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제갈량)

제갈량은 제1차북벌에서 얼마나 참담하게 패배했을까?

중은우시 2022. 8. 18. 10:53

글: 사설신어(史說新語)

 

삼국때 제갈량은 유비의 군사로서 유비가 전투, 치국, 평천하에서 가장 신임했던 사람이다. 제갈량을 얻은 후, 유비는 보물을 얻은 듯 기뻐했고, 속이 좁은 관우의 불만을 초래하게 된다.

 

유비는 임종때 탁고(托孤)할 때, 제갈량은 여전히 그를 위해 촉국을 지켜줄 유일한 후보자였다. 비록 그는 제갈량에 대하여 마음을 높지 못하는 점이 있기는 했지만, 조정과 아들을 제갈량에게 맡겨야 했고, 여기에 이엄과 조운으로 하여금 제갈량을 감시하여 유선과 촉한강산을 보호하게 했다.

 

다행히 제갈량은 확실히 그가 유비에게 약속한대로 일을 했다. 충성을 다하면서, 유비가 실현하지 못한 이상을 자신의 임무로 여기고, 그가 살아있는 동안 유선을 위해 천하를 얻으려 했다. 자신이 죽은 후 능력이 부족한 유선이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유비가 살아있을 때, 제갈량의 일처리는 항상 온건했고, 유비가 급진적으로 하려던 일을 말리기도 했다. 그러나 유비가 죽자 제갈량은 마음이 조급해진다. 그는 적극적으로 5차에 걸친 북벌을 진행했다. 1차례의 방어반격전까지 포함하면 6차례의 북벌을 일으킨 것이다.

 

이 6번의 북벌에서 그는 원했던 효과를 달성하지 못했을 뿐아니라, 목숨까지 잃게 된다. 그는 시종 유비가 남긴 유원(遺願)을 완성할 수 없었고, 자신도 유감을 품고 세상을 떠난다.

제갈량북벌의 효과는 확실히 만족스럽지 않았다. 제1차북벌에서 크게 실패하고 11명의 대장을 잃는다. 명실상부하게 "출사미첩신선사(出師未捷身先死)"라 할 수 있다.

 

이릉지전(夷陵之戰)은 유비가 관우의 복수를 위해 형주를 되찾아오려고 혼자 주장해서 벌인 일이다. 제갈량의 일관된 계획은 동오와 연합하여 조위에 대항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육손을 잡고도 죽이지 않고, 풀어주었던 것이다.

 

그는 동오와의 갈등을 격화시키지 않고 천천히 관계를 완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릉지전후 유비의 몸은 망가지고, 얼마 버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아마도 유비의 죽음은 제갈량에게 큰 자극이 되었던 것같다. 그는 적극적으로 북벌을 준비한다.

 

그는 먼저 남중(南中)을 평정하여 만이(蠻夷)의 병사들을 거두어 쓰고, 다시 동오와의 연맹관계를 회복시킨다. 이때 위문제 조비(曹丕)도 죽는다. 유비가 죽은지 3년이 지났을 때였다.

 

조예(曹叡)가 즉위하면서, 조위의 대권은 사마의의 수중에 들어간다. 위나라의 국면도 안정적이지 못했다.

 

이는 제갈량으로 하여금 조위를 칠 좋은 기회라고 여기게 만든다. 시간이 길어지면 촉한이 버티기 어렵게 된다.

 

이릉지전에서 실패를 겪은 촉한은 형주라는 요새를 잃었다; 조위의 영토도 넓고, 몇년간 쉬면서 힘을 길렀으며, 인구와 병력이 크게 증가했다. 그리하여 쌍방간의 실력차이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었다. 이것이 제갈량으로 하여금 북벌을 서두르게 만든 원인일 것이다.

 

227년, 제갈량은 투지만만하게 유선에게 <출사표>를 올린다. 그리고 조운을 데리고 한중에 주둔하며 전투준비를 한다.

