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이홍장)

이홍장(李鴻章)과 좌종당(左宗棠)은 무슨 일로 20년간 계속 싸웠을까?

중은우시 2020. 11. 26. 21:13

글: 기점문사(起點文史)

 

만청(晩淸) 중흥사대명신(中興四大名臣)중 이홍장, 좌종당은 20년간 좌종당이 1885년 사망할 때까지 명쟁암투(明爭暗鬪)를 벌였다.(나머지 2명은 증국번과 장지동이다)

 

이홍장과 좌종당은 무슨 일로 20년간이나 싸운 것일까?

 

동치3년(1864년), 태평천국이 멸망할 때, 이홍장과 좌종당의 모순이 폭발한다. 이홍장 수하의 회군(淮軍)은 상주(常州)를 공격하려 함락시켰고, 태평천국의 호왕(護王) 진곤서(陳坤書)를 붙잡아 죽였다. 이 기초 위에서, 강소 남부지구의 태평군은 기본적으로 모두 제거했다. 청나라는 이홍장에게 기도위(騎都尉)의 세직(世職)을 내린다.

 

이때 증국번의 상군(湘軍)은 이미 태평천국의 도성인 천경(天京)을 포위한지 오래 되었다. 쌍방은 마지막 결전을 벌이고 있었다.

 

상군이 오랫동안 천경을 공격하지만 함락시키지 못하자, 조정은 하루빨리 태평천국을 평정하기 위해서, 여러번 이홍장에게 회군을 이끌고 상군을 도우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이홍장은 병을 핑계로 진군하지 않았다.

 

왜 이홍장은 가지 않았을까? 죽기를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스승의 은혜를 생각해서이다.

 

증국번은 이홍장의 귀인(貴人)이라 할 수 있다. 이홍장이 곤궁할 때, 증국번의 지지로 이홍장과 회군이 나타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증국번에게는 은혜를 입은 것이고, 이홍장은 죽을 때까지 이를 잊지 않았다. 자신과 증국번, 증국전의 관계를 고려하여, 이홍장에게 회군을 이끌고 천경을 쳐서 상군과 공로를 다툴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리하여, 이홍장은 우선 소조, 상주 일대에서 병력을 움직이지 않는다. 그후, 청나라조정의 재촉이 너무 심해서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자, 이홍장은 회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절강으로 들어가, 절강일대의 태평군을 평정한다.

 

당시 민절총독(閩浙總督, 민은 복건, 절은 절강을 가리킴)으로 있던 좌종당은 절강과 복건은 자신의 관할범위였다. 이홍장이 마음대로 군대를 이끌고 절강으로 들어와 반란을 평정하다니, 이는 좌종당의 공을 빼앗는 것일 뿐아니라, 사람들에게 좌종당은 능력이 부족하여 자신의 관할지에서의 반란도 평정하지 못했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 그리하여 좌종당은 조정에 글을 올려 이홍장이 "월경략공(越境掠功, 남의 관할구역으로 들어가 공을 빼앗다)"했다고 고발한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원수지간이 된다.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한 후, 좌종당과 이홍장은 다시 염군(捻軍)을 평정하러 간다.

 

1867년(동치6년)말, 염군은 섬서(陝西)에서 산서(山西)로 들어갔고, 다시 하남(河南), 직예(直隸)로 들어가, 경사(京師)를 깜짝 놀라게 만든다. 이에 대하여, 이홍장과 좌종단 간에는 서로를 비난하는 일이 일어났고, 모두 상대방의 문제라고 말한다. 결국 조정은 양자를 모두 징계한다.

 

좌종당과 이홍장은 모두 만청의 고굉지신(股肱之臣), 봉강대리(封疆大吏), 양무파대표(洋務派代表)이며, 서태후가 의지하던 사람들이다. 한명은 민절총독, 군기대신이고, 다른 한명은 직예총독 겸 북양통상대신이었다. 1874년, 청나라조정은 수개월에 걸친 기간동안 "새방(塞防)"과 "해방(海防)"을 놓고 대논쟁을 벌인다. 논쟁의 촛점은 해방을 할 것이나, 새방을 할 것이냐는 것이다. 새방의 대표는 좌종당이고, 해방의 대표는 이홍장이다. 당연히 최종결과는 서로간의 고하를 가릴 수 없었고, 청나라는 좌종당에게는 실지수복을 명하여 신강으로 보내고, 이홍장에게는 북양수사를 건립하도록 한다.

 

바꾸어 말하면, 청나라에 있어서, '새방'과 '해방'은 반드시 해야할 두 가지 중요임무였다. 어느 하나 게을리할 수 없는 일이다. 1885년(광서11년), 좌종당은 복주에서 병사하니 향년 73세이다. 청나라조정은 태부(太傅)를 추증하고, 시호를 "문양(文襄)"으로 내린다. 그리고 소충사(昭忠祠), 현량사(賢良祠)에 입사된다. 이렇게 두 사람의 20년에 걸친 싸움은 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