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치아(李治亞)
이세민 부자가 대수(大隋)의 강산을 빼앗은 후, 전리품으로, 이세민은 다시 양광(楊廣)의 딸을 후궁으로 취한다. 그 양비의 몸에는 비록 황가의 혈맥이 흐르지만, 아주 겸허하게 지냈다. 어쨌든 그녀는 망국의 군주의 후손이므로 그녀의 일거일동은 문무대신들이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비는 아주 고통스럽게 산다. 사서에서 그녀에 대한 기록은 단지 7자이다. "각모(恪母), 수양제녀야(隋煬帝女也)"(이각의 모친이고, 수양제의 딸이다). 이를 보면, 양비는 비록 명의상으로 수양제의 딸이고, 신분이 고귀해 보이지만, 생모가 누구인지, 몇째인지, 봉호가 무엇인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양비에게는 봉호(封號)가 없다. 이는 그녀가 정식 책봉을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수양제가 등극한 후에는 낙양으로 가고, 태자책봉보차도 조서를 내리고 사신을 장안으로 보내어 했다. 그러나 장안에 남겨진 공주를 일부러 책봉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를 보면, 양비의 생모는 출신이 비교적 낮고, 그다지 총애를 받지 못했던 그저 보통의 후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는 해도 양비는 어려서 '천지교녀(天之驕女)'였다. 사적에는 양숙비가 "귀성무비(貴盛無比)"하다고 했다. 그러나 수왕조가 멸망한 후, 망국의 포로가 된다. 일인득도(一人得道), 계견승천(鷄犬昇天)의 사회에서, 양비는 운명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비록 그녀는 이세민과의 사이에 두 아들을 낳았고, 그중 특히 오왕(吳王) 이각(李恪)은 "천지의 정화, 만물의 영장(天地之精華, 萬物之靈長)"으로 불린다. 장손황후가 병사한 후, 양비는 한 때 당태종의 총애를 받고 한때는 그녀를 황후로 세우고자 한 바도 있었다. 그녀는 겸손하고, 미모를 갖추고, 공주의 자연스러운 기품을 갖추고 있었다. 더더구나 뛰어난 아들 오왕 각도 있었다. 아쉽게도 그녀는 대수의 공주였고, 전황조 황제의 혈동을 지니고 있어, 꿈을 이룰 수 없었다.
양비는 미모를 갖추고 사람됨도 겸손하였지만, 항상 사람들의 배척을 받는다. 여자들이 후궁에서 질투하는 것뿐아니라, 더더구나 그녀의 혈통때문에 그러했다. 어쨌든 당시는 장손무기가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자신의 외조카인 장손황후가 낳은 황자가 순조롭게 황위를 이어받게 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 다른 후궁사이에 낳은 황자들을 배척한다. 다음으로 양비의 궁에서의 봉호를 보도록 하자. 당나라 정관연간이 사부인(四夫人)의 봉호는 순서대로 귀숙덕현(貴淑德賢)이다. 위귀비(韋貴妃)의 봉호는 아주 명확하다. 또 다른 1명인 십상황자 이복(李福)을 낳은 양귀비(楊貴妃)인데, 귀비의 봉호는 사후에 추봉된 것이다. 이를 보면, 생전에 정일품의 비는 아마도 봉호가 '숙비(淑妃)'일 것이다. 연덕비(燕德妃)는 현비(賢妃)에서 덕비로 올라간다. 원인은 음비(陰妃)의 아들인 이우(李祐)가 모반으로 주살된 후, 음비는 빈(嬪)으로 강등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명의 정현비(鄭賢妃)가 있다. 그녀는 연현비가 덕비로 올라간 후에 현비가 된다. 그래서 양비는 생전에 비의 봉호가 없었다. 그러나 사후에 '비'로 추봉된다. 품급이 올라간 것이다.
양비가 총애를 받지 못하면서 그녀의 두 아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당태종 정관연간에 다른 황자들은 모두 도독이 되는데, 오직 이각, 이음(李愔) 두 명은 자사(刺史)에 그친다; 다른 황자들은 모두 실봉800호를 받는데, 오직 이각, 이음만 하나는 삭호600호, 하나는 삭호400호를 받는다. 양비가 총애를 받았다면 어떻게 사서에 단지 7자만 남겼을 까. 그리고 그녀의 두 아들이 어떻게 당태종의 아들 중에서 이렇게 형편없는 대우를 받았을까.
어떤 사람은 양비가 바로 제왕(齊王) 이원길(李元吉)의 처라고 말하나, 기실 이것은 틀린 말이다. 당시에 양비가 두 명이 있었다. 야사에서 얘기하기로는 이 양씨성의 여자는 망국의 공주이고, 원래 이세민의 동생의 처, 즉 제왕 이원길의 비였다. 망국의 한과 집안의 한을 모두 안고 난륜이라는 욕을 얻어먹으면서 당태종과 사랑을 하게 된다. 다만 역사상 두 양비는 확실히 독립하여 '대양비' '소양비'로 불린다. 대왕비는 수양제의 공주로 숙비에 봉해지고, 또 다른 양비는 일찌기 제왕 이원길의 처로서 우리들이 습관적으로 '제왕비'로 부른다.
당고종 이치가 즉위한 후, 태종의 비호를 더 이상 받지 못하게 된 양숙비 모자는 장손무기의 앞에서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어진다. 결국 이각은 고양공주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사사당한다. "영휘연간에, 방유애가 모반하고, 이 일에 연루되어 이각이 주살된다. 그리하여 절망(絶望)하고, 해내에서 이를 원망한다." 한 사람의 죽음에 천하가 절망하였다는 것을 보면 그의 재능이 얼마나 탁월했는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외조카가 이렇게 뛰어난 적수를 대하고 있으니, 장손무기로서는 그를 사형에 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왕 이각이 죽은 후, 동생 촉왕도 서인이 되고, 파주로 유배를 가고, 사후에 비로소 작위가 회복된다. 그들의 모친 양숙비는 이때부터 사관들의 붓아래에는 실종상태가 된다.
이를 보면 후비가 총애를 받는지 아닌지는 그녀의 미모와 관련이 없다. 주로는 혈통이다. 혈통이 좋지 않으면 아무리 온유하고, 현숙해도 그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 > 역사인물 (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성공주(文成公主): 티벳으로 시집간 후의 비참한 처지 (0) | 2015.02.22 |
---|---|
적인걸(狄仁傑)의 남다른 말년 (0) | 2015.02.10 |
이적(李勣): 충의(忠義)와 원활(圓滑) (0) | 2015.02.10 |
이보국(李輔國): 환관으로 재상에 오른 인물 (0) | 2015.01.01 |
장제현(張濟賢): 송나라때의 밥통재상 (1) | 2015.0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