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우문화급(宇文化及): 수양제(隋炀帝)를 죽인 인물의 일생

중은우시 2024. 5. 3. 15:48

글: 사설신어(史说新语)

고대에 황권은 지고무상으로 황제는 천하의 최고통치자일뿐아니라, 사람들이 눈독을 들이는 무수한 특권을 누리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무수한 사람들은 황위를 차지하기를 꿈속에서까지 추구하고, 심지어 목숨을 댓가로 내놓기도 한다. 모든 왕조에서는 황위를 둘러싼 명쟁암투가 벌어지고, 형제간에 반목하고, 부자간이 원수로 되는 비극이 무수히 발생했다.

풍운이 일어나는 궁정에서, 이런 인물이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황제의 곁을 지켰고, 황제의 신뢰를 깊이 받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내심의 욕망은 계속 팽창했다. 그는 더 이상 단지 황제의 신하로 지내는데 만족하지 못했고, 더 많은 권력과 지위를 갖기를 갈망했다.

마침내, 어느 어두운 밤, 그는 오랫동안 준비해왔던 계획을 실행한다. 그는 자신의 직권과 황제의 그에 대한 신임을 이용하여, 암중으로 궁중정변을 일으킨다. 혼란과정에서 그는 직접 황제의 목숨을 끊고, 기회를 틈타 황후를 차지한다. 이렇게 하여 그는 혼자의 힘으로 황위를 찬탈하고 새로운 황제에 오른다.

다만, 그의 찬위는 천하인의 분노와 반항을 불러왔다. 각지에서 반란과 의병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났다. 그의 통치는 위기에 처한다. 겨우 반년간 황제로 있다가 죽기 전에 천고의 명언을 남긴다.

  1. 군공세가(军功世家)

남북조의 역사 속에서 우문화급(宇文化及) 일가는 혁혁한 명문거족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북위(北魏), 북주(北周), 수(隋)의 흥망성쇠와 긴밀하게 관련이 있다. 비록 우문화급은 유명한 우문태(宇文泰)와 성이 같지만 두 사람은 아무런 혈연관계도 없다. 우문화급의 선조는 대대로 옥야진(沃野镇)에서 군주(军主)를 맡아왔고, 원래의 성은 파야두(破野头)인데, 나중에 우문(宇文)으로 성을 바꾸게 된다.

우문화급의 조부는 우문성(宇文盛)으로 전쟁터에서 명성을 떨친 장군이었다. 북위 말기, 그는 우문태를 따라 사방을 정벌하며,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우문성의 용맹과 지혜로 서위가 건립된 후에도 여전히 고위직을 누렸고, 동위의 고환과 대항하며, 소관, 홍농, 사원등지의 전투에서 크게 활약한다.

북주가 건립되자, 우문성은 더욱 잘나간다. 그는 하란상(贺兰祥), 우문헌(宇文宪)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전투에 참가했고, 토곡혼(吐谷浑)과 북제(北齐)를 토벌하는데 큰 전공을 세운다.

우문성은 전쟁터에서 용맹했을 뿐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뛰어난 지혜를 보인다. 권신들이 정치를 좌지우지하던 시대에 그는 성공적으로 여러번의 정치적 풍파를 견뎌내면서, 자신과 가족의 지위를 지켜낼 수 있었다.

북주의 권신 우문호(宇文护)가 대권을 독점할 때, 우문성은 그와 맞부닥치지 않고, 정적인 조귀(赵贵)의 음모를 신고하는 것을 선택한다. 이를 통해 우문호의 신임을 받는다. 이로 인하여 그의 아들 우문술(宇文述)은 우문호의 총애를 받는다.

우문술은 부친의 지혜와 용맹을 이어받았다. 그는 수나라의 건립과 통일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는 남진(南陈)을 평정하는 전쟁에 참여했고, 신속히 소헌(萧瓛), 소암(萧岩)의 저항을 진압한다. 이를 통해 수문제(隋文帝) 양견(杨坚)이 천하를 통일하는데 큰 공을 세운다.

남진의 멸망후, 우문술은 안주총관(安州总管)에 임명되고, 얼마 후 수주자사(寿州刺史)로 부임한다. 이번 부임으로 수나라의 역사는 생각지 못하게 방향을 바꾸게 된다.

