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호각조(胡覺照)
제갈량의 치국에 대하여 자고이래로 평가가 아주 높다. 진수는 <삼국지.제갈량전>에서 이렇게 썼다: "개성심(開城心), 포공도(布公道), 충성을 다하고 이로운 일을 한 자는 원수라도 반드시 상을 내렸고; 법을 어기도 태만히 한 자는 친하더라도 반드시 벌을 주었다." 오늘날 어떤 사람은 이를 '법에 따를 통치', '법률공정이 원칙을 견지했다'라고 칭찬까지 한다.
정말 그럴까? 반드시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첫째는 법정(法正)의 건이다.
유비가 익주를 얻은 후, 법정은 "촉군태수, 양무장군이 되어 밖으로는 수도와 수도부근지역을 관장했고, 안으로는 주군을 위하여 계책을 냈다."(<삼국지.법정전>). 즉 법정은 유비의 신임과 중용을 받아, 그로 하여금 수도의 촉군태수, 양무장군을 맡겼을 뿐아니라, 그가 건의하는 말이라면 다 들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정은 뜻을 얻으면 창광(猖狂)하는 중산랑(中山狼)이었다. 유비의 총애를 받은 후, 즉시 개인적인 은원을 시비기준으로 삼는다. "식사 한끼의 은혜, 한번 흘겨본 원한도 하나도 잊지 않고 그대로 갚아주었다." 그의 보복수단은 아주 심했다. 일찌기 그를 비방하거나 해친 자들은 많이 자살해 버리고, 법률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이런 법도 하늘도 없는 교만함과 횡행에 대하여 누군가 제갈량에게 유비에 아뢸 것은 권한다. 그리하여 법정이 위세를 꺽어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제갈량은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 "주공이 아직 남군 공안에 있을 때, 북방으로는 조조의 강대함을 두려워하고, 동으로는 손권의 핍박을 우려하고 있었다. 가까이는 손부인이 측근이 될까봐 겁을 냈다. 그때는 정말 진퇴양난이었다. 법정이 보좌한 이후로 주공은 하늘을 날게 되었고, 제약을 받지 않게 되었다. 어찌 법정이 득의만면하여 하는 일을 제지할 수 있겠는가?"
유비가 살아 있을 때, 대신을 제약하고 처리하는 것은 제갈량이 결정할 사항이 아니었다. 그의 집법이 불공정하고 편파적이라고 한다면, 이런 해석은 정말 곤혹스럽다. 만일 법치관념이 뚜렷한 사람이라면, 절대로 위와 같은 말투로 위법한 살인을 변명해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합리적인 해석은, 제갈량은 유비가 법정을 특별히 신임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의 뜻에 맞추어 영합한 것이다.
둘째는 상방(常房)의 건이다.
<위씨춘추>에 따르면, 익주종사(益州從事) 상방(常房)은 밀보를 받는데, 고발내용은 상가태수 주포(朱褒)가 모반을 꾸민다는 것이다. 상방은 촉한정권에 아주 충성스러운 관리였다. 즉시 주포의 주부(主簿, 비서실장에 해당함)를 붙잡아서 심문한 후 '그를 죽인다'. 주포는 대노한다. 그래서 병력을 이끌고 가서 상방을 죽여버린다. 그리고 상방이 모반했다고 무고한다. 제갈량은 이를 알고난 후, 시시비비를 따지지 않고 바로 상방의 몇 아들을 모조리 죽여버린다. 그리고 상방의 넷째동생은 월준산지역으로 유배를 보낸다. 분석해보면, 상방은 종사일 뿐이다. 그런데도 감히 주포의 주부를 심문하고 죽였다면, 분명 믿을만한 증거가 있었을 것이다. 다만 지나치게 자신하였다. 주범이 아직 잡히기 전에 종범을 죽여서는 안되었다. 그렇게 한 것은 증인을 없앤 셈이 된다. 상방은 문관이고, 주관도 아니며 병권도 없었다. 그가 뭘 믿고 모반을 일으킨단 말인가. 이것은 기본적인 상식이다. 주포의 무고는 그저 도둑이 제발 저린 겻일 뿐이고, 고의로 그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것일 뿐이다. 증거는 절대로 없다. 제갈량은 정무를 본지 이미 여러 해이고, 이런 일을 처리할 때 승상의 자리에 있었다. 시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리 없다. 그런데 왜 상방의 자식을 극형에 처하고, 동생은 유배를 보냈을까? <위씨춘추>의 작자는 분명히 꿰똟어 보았다. "욕이안지(欲以安之)"(그를 다독거리려 한 것이다)라는 네 글자로 그 의도를 밝혔다. 즉 그의 반대편에 선 사람을 죽임으로써 주포를 안위시킨 것이라는 말이다. 확실히, 이것은 법률공정의 원칙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권모술수일 뿐이다.
