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당나라 7명의 황제가 황후를 두지 않은 이유는?

중은우시 2014. 1. 29. 22:40

글: 노군후(老君猴) 

 

취처납첩(娶妻納妾)은 황제의 궁정생활에서 정상적인 현상이다. 황후는 황제의 정처(正妻)로서 후궁의 여러 비빈들의 주인이고, 황제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그 영향력으로 보면 절반의 황제라고 말할 수 있다. 황제에게 몇 명의 부인. 비빈, 세부(世婦), 어녀(御女)가 있든, 황제와 함께 침대에서 잘 수 있고, 자녀를 낳을 수 있다. 그러나 그녀들의 신분은 모두 천한 첩과 같은 류이다. 명문세가출신의 신분이 고귀한 황후는 오로지 1명이다. 황후는 황제와 짝이 되는 여인이고, 통상적인 상황하에서라면 황제가 등극할 때 자신의 황후를 모두 책봉한다. 그러나, 당나라말기의 7명의 황제(당순종, 당헌종, 당목종, 당경종, 당문종, 당무종, 당선종)는 그들의 생모, 조모를 황태후, 태황태후로 추존하였을 뿐, 자신의 황후는 책봉하지 않았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여러가지 설이 있다. 다만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다음의 몇 가지 이유에서이다.

 

황후를 세우지 않은 것은 빈계사신(牝鷄司晨, 암탉이 울다), 황후간정(皇后干政)의 난처한 경우를 벗어나, 황제가 조정을 마음대로 다스리게 하기 위함이다.

 

속담에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牝鷄司晨, 惟家之累)"라는 말이 있다. 즉, 집안의 암탉이 울어서 새벽을 때운다면 이 가정은 망할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여성이 권력을 잡아서 음양이 뒤바뀌면 나라나 국가가 망한다는 것을 뜻한다. 당연히 이 비유는 적절하지 않다. 그러나 전혀 이치에 닿지 않는 것도 아니다. 황후가 후궁의 대권을 장악하여 황상칭제를 동요시키는 작용은 무시할 수 없다. 역사적으로 한고조 유방의 여후, 당고조 이치의 무후는 모두 황후간정에서 성공적으로 정권을 찬탈할 전형이다. 황후가 조정에 간여하는 것은 황제가 가장 골치아프게 생각하는 일이다. 궁녀와 비빈이 많더라도, 명호를 주지 않고 황후를 두지 않으면, 그녀들은 마음대로 흥풍작랑(興風作浪)하기 어렵다.

 

7명의 황제가 철저하게 황후가 정치에 간여하는 것을 벗어나기 위하여 황후를 세우지 않았다. 그중 당헌종 이순(李純)의 방식이 가장 두드러진다. 그는 역사적 교훈츨 받아들였다. 그가 보기에, 이전에 당고종 이치의 무후, 당중종 이철(李哲)의 위후, 당숙종 이형(李亨)의 장황후등은 모두 황제를 겨제했고, 황권을 노렸다. 당동벌이(黨同伐異, 뜻이 같은 자들은 같은 당으로 모으고, 뜻이 다른 자는 제거하다)하거나, 무리를 끌어모아서 파벌을 만들었다. 성지를 거젓으로 전하기도 하고, 궁중을 어지럽혔다. 그리하여 남편인 황제가 어떻게 할 방법을 찾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저 꾹 참고서 황후가 하는대로 놔두는 수밖에 없었고, 조정에 간여하는 화근을 불러왔다. 그러므로, 그는 "후비가 높은 자리를 차지하면 견제를 받을 수 있다. 그래서 황후를 두지 않은 것이다." 그가 황위를 승계한 후, 셋째 아들 이항(李恒)을 태자로 세운다. 1년이 지나자마자 태자를 세운 조정관리들은 이항의 생모인 곽씨(郭氏)를 황후로 세우기를 청한다. 그는 그에 따르지 않고 여러가지 핑계를 대어 거절했다. 그는 후비들을 억누르기 위하여 황후를 세우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곽씨를 귀비에 봉했을 뿐이다. 곽귀비도 그 뜻을 이해하였고, 부군의 의도를 잘 알았다. 예법을 따르고 궁중에서 함부로 설치지 않았으며, 분수에 넘치는 생각이나 기도를 하지 않았고, 자신의 본분을 지키고 법도를 지켜서 조정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평안하게 살았다. 당문종의 대에 이르러 곽태후는 삼궁태후(당목종, 당경종, 당문종)인 원로가 된다.

 

황후를 세우지 않은 것은 황후의 감독과 간섭을 피해서, 황상이 최대한도로 음욕을 즐기기 위해서이다.

 

