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소가노대(蕭家老大)
엄숭은 자가 유중(惟中), 호는 개계(介溪)이며, 강서 분의(分宜, 지금의 강서성 신여시 본의현)사람이다. 엄숭의 부친은 오랫동안 과거시험을 쳤으나 합격하지 못했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미련이 컸으므로 모든 희망을 아들에게 걸었다. 그리하여 그는 아들을 세심하게 가르치고 길렀다. 엄숭은 5살때 엄씨사(嚴氏祠)에서 글을 배웠고, 9살때 현학(縣學)에 들어간다. 10세때 현시(縣試)를 통과하며, 19세때 거인(擧人)이 되고, 25세때 마침내 엄숭은 부친의 염원을 이룬다.
홍치18년(1505년), 엄숭은 을축과(乙丑科)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서길사(庶吉士)로 뽑힌다. 나중에는 편수(編修)의 관직을 받았다. 나중에 엄숭은 큰 병이 들어, 할 수 없이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엄숭이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10년은 바로 환관 유근(劉瑾)의 권력이 천하를 흔들던 시기였다.
정덕7년(1512년), 원주지부(袁州知府) 요정(姚汀)은 개국수지(開局修誌) 즉 편집국을 만들고 지방지를 쓰기 시작한다. 그는 엄숭을 총찬(總纂) 즉 총편찬인으로 모셨다. 그런데, 얼마후 요정이 사건으로 그만두게 된다. 다음 해, 서련(徐璉)이 후임 지부로 온다. 서련도 즉시 엄숭을 청하여 계속 총찬을 맡아달라고 한다. 8개월간의 노력을 거쳐 정덕9년(1514년) 엄숭이 총찬으로 지방지를 완성한다. 그해가 갑술년이므로 사람들은 갑술지라고 부른다. 후세에서는 <정덕원주부지(正德袁州府誌)>라 부른다.
그후 유근과 그의 일당은 척결되고, 엄숭은 북상하여 북경으로 가서 관직에 복귀한다. 그후 10여년간, 엄숭은 전후로 북경과 남경의 한림원에서 재직한다. 명세종때, 황제는 도교(道敎)에 심취해 장생불로의 술법에만 관심을 두고, 정사에는 소홀히 했다. 조정의 일은 모두 조정대신들에게 넘겨서 처리하게 했다. 예부상서(禮部尙書) 하언(夏言)은 명세종의 총애를 받았는데, 마침 엄숭과 같은 고향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엄숭은 하언에게 죽기살기로 아부한다.
하루는 엄숭이 집에서 연회를 열고 하언을 초청한다. 하언은 처음에는 가겠다고 했으나, 나중에 연회에 가질 않았다. 엄숭은 오랫동안 하언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직접 하언의 집으로 찾아간다. 그러나 문지기는 그에게 하언이 집에 없다고 말한다. 엄숭은 집으로 돌아와 자리를 가득채운 손님들과 이미 차가워진 음식을 앞에 놓고, 초청장에 썼던 원문을 한번 읽고는 크게 소리친다. "손님과 주인의 도리를 다하지 못했으니, 소인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는 눈빛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식사를 한다. 이때부터 하언에 대한 원한이 가슴 속에 심어진다. 그후 엄숭은 아부를 통해 계속 승진하고, 명세종의 인정을 받는다. 가정15년(1536년), 하언은 내각수보에 오르고, 엄숭은 예부상서에 발탁된다.
하언은 자부심이 강했다. 그리고 명세종이 도교에 심취해 있는 것에 반대한다. 그래서 점점 명세종이 좋아하지 않게 된다. 하루는 명세종이 침향수엽관(沈香水葉冠)을 하언, 엄숭등 대신들에게 하사했다. 그런데 하언은 이를 쓰지 않았다. 그러나 엄숭은 매번 조정에 나갈 때마다 이 관을 쓴다. 게다가 특별히 가벼운 비단으로 둘러사서 존중하는 뜻을 표현했다. 명세종이 그 모습을 보고 더욱 엄숭을 좋아하고, 하언을 싫어하게 된다.
엄숭은 태자태부(太子太傅)에 오른다. 이미 날개가 튼튼해지자 하언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엄숭은 명세종에게 하언을 쫓아내도록 종용한다. 하언이 쫓겨난 후, 엄숭은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한다. 가정22년(1543년) 이부상서 허찬(許贊), 예부상서 장벽(張璧)과 엄숭이 함께 국사에 참여한다. 그러나 명세종은 일이 있으면 엄숭만 불렀다.
가정24년(1545년) 십이월, 허찬은 늙고 병들어 사직하고, 장벽은 사망한다. 명세종은 다시 하언을 내각수보로 기용한다. 이때 하언은 엄숭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어서 계속 조심했다. 엄숭은 표면적으로 하언에게 공손했지만, 마음 속으로 원한은 계속 품고 있었다. 그후 엄숭은 다시 청사(靑詞, 도교의 신에게 제사지낼 때 쓰는 글)로 명세종의 신임을 독차지한다.