 

228년, 제갈량은 마침내 제1차북벌을 시작한다. 그는 병력을 몇 로로 나누어, 조운(趙雲), 등지(鄧芝)로 하여금 부대를 이끌고 기곡(箕谷)으로 나가게 한다. 그러나 말로는 사곡(斜谷)으로 나간다고 하여, 관중의 위나라군사들을 속이고자 한다. 그리고 그는 군대를 이끌고 서북으로 기산(祁山)으로 나아가 관농(關隴)의 통로를 끊고 농우(隴右)를 공격한다. 

 

농우는 확실히 깜짝 놀란다. 제갈량은 강유(姜維)등 위나라군대의 대장의 항복을 받아낸다. 농우쪽에서는 보기에 제갈량의 성과가 괜찮았다. 연이어 몇개의 성을 함락시켰고, 조위의 군대는 대패당한다. 많은 위나라군대의 우두머리들이 촉군에 투항한다. 제갈량은 대첩을 거둔 셈이다.

 

시작이 좋으면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이런 파죽지세로 밀어부치면 금방 북벌이 성공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모두가 조위를 너무 얕보았다. 설사 준비되지 않은 전쟁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여러 수단을 써서 제갈량의 전략을 교란시킬 수 있었고, 촉군이 시작은 좋았지만 참패로 끝나게 할 수 있었다. 

 

이렇게 교란시킨 사람은 바로 장합(張郃)이다. 제갈량은 장합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사전에 인원을 배치한다. 바로 가정(街亭)이다.

 

가정은 이번 북벌전선의 핵심지역이다. 가정을 얻은 자가 승리하는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곳에 촉군에서 누구에게 보내야 할 것인가?

 

모든 사람은 위연(魏延), 오의(吳懿)같은 노장들이 타당하다고 건의했다. 그러나 제갈량은 약을 잘못 먹었는지, 혼자 고집을 부려 마속(馬謖)을 보낸다.

 

마속은 재능이 있었다. 제갈량에게 여러번 유용한 건의를 했었다. 그러나 마속은 실전경험이 부족했다. 유비가 살아있을 때, 제갈량에게 말해준 바 있다. 마속을 중용해서는 안된다고. 그는 단지 탁상공론하는 자라고. 유비가 죽고나서, 제갈량은 아마도 그 말을 잊어버렸나보다.

 

마속은 군권을 넘겨받고나서 기분이 좋아졌는지, 제갈량의 당부조차 듣지 않는다. 굳이 산 위로 올라가서 군영을 차린 것이다. 수원(水源)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어서, 이릉지전때의 유비와 똑같은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부장(副將) 왕평(王平)이 아무리 말려도, 마속은 듣지 않았다. 결과는 장합이 산 위의 촉군을 포위했고, 수원을 끊는다. 그리하여 마속의 부대는 궤멸하게 된다. 병사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왕평이 기민하게 계책을 세우지 않았더라면, 마속도 산위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가장 관건적인 패전이다. 이로써 북벌계획은 철저히 무너진다. 제갈량은 눈물을 흘리면서 마속을 죽여 군심을 다독여야 했다.

 

비록 제갈량이 다시 배치하여, 북벌군이 장합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마옥(馬玉), 염지(閻芝), 정립(丁立), 백수(白壽), 유합(劉頜), 장수(張修), 이성(李盛), 등동(鄧銅), 군양(群陽)등 9명의 대장이 모두 이 전투에서 전사한다.

 

제갈량이 이끄는 쪽이 패전하고, 조운이 이끄는 곳도 포위된다. 패퇴하는 도중에 조운은 병사한다. 여기에 읍참당한 마속까지 합치면 이번 북벌에서 모두 11명의 대장을 잃은 것이다. 철군하는 도중에 하마터면 사마의에게 포위당한다. 제갈량이 공성계를 쓰지 않았더라면, 아마 결과는 더욱 참혹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