당헌종이 황후를 세우지 않은 원인은 "황후가 질투를 하여, 자신이 다른 여인을 총애하는 것을 간섭하고,자신이 산천궁녀과 즐겁게 어울려놀지 못하게 할 것을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신당서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원화원년, 귀비(곽씨를 가리킴)를 책봉하였다. 팔년, 여러 신하들이 세번이나 황후로 세울 것을 청했다. 황제는 자오년은 좋지 않은 해라고 핑계를 대기고 하도, 어떤 때는 후궁에 미인이 많은데 황후의 존귀한 자리를 얻게 되면 마음대로 후궁들고 어울리지 못하게 견제할 것이어서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후당서>에도 유사한 기재가 있다: "원화원년 팔월, (곽씨)가 귀비에 책봉된다. 팔연 십이월, 백관이 글을 올려 귀비를 황후로 책봉할 것을 청하고, 세번을 올렸다. 황상은 연말인데, 다음 해가 자오년이어서 좋지 않은 해라는 이유로 하지 않았다. 황제는 후궁에 좋아하는 여인이 많았고, 황후는 집안이 명문거족이어서 황후의 자리를 얻게 되면 다른 후궁들을 총애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를 종합하면 당헌종은 '연말'이고 '자오년은 좋지 않은 해'라는 것을 이유로 삼았다. 다만 실제이유는 후궁에 좋아하는 여인이 많은데, 황후를 세우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할 것을 우려하였다는 것이다. 황후를 두지 않으면, 자신의 곁에 자신을 감시하고 다른 여인을 질투하고 미워하는 눈이 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 황후와 그 외척의 간섭을 피할 수 있다. 아무 비빈이나 마음대로 총애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고, 감독간섭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당헌종은 비록 집정에서도 날카로운 개혁을 추진하여, 번진을 삭감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여, 당나라에 "원화중흥(元和中興)"을 불러왔지만, 여성편력방면에서는 그후 7명의 황제의 나쁜 모범이 되었다. 그에게는 자녀가 38명이 있었다(아들 20명, 딸 18명). 21명의 후비가 있고, 비에 봉해진 여인은 3명이다. 비의 아래 궁녀는 부지기수이다. 음욕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그는 평생 황후를 두지 않았다.말년에 그는 조서를 내려 약방문을 구하고 신선이 되고자 연단을 했으며, 장생불로를 꿈꾸었다. 오랫동안 금단약을 복용하다보니 성격이 포악하고 조급하며, 화를 많이 내게 되었으며, 판단력을 잃었다. 결국은 환관에게 살해당한다.

 

아들은 아버지를 따르는 법이다. 당헌종의 아들인 당목종도 아버지를 그대로 본받아서, 황후를 두지 않는다. 그는 4년간 재위하는데, 유한한 정력을 무한한 먹고 마시고 노는데 쏟았다. 그리하여 신체의 각 부분이 쇠약해져서 결국은 용상에서 죽는다. 향년 겨우 30세였다. <당사연의>에서는 당목족의 죽음을 이렇게 묘사한다: "당목종의 나이가 장년인데, 어찌 계속 병을 안고 있는가. 그는 부친을 본받아서, 금석(연단)에 빠져서 조열(燥熱)을 풀지 못하고, 진음(眞陰)을 해쳤다. 처사인 장고는 당목종에게 간하여, 당헌종의 뒤를 따르도록 한다. 당복종은 그의 말이 옳다고 여겨서 계속 약을 먹는다. 그리하여 진음이 날로 고갈되고, 원기가 상하여 결국은 일어날 수 없는 병세를 나타낸다."

 

당목종이후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당경종 이담, 당문종 이앙, 당무종 이염. 이들도 생전에 황후를 두지 않는다. 이 세 명의 황제는 제대로된 일은 하지 않고, 조정을 돌보지 않으며, 오로지 여색만 탐했다. 그리하여 단명했다. 당경종의 재위기간동안 그저 놀러 다니고 연회를 베풀며, 격구를 하고, 음악을 연주했다. 그는 황음무도한 황제였다; 18살에 환관 유극명에게 피살된다; 당문종은 가노에게 억압당해서 32살때 우울하게 죽는다; 당무종은 음란하고 무절제하며, 오랫동안 단약을 복용하다가 33살에 궁에서 병사한다. 당헌종의 열세째아들인 당선종 이침(李忱)도 최후에 장기간 성욕을 자극하는 장생약을 복용하다가 죽는다.

 

이를 보면, 당헌종이 황후를 두지 않은 것이 후세에 미친 영향은 아주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황후를 두지 않은 것은 적서(嫡庶)의 다툼을 배제할 수 있어, 황상이 황태자를 책봉하는데 선택의 여지가 많다.

 

황제의 아들도 적서의 구분이 있다. 황후가 낳은 아들이 적자가 되는 외에 나머지는 모두 동근(同根, 같은 부친)에 속하고 모조리 서자로 칭한다. 황후를 두는 때에는 적장자이면, 나이가 많건 적건, 실력이 뛰어나건 아니건, 인재가 될 수 있든 없든 황상이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법도에 따라 황태자로 봉하게 된다. 역사상 부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도 세운 황태자는 그가 황위를 계승한 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여 폐위된 경우가 수두룩하다. 한나라때의 유하(劉賀)는 겨우 27일간 황제로 있다가 폐출된 바 있다.

 

황후를 두지 않으면 황제는 적서지쟁의 소용돌이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더 이상 거기에 얽매어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자신의 뜻에 따라 여러 자식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자를 태자로 세우면 된다.예를 들어, 당순종 이송(李誦)이 등극하기 전에 20년간 태자로 있었는데, 태자궁에만 비빈이 19명이 있었다. 즉위1년간 역시 황후를 세우지 않는다. 곁에는 항상 총애하는 비 우씨(牛氏,. 소용)와 왕씨(양제)가 있었다. 왕양제는 황후도 아니고, 우소용보다 신분도 낮았지만, 왕양제가 장남 이순의 모친이었다. 비록 우소용이 극력 반대했지만, 당헌종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이순을 황태자로 세운다. 당순제가 죽은 후, 이순은 직접 생모인 왕양제를 황태후로 추존한다. 만일 당순종이 우씨를 황후로 앉혔더라면, 이순은 태자가 되기 어려웠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