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우공행자(禹貢行者)
창춘(長春)의 거리를 걷다보면, 우리는 수시로 만주국시기의 고건축물을 볼 수 있다. 특히 창춘에 막 도착한 관광객이라면 창춘기차역 남광장을 지나자마자 만주국시기의 건축군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들중 어떤 것은 두드라지고, 어떤 것은 평범하지만, 하나같이 만주국통치자의 정치적의도를 드러내주고 있다. 필자는 일찌기 5차례에 걸쳐 창춘의 만주국건축군을 탐방한 적이 있는데, 여기저기 다니면서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1. 만주국건축물 배후의 이야기
창춘 길거리의 만주국스타일의 건축물들을 쳐다보면서 나는 만주국작가 고정(古丁)이 한 일본상인과 나눈 대화장면을 떠올렸다. 그때는 1943년인데, 고정은 나중에 일본문예사 사장이 되는 이케시마(池島)와 얘기를 나누면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일본이 아무리 강하다고 하더라도, 이곳의 모든 시설을 가져갈 수는 없을 것이다."
9.18사변후, 일본은 반년의 시간도 들이지 않고 동북지역 전체를 점령한다. 그리고 괴뢰황제 부의(溥儀)를 옹립하여 만주국을 건립한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건축물이 바로 만주국건축물이다. 만주국의 수도인 창춘은 당시에 신경(新京)으로 불렸고, 전체 만주국정부의 활동중심이었다.
고정의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은 제2차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 만주국도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이들 만주국의 건축물은 일본인들이 가져갈 수 없었고, 완벽하게 오늘날까지 남아 있게 되었다. 창춘의 크고 작은 길거리를 걸어다니다보면, 곳곳에서 각양각색의 만주국스타일의 건축물을 볼 수 있다.
비록 이들 만주국건축물은 모두 신분을 바꾸었고, 과거의 용도가 바뀌었지만, 그들 건축물에 새겨진 식민낙인은 아주 분명하다. 건축물은 한 시대의 부호이고, 역사가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남겨준 유산이다.
"대옥정(大屋頂), 원형의 광장(圓形的廣場), 두 줄의 가로수(兩排樹)"는 만주국시대의 모습이다. 기실 만주국시대의 건축물 특징이다. 당시의 일본침략자들은 전체 창춘을 미래의 중점이민도시로 만들고자 했다. 창춘의 굴기는 중동철로(中東鐵路)가 만들어지면서부터이다. 당시 창춘을 기준으로 하여 창춘이북을 '북만주'로 불렀고, 창춘이남을 '남만주'로 불렀다.
일본인들은 일찌감치 러일전쟁시기에 창춘이남의 중동철로부설권을 확실히 자신들의 손아귀에 장악해두었다. 그리고 저명한 남만(南滿)주식회사를 설립한다. 나중에 짜르가 무너지면서, 일본인은 점점 전체 중동철로의 권리를 차지한다. 동시에 만주국이 건립되면서, 일본이 고심해서 경영해온 창춘은 마침내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확실히 일본인들은 만주족의 고향인 심양(瀋陽)과 러시아인들이 오랫동안 경영해온 하르빈(哈爾濱)을 피해서 결국 창춘을 괴뢰정권의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일본인들은 서방의 도시지리학자인 Ebenezer Howard의 <전원도시>이론을 받아들여, 창춘을 이상적인 동북아대도시로 건설하고자 했다. 대량의 광장과 새로 지은 건축물이 창춘에서 차례로 건설된다. 이와 동시에, 대량의 인구가 창춘으로 이민오기 시작한다. 단기간내에 창춘의 인구는 기하급수적인 성장을 보인다.
2. 창춘에 흩어져 있는 만주국건축물
만주국건축물은 이런 역사배경하에 점진적으로 건설된 것이다. 신민대가(新民大街)는 창춘 만주국건축군중 가장 대표적인 장소이다. 만주국시기에 이곳은 "순천대가(順天大街)"로 불렸다. 현지인들은 이곳을 "팔대부(八大部)"라고 부른다. 즉, 만주국시기에 주요한 8개 국가기관들 예를 들어 문교부, 민생부, 외교부등이 있었다. 이 팔대부는 모조리 만주국 국무원이 관할했다.
신민대가에 서서 바라보면 이들 건축물중 대다수는 큰 지붕과 서양식건축물이 결합된 스타일이다. 이런 스타일은 건축학자들이 '만주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만주식의 건축물 특징은 각양각색의 건축형식이 혼합된 것이다. 중국, 일본과 서방의 건축요소를 결합시켰을 뿐아니라, 심지어 어떤 건축은 조선과 만주족의 건축양식을 가지고 있다. 기실 일본이 이렇게 한 이유는 바로 그들이 '대동아문화'사상을 추진하기 위함이었다.
기실 이런 '대동아'문화는 그저 일본 주도하로 피통치자들을 부리기 위하여 진행된 정치구호일 뿐이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아시아각국인민의 이익을 보호한다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최대한 일본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자신의 침략을 '정의'로 포장하기 위한 것이다. 일본침략자가 이런 소위 중서혼합의 건축물을 시도하게 된 것은 민중들의 이질감을 느끼지 않고 익숙하게 느끼게 하기 위함이었다.
창춘의 또 다른 만주국건축군이 세워진 곳은 창춘기차역부근이다. 즉, 오늘날의 창춘역 남광장 승리공원 북단이다. 1945년 만주국이 멸망하기 전에, 이곳은 일본 최초의 세력범위였고, 위에서 언급한 러일전쟁후 남만철로가 부설된 지역이었다.
1932년 만주국이 건립되기 전에는 기차역을 나서서 얼마 가지 않으면 바로 시골이었다. 창춘기차역부근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대화여관(大和旅館)이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외국손님을 맞이하는 호텔로 사용되고 있다. 오늘날 창춘의 어느 골목을 걷더라도, 아마 부지불식간에 주위의 건축스타일과 다른 개별건축물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건축물이 바로 만주국건축물들이다.
어느 해 겨울에 나는 창춘을 갔다. 이름없는 한 지역에서 규모가 아주 큰 만주국건축물을 만났다. 나중에 자료를 조사해보니, 원래 이 건축물은 새로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건축용도를 보면, 이 건축물은 이미 버려진지 여러 해가 되었고, 신민대가의 팔대부와 비교해보면 실용가치가 훨씬 적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개별건축물은 창춘도시의 곳곳에 흩어져 있다.
결론
창춘의 만주국건축물을 얘기하다보면 아마도 부의가 당시에 살던 황궁을 언급하게 된다. 다만 창춘의 여러 곳에 대량의 만주국시기의 건축물이 산재되어 있다. 그것들 중에서 어떤 것은 여전히 사용되고 있고, 어떤 것은 점점 버려지고 잊혀지고 있다. 창춘의 역사에 대한 증인으로서, 이들 만주국건축물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그 굴욕의 역사를 떠올리게 된다. 건축은 감상할 수 있는 예술이고, 역사의 흔적이다. 그것은 시시때때로 관광객들에게 일깨워준다. 건축물배후의 그 역사를 잊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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