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왕보신(王輔臣): 일생동안 7번의 배신, 강희제에 투항한 후 왜 자결하였을까?

중은우시 2023. 6. 23. 14:40

글: 진단설(震旦說)

 

스승이 어떤지에 따라, 닮은 제자가 나온다고 한다. 오삼계(吳三桂), 강양(姜瓖)이 왕보신에게 끼친 영향은 기실 그런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삼계는 처음에 명나라의 장수였다. 이자성(李自成)이 경성에 진입한 후, 그는 이자성에게 귀순하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자성이 그의 가산을 몰수하자, 다시 이자성을 배반하고 청나라에 귀순한다. 청나라가 천하를 평정한 후에는 다시 운남에서 청나라에 반란을 일으킨다. 계속하여 배반한 일생이라고 할 수 있다.

 

왕보신은 원래 농민군 출신이다. 고영상(高迎祥), 이자성의 휘하에 있었다. 그는 도박을 좋아하여, 자형을 죽여버린 후, 명나라의 대동총독(大同總督) 강양(姜瓖)에 투항한다. 이자성이 경성으로 진격하는 도중에, 강양은 투항을 선택하여, 왕보신은 다시 농민군에 들어간다. 오삼계가 청나라군대와 산해관으로 들어온 후, 강양은 다시 이자성을 배반하고 청나라로 투신한다. 그리하여 왕보신도 강양을 따라 청나라로 넘어온다. 강양이 다시 청나라를 배반한 후, 왕보신도 따라서 청나라를 배반한다. 그러나, 전투에서 패배하여 신자고(辛者庫)의 노비가 된다. 순치제때 왕보신은 다시 기용되어 오삼계의 수하가 된다. 그리고 그를 따라 미얀마(緬甸)로 진입하여, 남명의 영력제(永曆帝) 주유랑(朱由榔)을 생포한다. 강희제때 왕보신은 섬서총독(陝西總督)으로 있으면서, 중병을 거느리고 평량(平凉)에 주둔하고 있었다. 오삼계거 거병하여 청나라에 반기를 들자, 왕보신도 서북에서 자신의 병력을 거느리고 청나라에 반기를 든다. 그런데, 도해(圖海)와 주배공(周培公)이 협박과 회유를 하자, 다시 청나라에 귀순한다.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왕보신이라는 자는 강양, 오삼계를 따라 계속하여 배반하는 길을 걸었다. 이런 사람이 청나라에 중용되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설사 왕보신이 나중에 다시 강희제에게 귀순하였지만, 강희제는 그에 대한 경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그가 자결했기 때문에 집안을 보전할 수 있었지, 만일 그가 자결하지 않았더라면 조만간 강희제에 의해 멸문당했을 것이다.

 

1. 평량의 왕보신은 강희제에게 최대의위협이었다.

 

삼번의 난(三藩之亂)때, 많은 사람들의 눈길은 남방의 전장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강희제에 있어서, 장강(長江)이라는 천참(天塹)이 있는 한, 오삼계가 일시에 장강을 건널 수는 없었다. 그래서 오삼계 피부의 병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북의 왕보신은 언제든지 대군을 이끌고 평량에서 경성으로 쳐들어올 수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강희제에게는 심복대환이었다. 그리하여 강희제는 삼번의 난을 평정하려면 먼저 자신의 진영이 혼란스러워져서는 안되기 때문에, 왕보신을 안정시키는 것이야말로 강희제의 후방을 안정시키는 급선무였다.

 

당초 강희제는 직접 평량의 군권을 왕보신에게 넘겨주었고, 왕보신은 감격해 마지 않았다. 그러므로 역시 강희제가 나서서 수습을 해야 했다.

 

강희13년 왕보신은 강희제가 평량에 보낸 대학사 막락(莫洛)을 죽여버린다. 그때 막락은 섬서, 산서 두 성의 병마에 대한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왕보신이 막락을 죽인 것은 공공연히 강희제와 결별하고, 막락 휘하의 대군을 차지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으면, 이제 끝까지 가는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왕보신은 앞장서서 오삼계와 연락하면서, 두 차례에 걸쳐 오삼계를 따르고 청나라에 반기를 들겠다고 선언한다. 

 

그후, 왕보신은 차례로 면현(沔縣), 약양(略陽), 농남(隴南), 계주(階州), 휘현(徽縣), 진주(秦州)등지를 탈취한다. 그리고 평량의 각주를 점령한다. 기본적으로 서북왕(西北王)이라 칭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오삼계는 왕병번(王屛藩), 오지무(吳之茂)등에게 병사를 딸려보내 왕보신이 전체 농우지방을 탈취하는 것을 도왔다. 그러므로 만일 오삼계측에서 누군가 직접 경성으로 쳐들어간다면 그것은 분명 왕보신일 것이다.