우문술과 진왕(晋王) 양광(杨广)은 깊은 우정을 나누고 있었따. 양광은 우문술을 자신의 곁으로 부르기 위해, 수문제에게 주청을 올렸다. 그리고 우문술이 오면서, 양광은 태자의 자리를 빼앗는데 중요한 지지자를 얻게 되었고, 성공적으로 양소(杨素)등 조정의 권력귀족들을 설득할 수 있었고, 결국은 양광이 황위에 오르게 만든다.

수양제의 총애를 받는 신하로서 우문술은 관료사회에서 승진을 거듭한다. 그러나 그의 군사생에는 실패와 성공을 거듭하게 된다. 그는 토곡혼을 정벌하는 전투에서는 대승을 거둔다. 그러나, 고구려를 정벌하는 전투에서는 참패를 겪는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수양제의 마음 속에서의 지위는 여전히 굳건했다. 그는 황제에게 아부를 잘했고, 이를 통해 끝없는 총애와 영화부귀를 누린다.

수나라말기의 혼란한 시기에, 우문술은 수양제에게 강도(江都)로 피난할 것을 권한다. 이 건의를 수양제는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이후 강도에 머물게 된다. 우문술의 병이 위중할 때, 그가 유일하게 신경쓴 것은 자신의 장남 우문화급이었다. 그는 수양제에게 우문화급을 돌봐줄 것을 부탁했고, 수양제는 그의 요청을 받아들인다.

우문술이 세상을 떠난 후, 수양제는 그에게 극히 높은 영예를 내리고 융중하게 장례를 치러준다. 우문화급은 그의 부친이 원하는대 우둔위장군(右屯卫将军)

2. 권신의 길

우문화급은 우둔위장군에 임명된 후, 당시 수양제 양광은 이밀(李密)의 세력에 위협을 느끼고 강도로 몸을 피하게 된다. 그리고 경성으로 감히 돌아오지 못한다. 그의 금위군 장병들은 대부분 관중(关中) 사람이어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커서, 암중으로 반란의 기운이 돌게 된다.

무분랑장(武贲郎将) 사마덕감(司马德戡)이 금군을 지휘하며 동성에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었다. 그는 장병들의 불안한 정서를 눈치챘고, 동시에 원례(元礼)와 배건통(裴虔通)의 대화를 엿듣게 된다. 두 사람은 장병들이 도망갈 뜻을 가지고 있고, 가족의 안위를 걱정한다고 말하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곤란한 입장이라는 얘기를 한다. 사마덕감은 대화에 끼어들어, 자신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현재의 곤경에 대한 우려를 표시한다.

반란계획이 점차 무르익자, 우문지급(宇文智及)도 가담한다. 그들은 군마강탈과 주민의 재물을 확보하여 비상시에 대비할 것을 상의한다. 우문지급은 더더욱 호언장담한다. 그가 기회를 틈타 깃발을 들고, 대사를 도모할 것이며, 제왕의 대업을 이룰 것이라고. 최종적으로 그들은 우문화급을 총사령관으로 추대하여 거병하게 된다.

우문화급은 처음에 이 일을 듣고 놀라서 어쩔 줄 몰랐다. 그러나 결국은 설득당해 반란에 동의하고 참여하게 된다. 대업14년 삼월 초하루, 사마덕감은 반란건을 공개한다. 장병들의 결심을 굳건히 하기 위하여 그는 의정(医正) 장개(张恺)를 시켜 소문을 퍼트린다. 수양제가 연회를 개최하여 장병들을 독살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은 장병들로 하여금 더더욱 반란에 가담한 결심을 굳히게 만든다.

삼월 십일, 사마덕감은 부하들을 소집하여, 반란계획을 선포한다. 그날 저녁, 봉의(奉义)와 배건통이 성문을 열어 성밖의 반란군을 맞이한다. 수양제는 배건통에게 기만당하여 그저 초방(草坊)에 실수로 불이 난 것으로만 알았다.

오경이 되자, 사마덕감은 반군을 이끌고 황성에 들어서고, 궁문을 통제한다. 배건통은 반군을 이끌고 장군 독고성(独孤盛)을 죽인 후, 원례가 반군을 이끌고 내궁으로 진입한다. 이때, 내궁을 수비하던 병사들은 이미 모두 흩어져 도망쳤다.

배건통은 내궁에서 수양제의 행방을 수색하고, 결국 서각(西阁)에서 그를 찾아낸다. 배건통의 핍박에 수양제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라 경성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배건통의 완병지계(缓兵之计)였다.