나중에 엄숭은 타타르(韃靼)가 중원을 침입하는 기회에 하언을 해친다. 가정23년(1544년), 타타르가 하투(河套, 지금의 영하성과 내몽고이 하란성동쪽, 낭산과 대청산 이남)를 침입한다. 섬서총독 증선(曾銑)이 군대를 이끌고 하투를 빼앗아 온다. 그리고 상소를 올려 부곡황포에서 정변가지 변방성벽을 쌓고, 그 후에 수륙으로 함께 진격하여 타타르병을 쫓아내자고 한다. 이 건의는 하언의 지지를 받는다. 하언은 조정에 증선을 추천하고, 그와 함께 계책을 상의한다.
명세종은 하투를 빼앗아 오려고 했고, 증선을 칭찬한다. 이때 엄숭은 황제의 근시(近侍)를 매수하여, 증선이 "경솔하게 변방의 전쟁을 도발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변방장수 구란(仇鸞)을 시켜 증선이 원래 패전하도고 제대로 보고하지 않고, 군량미를 자신이 독차지하고, 하언에게 뇌물을 바쳤다고 무고한다. 엄숭은 다시 명세종의 앞에서 두 사람이 하투를 되찾으려는 것은 다른 속셈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명세종도 엄숭의 말을 믿는다.
가정27년(1548년) 삼월, 증선이 피살당하고, 처자식은 2천리 유배를 간다. 하언은 하옥되고, 나중에 엄숭은 소문을 이용하여 명세종으로 하여금 하언이 황제를 비방하고 있다는 것을 '알도록' 만든다. 같은 해 십월, 하언은 참수된다. 하언의 심복들은 처벌받거나 좌천된다. 엄숭은 다시 내각수보에 오르고, 이때부터 조정을 독단하게 된다.
엄숭이 내각수보에 오른 후, 계속 조심하며 명세종을 모셨다. 그리하여 "충근민달(忠勤敏達)"이라는 은인(銀印)을 하사받는다. 명세종은 그러나 수도에만 관심이 있고 정무에는 관심이 없었다. 모든 정무는 엄숭에게 맡겨서 처리하게 했다. 이대 엄숭, 도사와 좌우근시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명세종을 만나볼 수 없었다.
나중에 엄숭이 나이들면서, 아들 엄세번(嚴世蕃)이 권력을 잡도록 도운다. 엄세번은 공부시랑(工部侍郞)이 된다. 엄세번은 엄세종 좌우의 환관을 매수하여, 명세종의 일상생활, 기거음식, 일거일동을 모두 파악한다. 대신들은 아예 이들 부자를 "대승상", "소승상"이라고 불렀다. 어떤 대신은 이런 말로 조롱했다: "황상은 엄숭이 없으면 안되고, 엄숭은 아들이 없으면 안된다"
엄숭부자는 20년간 권력을 누린다. 천하가 모두 원한을 품는다. 엄세번은 더더욱 광망하기 그지없었다. 심지어 자기 집의 창고 안에서 이렇게 소리치기도 했다: "조정도 우리 집만큼 돈이 많지 않다." 여러 대신들이 이들 부자를 탄핵했지만, 명세종은 계속 비호해준다.
엄숭 일당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돈을 줘야 일이 성사되고, 돈을 줘야 관직을 내린다"는 상황이 된다. 매번 관리를 선발할 때면 관직의 고하에 따라 가격이 매겨진다. 승진이나 이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가격을 매겼다. 예를 들어, 칠품(七品) 주판(州判)은 은3백냥이고, 육품 통판(通判)은 은 오백냥, 형부주사 항치원(項治元)은 은 1만3천냥으로 이부 계훈주사(吏部稽勛主事)로 옮겨간다. 공사(貢士) 반홍업(潘鴻業)은 은 2천2백냥으로 임청지주(臨淸知州)가 된다. 무관 중에서 지휘(指揮)는 은 삼백냥이고, 도지휘(都指揮)는 은칠백냥이며, 총병관에서 삭탈관직된 이봉명(李鳳鳴)은 은 2천냥을 내서, 계주총병(薊州總兵)으로 간다. 늙어서 그만둔 총병 곽종(郭琮)은 은 3천냥을 내고 독조운사(督漕運使)가 된다.
가정41년(1562년) 산동의 도사 남도행(藍道行)은 도술로 유명했다. 그래서 서계(徐階)는 남도행을 명세종에게 소개한다. 하루는 남도행이 도술을 행하면서, "오늘 간신이 일을 아뢰러 온다"고 말한다. 마침 그때 엄숭이 지나갔다. 명세종은 엄숭부자에 대하여 이미 싫증을 내고 있었다. 결국 엄씨부자의 권세는 남도행의 몇마디 말에 의해 무너지게 된다. 엄세번은 참수된다. 참수형을 당할 때 통곡을 한다. 부친 엄숭은 가산을 몰수당하고, 삭탈관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돌아갈 집이 없었다. 이년후 병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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