 

그래서, 왕보신은 강희제에게 있어서, 순식간에 거대한 위협이 되어버렸다. 설사 나중에 왕보신이 다시 청나라에 귀순하기는 했지만, 강희제는 왕보신이 계속하여 청나라의 통치를 위협할 힘을 갖고 있도록 놔둘 수는 없게 되었다.

 

2. 왕보신을 회유한 것은 일시적인 미봉책이다.

 

강희제에 있어서 오삼계는 용서할 수 없는 원수이다. 그러나 왕보신은 아직은 회유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어느 것이 중요한지는 강희제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강희제는 위협과 회유를 동시에 진행하기로 한다. 한편으로, 왕보신의 아들 왕길정(王吉貞)을 돌려보내 부친을 설득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 도해, 주배공을 평량으로 보내 반란을 평정하게 한다.

 

당시 주배공의 카드는 괜찮은 편이었다. 먼저 왕길정이 그보다 먼저 가서 부친에게 얘기를 해놓았고, 뒤에는 도해가 대군을 이끌고 밀려오고 있었다. 그래서 주배공은 왕보신을 만나서 설득하는데 성공한다.

 

강희제가 왕보신에게 요구한 것은 가만히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강희제는 여전히 왕보신을 평량제독(平凉提督)으로 임명하고, 태자태보(太子太保)의 직위를 추가해준다.

 

강희제가 이렇게 했다고 하여, 그가 왕보신을 용서한 것일까? 당연히 아니다. 이건 단지 일시적인 미봉책일 뿐이다. 삼번의 난이 평정하는 동안에, 왕보신이 가만히 있다면, 강희제가 굳이 사람과 물자를 보내어 그를 토벌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일 뿐이다.

 

3. 왕보신의 죽음, 기실 강희가 만든 것이다.

 

왕보신같이 배반을 거듭하는 봉강대리(封疆大吏, 지방장관)에 대하여 강희제가 계속 그를 원래 직위에 놔둘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강희제는 다시 왕보신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다른 반란가담자들에게 왕보신을 모범사례로 보여주며 강희제에게 귀순하도록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강희제는 이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먼저, 왕보신을 원래 관직으로 복귀시키고, 여전히 봉강대리로 지내게 해주었다. 동시에 강희제는 도해를 보내어 왕보신과 함께 한중(漢中)을 지키게 함으로써 견제했다.

 

그 뜻은 명확하다. 사람을 붙여서 감시하겠다는 것이다. 그동안 왕보신은 자살시도를 한번 했다. 이것이 설명하는 것은 그가 비록 봉강대리의 직에 남아 있기는 하지만 이미 지내기 힘들어졌다는 것을 말해준다. 기본적으로 도해에게 연금된 상태라는 것이다.

 

강희제는 도해에게 왕보신을 죽이지 말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이런 대우의 원직복귀는 차라리 한칼에 죽는 것만 못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왕보신은 자신의 후사를 정리하기 시작한다. 그는 먼저 자신이 막 취한 어린 부인을 떠나보낸다. 그리고 자신의 가산을 옛날의 부하들에게 나누어주고, 그들에게 각자 갈 길을 가고, 이곳에서 자신에게 더 이상 연루되지 말도록 조치한다.

 

이를 보면, 강희제에게 귀순한 이후의 왕보신은 권력을 잃었을 뿐아니라, 자유도 잃은 것같다. 심지어 밤낮으로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상태였던 것이다. 그런 나날을 지내는 것은 너무 괴롭다. 가족들까지 연루시키지 않기 위하여, 왕보신은 자결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결론: 자결을 선택하여, 가족은 보전하다.

 

봉건시대에 잘못을 범한 많은 고관들이 선택하는 길은 자살이다. 그들이 보기에 자기 혼자만 죽으면 가족과 다른 사람들은 화를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왕보신도 그렇게 생각한 듯하다. 그가 자결을 선택한 후, 강희제는 과연 그의 가족들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왕보신은 자신과 강희제 두 사람의 체면을 살려주었기 때문이다.

 

왕보신은 강희제를 배반한 바 있다. 강희제는 인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그를 죽이지 않았다. 그러나 율법에 따르면, 그런 자는 반드시 죽여버려야 한다. 그래서 강희제는 곤란한 입장이었다. 왕보신으로서는 자결하는 것외에 강희제의 이런 진퇴양난의 곤경을 해결시켜줄 수 없었다.

 

기실 왕보신은 정말 길을 잘못 선택한 것이다. 당초 반청에 뛰어들지 말든지, 이왕 뛰어들었으면 다시는 뒤돌아보지 맣았어야 한다. 설사 패배하여 죽는 한이 있더라도, 최소한 당당할 수 있었다. 이처럼 계속하여 흔들리다가 죽는 것은 정말 못난 짓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