날이 밝은 후, 맹병(孟秉)이 우문화급을 모셔오고, 우문화급은 승상(丞相)에 오른다. 반군은 수양제를 강도의 성문으로 끌로나와 그를 처결한다. 조정의 외척과 수나라에 충성하는 대신들도 도살을 당한다. 단지 진효왕(秦孝王)의 아들 양호(杨浩)를 남겨서 괴뢰황제로 세운다.

우문화급은 육궁을 차지한 후, 생활기거가 모두 수양제처럼 호화사치스러웠다. 다만 그는 정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고, 자주 침묵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조회가 끝나면 그는 봉의, 방유(方裕)등에게 상의해서 처리하게 했다. 서주가 물길이 통하지 않아 정체되자, 우문화급은 다시 부하를 시켜 백성들을 약탈하게 하여 우거(牛车)에 재물을 실었다. 그리하여 병사들은 무거운 짐을 날라야 해서, 원성이 자자했다.

사마덕감은 우문화급이 큰인물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또한 그의 주변에 소인들이 득실거리는 것을 보고, 부하장수들과 상의하여 우문화급을 제거하려 한다. 그러나, 정보가 누설되어, 사마덕감과 그의 일당은 잔혹하게 진압당한다. 이번 궁중정변은 우문화급의 승리로 끝난다. 그러나 이는 우문화급이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예시했다.

3. 황제에 오르고 허(许)나라를 세우다.

이때의 중원은 와강채의 이밀과 낙양의 월왕 양동(杨侗)간의 싸움이 치열했다. 여양(黎阳)은 이밀의 근거지였고, 원래 낙양으로 진입할 발판이 될 수 있었는데, 수나라의 정예군이 우문화급의 지휘하에 맹공을 퍼붓게 된다. 이로 인하여 이밀은 병력을 분산시킬 수밖에 없었고 ,앞뒤로 적을 맞이하는 곤경에 처하게 된다.

이와 동시에, 낙양성내의 양동도 어려운 선택을 해야 했다. 수양제의 손자로서, 그는 우문화급이라는 군주를 시해한 자에게 이를 갈고 있었다. 그러나, 이밀의 위협이 다가와 있었고, 그는 부득이 양자를 모두 방비해야 했다. 우문화급의 대군이 밀려오자, 이 둘은 난감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역사는 항상 극적이다. 이런 관건적인 순간에, 이밀과 양동은 서로 손을 잡기로 결정한다. 이들은 공동으로 우문화급에 맞선다. 양동은 이밀을 태위(太尉)로 임명하고, 그에게 병력을 이끌고 우문화급을 토벌하도록 수권한다. 이밀은 아무런 망설임없이 이 임명을 받아들이고, 대장부의 능굴능신의 기개를 보여준다.

이밀이 대군을 이끌고 우문화급에게 맹렬한 공격을 감행한다. 쌍방은 여양에서 엄청난 전투를 벌인다. 우문화급은 비록 용맹하였지만, 이밀의 교묘한 술수에 말려 계속 패배한다.

그의 부하장수 우홍달(于弘达)은 이밀에게 생포되고, 낙양으로 보내어져 온갖 고문을 당한다. 양식이 떨어지면서 우문화급의 군대는 곤경에 처한다. 그는 부득이 영제거(永济渠)를 건너야 했고, 한편으로 동산(童山)에서 이밀과 싸우면서, 다른 한편으로 양식을 긁어모아서 군대에 제공해야 했다.

하늘의 도리는 항상 존재한다. 우문화급의 폭행은 동군태수 왕궤(王轨)의 반항을 불러온다. 그는 우문화급의 착취와 압박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이밀에 투항하기로 선택한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우문화급의 대군은 졸지에 혼란에 빠진다. 무하장수들은 속속 왕궤를 본받아, 이밀에 투항한다. 우문화급은 어쩔 수 없이 잔여부대를 이끌고 위현(魏县)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위현에서, 우문화급은 절망적인 상황에 맞부닥친다. 그의 부하장수들은 속속 배신하여, 그를 고립무원의 지경에 처하게 만들었다. 비록 그는 잔혹한 수단으로 반란을 진압했지만, 이로 인해 인심을 잃게 된다. 우문화급은 자신의 말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술을 마구잡이로 마셨고, 매일 취생몽사하게 된다.

