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병광(劉秉光)
"태상황"과 "태상황제"는 사료에서 자주 등장하는 두 단어이다. 글자 1자의 차이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주 혼동하여 쓰고 심지어 통용해서 쓰기도 한다. 사실상, "태상황"과 "태상황제"는 서로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태상황"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사기>이다. 진시황이 천하를 평정한 후, 최고통치자를 "황제(皇帝)"로 규정하면서 특별히 "장양왕을 태상황으로 추존"했다. 그래서 장양왕 즉, 진시황의 주친인 영이인(嬴異人)은 중국역사상 최초의 "태상황" 타이틀을 단 인물이 된다. 태상(太上)은 최고, 무상이라는 뜻이며 극히 존귀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당시 영의인은 이미 사망한지 여러해가 지났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살아서 '태상황'이 된 사람은 유방(劉邦)의 부친인 유태공(劉太公)이다. 유방이 황제에 오른 후, 매번 부친 유태공을 만나러 갈 때, 유태공은 모두 신하의 예로 영접했다. 유태공이 보기에, "황제가 비록 아들이지만 인주(人主)이다, 태공이 비록 부친이지만 인신(人臣)이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군신간의 질서를 무너뜨릴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유방은 마음이 불편했고, 아들이 용이 되었으면, 무친도 그에 상응하는 명칭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조서를 내린다: "제왕(諸王), 통후(通侯), 장군, 군경(群卿), 대부는 이미 짐을 황제로 존칭해주지만, 태공은 명칭이 없다. 태공을 ㅐ태상황이라고 존칭하라."(<한서>)
진한시기의 '태상황'은 존호로서 영예이다. 황제가 아니고, 정치에 간여하지도 않는다. 이에 대하여 동한의 채옹(蔡邕)은 이렇게 말한다: "태상황은 제(帝)라고 부르지 않는다. 천자(天子)가 아니다(太上皇, 不言帝, 非天子也)" 초당의 안사고(顔師古)는 주석에서 이렇게 말한다: "천자의 부친이므로 '황'이라 한다.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므로 '제'라고 하지 않는다." 이를 보면, '태상황'은 당금황제가 인륜때문에 부친을 존칭한 것이고, 실제적인 정치권력은 없었다.
한나라이후 '태상황제'라는 칭호가 나타난다. 이는 황제의 위에 있는 황제이다. 예를 들어, 십육국시대의 후량의 천왕 여광(呂光), 북위시기의 헌문제 척발홍(拓拔弘), 북제의 무성제 고담(高湛), 당예종 이단(李旦)등이 생전에 퇴위한 후 모두 자칭 '태상황제'였다. 연대의 원근으로 보자면, '태상황제'는 '태상황'에서 연유한다. 다만 양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여광은 조기에 퇴위하였는데, 목적은 '태상황제'가 되어 권력을 순조롭게 이양하기 위함이었다; 척발홍은 퇴위후 '오일에 한번 태극전에서 조회를 하고, 자칭 짐이라 하였으며, 3품이상은 대형옥을 제외하고 스스로 결정했고, 처리하는 문서를 고(誥), 령(令)이라 했다"(<구당서>). 이를 보면, '태상황제'는 양위후 국가대사를 처리할 수 있었고, 당금황제이 위에 있는 황제였다.
고대의 "제(帝)"의 무게는 "황(皇)"보다 훨씬 무거웠다. 양자를 비교하자면, '황'은 허환표묘(虛幻縹渺)하나, '제'는 실권을 장악했다. 그래서 황제도 간칭으로 '제'라고 하는 것이다. '태상황'에는 '황'자만 들어 있는데, 원래 이는 상징적인 것이고, 명목상의 허함(虛銜)인 것이다.
대체로 '태상황제'가 '태상황'에서 연유하였기 때문에, 이후의 사류에서 '태상황'과 '태상황제'를 겸용, 혼용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중 <송사>가 가장 두드러진다. 사관은 동일하게 이미 양위한 황제를 부르면서 어떤 때는 '태상황'이라고 하다가, 어떤 때는 '태상황제'라고 한다.예를 들어, <고종기>에서 송고종 조구가 퇴위할 때 '짐은 태상황제라 칭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효종기>에서는 "태상황제는 어가를 덕수궁으로 옮기고....태상황이 천축사로 간..." 한편의 본기에서 양자가 겸용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광종기>에서는 광종 조돈(趙惇)이 퇴위한 후 '태상황제로 모셔지고, 태상황제가 병이 들어.."라고 되어 있으나, <영종기>에서는 '태상황이 병이 들어 사면령을 내리다. 신묘년에 태상황이 붕어하다>" 양편의 본기에서 선후가 서로 다르다. '태상황'과 '태상황제'의 본 뜻을 보면 '태상황'은 그저 황제의 부친이라는 의미이고, 대권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다. '태상황제'는 부친일 뿐아니라, 황제이다. 대권을 장악하고 있다. 그래서, 건륭황제는 선위후 어떤 존호를 받을 것인지에 신경을 많이 썼다. 퇴위전에는 특별히 이렇게 규정한다: "귀정(歸政, 황제에서 물러난) 이후 무릇 이를 아뢸 때에는 서면으로는 태상황제라 하고, 마주하여 주청할 때는 태상황이라 한다" 그 뜻은 정식문서에서는 반드시 '태상황제'라고 하되, 구두로 말할 때는 '태상황'으로 해도 된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건륭제는 죽을 때까지 권력을 놓지 않았다.(<청사고>)
남북조시기에, '태상황'과 '태상황제는 일부 다른 호칭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북제 후주 고위(高偉)는 "무상황(無上皇)"이라 존칭된다(<북제서>), 북주선제 우문찬은 자칭 "천원황제(天元皇帝)"라 한다(<주서>), 당현종 이융기는 "상황천제(上皇天帝)"라 하고, 또한 "성황천제(聖皇天帝)"라고도 한다.(<신당서>). 당순종 이송은 "응건성수태상황(應乾聖壽太上皇)"이라 칭한다(<신당서>). 송휘종 조길은 "교주도군태상황제(敎主道君太上皇帝)"라 한다.(<송사>) 서하의 신존 이준욱은 "상황(上皇)"이라 칭한다(<송사>). 필자의 고증에 따르면, 존호에서 단지 "황"자만 붙으면 권력을 장악하지 않는다. '태상황'과 같은 류이다. "황"과 "제"의 두 글자를 모두 붙이면 권력에 관여할 수 있는 것이고, '태상황제'이다.