아쉽게도, 제갈량은 주포의 체면을 살려주었지만, 주포는 이를 배신으로 갚아버린다. <삼국지>에 주석을 단 배송지는 이 일을 가지고 불평한다: 집정자는 반드시 사건을 명확히 밝혀야 하고, 함부로 무고한 자를 죽여서 간신에게 잘보이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정말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셋째, 유염(劉琰)의 건이다.
유염은 유비의 옛부하이다. 풍류적이고 담론을 좋아했다. 게다가 종실이다. 그래서 황실의 중용을 받는다. 유선때 그는 도향후. 거기장군에 봉해져서 지위가 이엄의 바로 다음간다. 전군사 위연과 불화하여 제갈량으로부터 책망을 들은 후 성도로 쫓겨가서 집에서 한가로이 지내게 된다.
어느해 정월, 그의 처인 호씨가 궁으로 들어가서 태후에게 경하를 드린다. 1개월후에야 궁에서 나온다. 호씨는 젊고 예뻐서 유염은 유선과 간통한 것이 아닌지 의심한다. 진상을 파악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병사를 시켜 처를 구타한 후 친정으로 돌려보낸다. 처는 아마도 배후에 믿는 구석이 있어서인지 유염을 법원에 고발한다. 법원은 "병졸은 처를 때리는 사람이 아니고, 얼굴은 형을 내려서는 안되는 곳이다"라는 이유로 유염을 사형에 처한다. 사형에 처한 후 그의 시신을 길거리에 내놓아 사람들이 보게 한다.
유염사건의 처리에서는 몇 가지 생각할 점이 있다: (1) 법원은 일반적인 사법인원이 아니다. 조정에서 이런 지위에 있는 관리이고, 게다가 황제 유선까지 연루되어 있으므로, 제갈량이 결정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사건의 결론을 내릴 수 없을 것이다. (2) 고관이 처를 때리거나 처를 죽이는 등은 전제사회에서 너무나 흔히 있는 일이다. 이것이 죽을 죄가 되지는 않는다. (3) 시신을 길거리에 내버려 유염의 죄악을 드러내는 것은 더더욱 유선의 황당한 행동이다. 이런 방식은 법으로 보나 정리로 보나 타당하지 않다. 이렇게 타당하지 못한 일을 벌인 것은 나중에 유선을 대체하는데 여론을 조성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
기실, 마속의 피살사건도 법률과 기율을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속죄양을 찾은 것이다. 제1차북벌실패의 책임을 그에게 떠넘긴 것이다.
이상의 세 가지 사건을 보면 알 수 있다. 제갈량이 추구한 것은 '법률공정의 원칙'이 아니다. 그저 그는 권모술수를 부렸을 뿐이다. 법을 악용한 것이다. 비록 부정행위를 저지른 것까지는 아닐 지라고. 그리고 더욱 큰 목적이 있었다. 그 목적은 천차만결이지만 모두 사법공정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법가의 치국이념은 잔혹하고 인정을 따지지 않는다. 엄격하게 법을 적용함으로서 최대한 군벌확장의 야심을 만족시키고, 민중의 인력물력에 대한 약탈을 보장하는 이념이다. 바꾸어 말하면, 엄격하게 법을 적용하는 것은 백성의 복종과 인내를 얻어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법가는 군벌혼전시기에 탄생한 극단적인 사상이며, 긍정할만한 내용이 없다. 진나라가 신속히 멸망한 역사에서 법가사상의 반동성은 뚜렷이 드러난다.
제갈량이 법을 엄격하게 적용한 것는 백성에 대한 인력물력 수탈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전국시대 법가사상의 부활이다. 나아가 제갈량은 상앙의 법가주장에서 오히려 퇴보한 측면이 있다. 후세사학가들이 칭송할만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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