인생에 희망이 없을 때, 우문화급은 황당한 결정을 내린다. 그는 양호를 독살한 후, 자신이 황제에 오른다. 그리고 국호를 허(许)로 정하고, 연호는 천수(天寿)로 정한다. 스스로 황제에 오른 그는 천하인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다. 그의 황제시해앵위는 천하군웅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619년, 당(唐)의 장수 이신통(李神通)이 병력을 이끌고 우문화급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우문화급은 비록 죽어라 저항했지만, 결국 용맹한 당군을 당해내지 못한다. 그는 요성(聊城)으로 물러나 지켰고, 견고한 성을 근거로 당군의 공격을 막아내고자 했다. 이신통은 그러나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그는 승기를 타고 계속 추격하여, 요성을 포위공격한다. 우문화급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다.

이런 관건적인 순간에 두건덕(窦建德)이 부대를 이끌고 요성에 도착한다. 우문화급을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금은보화로 산동의 도적두목 왕박(王薄)을 유혹하여 성을 지키는 것을 도와달라고 한다. 그러나 왕박은 이익만 추구하고 의리는 없는 자였다. 그는 요성으로 들어온 후, 즉시 우문화급을 배반한다. 그는 성문을 열고 두건덕의 부대를 성안으로 불러들인다.

두건덕은 힘을 전혀 들이지 않고 우문화급, 우문지급 형제와 그의 일당을 체포하여 죽여버린다. 이렇게 허나라는 멸망한다. 단명왕조는 이렇게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결론

우문화급은 역사상 깊은 인상을 남긴 인물이다. 그의 일생은 마치 권력이라는 환영을 추구하다가 결국 권력의 최고봉에서 미끄러지면서 짧지만 현란한 일생을 끝내게 된다.

우문화급이 마침내 황위에 오르면서, 권력의 유혹은 그로 하여금 후궁에 빠지게 만든다. 특히 양광의 황후 소씨의 미모에 우문화급은 깊이 빠진다. 양광이 일찌기 걸었던 향락의 길을 우문화급도 소황후를 얻은 후 역시 걷게 된다.

그러나, 그는 양광처럼 오랫동안 황권을 누리지 못했다. 겨우 반년만에 그의 황위는 다른 사람에게 빼앗긴다. 목숨도 끝이 난다. 죽기 전에 그는 사람을 깜짝 놀라게 만드는 말을 남긴다: "사람은 다 죽는다. 왜 하루라도 황제가 되지 않을 것인가!" 이 말은 그의 권력에 대한 집착을 보여준다. 또한 그의 짦은 황제생애에 대한 만족감도 보여준다.

우문화급이 수양제의 신하일 때, 그는 소황후에게 깊은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가졌다. 매번 그녀를 볼 때마다 그는 마음이 흔들렸고, 스스로를 다잡지 못할 정도였다. 야사의 기록에 따르면, 우문화급은 영준하고 멋있었다. 소황후와의 사이에 아마도 어떤 감정이 있었을 수 있다. 그러나 수양제가 있기 때문에, 그들은 더 이상 선을 넘을 수 없었다.

우문화급이 마침내 수양제를 제거하자, 그는 즉시 사람을 보내어 소황후를 찾는다. 이때의 우문화급은 이미 아무도 그에게 도전할 수 없는 황궁의 주인이었다. 소황후는 즉시 그의 협박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녀는 한 가지 조건을 내세운다: 반드시 먼저 수양제를 안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어도 따르지 않겠다. 우문화급은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요구를 받아들여 수양제를 제대로 안장시킨다.

그후 소황후는 우문화급의 숙비(淑妃)가 되어 그의 총애를 크게 받는다. 우문화급은 한 여자만 사랑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는 소황후를 얻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수황후의 후궁들을 모조리 자신의 품에 거둔다.

그 시대에 여자의 지위는 낮았고, 그녀들로서는 살아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운이었다. 누가 황제이든 그녀들에게 큰 차이는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무도 우문화급의 행위로 인하여 그에게 보복하려하지는 않았다.

우문화급이 황위에서 지낸 나날은 길지 않았다. 그는 하루종일 향락에 빠져 있었고, 조정대사는 돌보지 않았다. 최종적으로, 그의 황위는 다른 사람이 빼앗아 간다. 생명도 끝이 난다. 우문화급은 수양제를 살해한 후 후세인들에게 천고의 죄인으로 보였고, 그의 이름은 영원이 역사의 치욕의 기둥에 새겨지게 되었다.

그의 일생은 깊은 역사적 교훈으로 충만했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권력은 양날의 칼이다. 그는 영광과 지위를 얻었을 뿐아니라, 훼멸과 재난까지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권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반드시 깨어있는 두뇌와 굳건한 신념이 있어야 한다. 그래여 불귀의 길로 들어서지 않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