 군사고위층의 회의에서는 전쟁을 지지하지만, 사적으로는 전쟁을 하지 않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드러낸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그런 의견을 제시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일본관리들은 개인이 책임지는 것을 겁낸다. 그래고 공공연히 소수의견을 제기하지 못한다. 차라리 좋지 않은 집단합의를 선택한다. 수상인 고노에 후미마로(近卫文麿)와 해군대신 오이카와 고시로(及川古志郎)는 서로 책임을 떠넘겼고, 아무도 용기있게 공개적으로 전쟁을 피하자고 말하지 못한다. 해군차관 사와모토 요리오(泽本赖雄)는 이렇게 회고한다: 개전하기로 의사결정되자, 나는 깜짝 놀랐다. 그래서 오이가와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는 자신도 전쟁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군대의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남진제안이 통과된 것에 대하여 우려를 표하고 있었고, 다수의 해군장교는 독자적으로 영국과 미국의 해군과 바다위에서 전쟁을 벌여야한다는 것에 대하여 전율하고 있었다.

2차대전전에 일본은 아주 강렬한 민족주의정서를 가지고 있었다.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성공적으로 굴기하면서, 비록 세계강국에 들기는 했지만, 서방국가로부터 존경을 받지는 못하고 서방국가로부터 고관세의 압박을 받고 있다고 여겼다. 서방은 민주자유를 지지하면서 일본이 강대해지는 것을 반대한다고 여긴다. 서방음모론이 민간에서 성행했다. 예를 들어 일본은 미국, 영국, 중국, 네덜란드의 포위에 빠졌다고 말했다(소위 ABCD포위망. 네 나라의 영문 첫자에서 따온 것이다). 자기비하고 자존심으로 자신이 서방인종주의의 차별을 받는다고 여겼다. 청일전쟁후, 중국과 일본은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한다. 중국은 타이완과 요동을 일본에 할양했다. 나중에 독일, 러시아, 프랑스의 삼국간섭으로 일본은 요동반도를 중국에 돌려주어야 했다. 역사상 삼국간섭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1919년 1차대전때 파리평화회의에서 독일은 산동의 권익을 일본에 넘겨주고, 중국에서는 5.4운동이 발발한다. 1922년 워싱턴회의에서 서방각국의 압력하에 일본은 산동을 중국에 돌려주어야 했다. 일본은 두 차례에 걸쳐 서방열강의 압박하에 이미 입에 넣었던 고기를 토해내야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서방에 강렬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1937년 미쓰비시가 제작한 카미카제전투기가 처음 비행에 성공하고, 완전국산화했다고 자랑하면서, 전국민의 애국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모두 거의 미친 듯한 자신감이 넘쳤다. 비록 극단민족주의분자들이 아직 일본을 완전히 통제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극단민족주의의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일본지도자들이 1941년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다른 목소리를 내게 해서는 안된다. 비록 918사건의 진상을 알지만 주류매체는 소식을 봉쇄하는 것을 선택한다. 중국에서 폭파했다고 선전하면서 전적으로 관동군을 지지하는 성명을 냈다. 눈사태가 났을 때 그 어느 눈덩이도 무고하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원자폭탄의 아래에 억울한 원혼은 없다. 이러한 기본판에서는 이어서 다가오는 고난을 맞이하게 될 뿐이다.

세번째 원인은 상층부의 의사결정에 중하층관료들이 주도했다는 것이다. 중하급장교들이 중대한 국가의사결정을 주도한 것이다. 러일전쟁과 청일전쟁은 모두 이렇게 일어났다. 중하층의 강경한 매파에는 다나카 신이치(田中新一), 사토 겐료(佐藤贤了), 이시가와 신고(石川信吾, 자칭 일본을 전쟁의 길로 이끈 인물), 이시와라 간지(石原莞尔), 오카 다카즈미(冈敬纯)등이 있다. 육군성의 이시이 아키호(石井秋穗)는 이렇게 회고한다. 진주만기습전의 관건적인 몇달동안, 그와 그의 동료들은 일찌기 큰 권한을 장악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비록 우리는 매우 멍청했지만, 적극적으로 나서기만 하면, 우리가 중대한 정책을 좌우할 수 있었다." 군령총장 나가노 오사미(永野修身)는 이런 말을 했다: "하급관리들이 상황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어서, 우리는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중하급장교들은 맹목적이고 스스로를 과대평가했다. 그리하여 부서이익에 눈이 가렸고, 전면적인 정보는 부족했다. 그들은 맹목적으로 정책을 주도했고, 마치 맹인이 눈먼 말을 타고 야밤에 늪으로 들어가는 것같았다.

네번째 원인은 의사결정매커니즘이다. 어전회의(御前会议)는 의사결정자와 책임자가 분리된 기괴한 최고의사결정기구였다. 천황의 허가는 그저 형식이었고, 헌법의 구속도 받지 않았다. 다만 천황의 허가는 논쟁할 수 없는 권위를 지녔다. 어전회의에서 천황의 비준을 받으면, 정책결정은 신성한 색채를 띄게 된다. 정치지도자는 새로운 정책에 대하여 아무런 개인적인 책임도 지지 않는다. 이렇게 책임은 지지 않는 신성화는 중국양회의 의안통과와 유사하다. 개인이 책임지는 매커니즘이 없으므로, 읙사결정이 경솔하게 이루어진다. 9월 6일의 어전회의에서 대미개전을 결정한 것은 매우 서둘렀고, 신중하지 못했다. 도조 히데키(东条英机)와 천황은 서로 상대방이 반대해줄 것을 바랐다. 히로히토(裕仁) 천황은 우유부단하고 모순적이었다. 시가(诗歌)를 이용해서 함축적으로 찬성하지 않는다는 뜻을 표시했다. 어전회의에서 신성화된 후에는 남진정책을 뒤집기가 아주 어렵게 되어버린다.

역사는 항상 거울같은 모습을 드러내며, 계속하여 재연된다. 오늘날의 중국과 2차대전전의 일본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예를 들어, 의사결정매커니즘, 체제, 여론분위기, 여론환경, 최고지도자의 우둔함, 심지어 일대일로와 대동아공영권까지 일맥상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