중국역사상 나타난 20여명의 '태상황' 혹은 '태상황제'중 3명은 비교적 특수하다. 그들은 진의 사마충(司馬衷), 송의 조구(趙構), 청의 홍력(弘歷)이다.
사마충은 배분이 가장 낮은 태상황이다. 태상황은 통상적으로 황제의 부친 혹은 조부이다. 그런데 사마충은 숙조(叔祖, 작은 할아버지)에 의하여 태상황에 옹립된다. 서진 영강원년(300년), 사마의의 아홉째아들이자 사마충의 속조인 조왕 사마륜(司馬倫)이 '팔왕지란'에서 황제위를 찬탈하고, 진혜제 사마충을 물러나게 하며 금용성에 유폐시킨다. 찬탈행위를 가리기 위하여, 그리고 사람들의 입을 막기 위하여, 사마륜은 말도 안되게 사마충에게 '태상황'이라는 존호를 주어 역사의 웃음거리가 된다. 그러나 좋은 시절이 오래 가지는 못했다. 사마충이 복벽하고, 사마륜은 피살된다.
조구는 재위기간이 가장 길었던 태상황제이다. 소흥32년(1162년), 56세의 송고종은 '늙어서 병이 들었으며 오래전부터 물러나서 조용히 살고 싶었다"는 이유로 조서를 내려 황태자 조신(趙眘)에게 황제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태상황제'가 된다. 나중에 조구는 25년간이나 '태상황제'로 있었다. 81세가 되어서야 사망한다. 기실 조구가 한창 나이에 스스로 선위한 것은 '늙고 병들어서'가 아니라, 조신에게 은혜를 베풀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항금전략을 고쳐야 하는 등의 요소로 인한 것이었다.
홍력은 가장 권력이 강한 태상황제였다. 건륭제 홍력은 60년간 황제로 있은 후, 마음 속으로 갈등이 있었다. 계속하여 군림천하하고 싶기도 하고, 또한 61년간 황제로 있었던 조부 강희제를 넘어서고싶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태자 영염에게 황제위를 물려준다.사실상 건륭제의 퇴위후, "군국대사는 여전히 그에게 아뢰었고, 그의 지시에 따라 재결했다. 큰 일에는 칙서를 내렸다. 궁중에서 글을 쓸 때는 여전히 건륭연호를 썼다." 가경제 영염은 '고종을 태상황제로 모시는 것"외에 조석으로 그의 "훈정(訓政)"을 들어야 했고, "태상황제가 붕어하고나서 비소로 친정을 시작한다"(<청사고>)
봉건사회 황위종신제의 보충형식으로 중국고대의 '태상황'과 '태상황제' 선위제도는 연원이 길다. 동시에 주변국가에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영향을 미쳤다. 그중 월남의 진조(陳朝)가 가장 두드러진다. 진조가 건립된 후, 황위쟁탈전으로 내분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그리고 태상황과 황제의 "이주공치(二主共治)"제도를 실행하는데 이것이 진조때의 법도가 된다. 월남 고대사학가 오사련(吳士連)에 따르면, "진씨의 가법은...아들이 크면, 그가 정위(正位)를 승계받고, 부친은 물러나서 성자궁(聖慈宮)에 거주하며, 상황으로 칭한다. 정무는 같이 듣는다. 기실 대기를 전하여 후사를 정하여 창졸한 상황에 대비하는 것일 뿐이며, 대사는 모조리 상황이 결정했다. 사주(嗣主)는 황태자와 다를 바 없었다."(<대월사기>). 여기서 '기실 대기를 전했을 뿐...대사는 모조리 상황이 결정했다"는 것을 보면 중국의 태상황제제도와 동일하다. 월남 진조황제는 선위후 여러해동안 '태상황제"로 존칭되고 "태상황"으로 존친되지 않았다. 이것은 '태상황'과 '태상황제'가 서로 다른 개념임을 또 한번 알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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