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조종국(曹宗國)
서주의 "공화"는 중국고대사상 아주 유명하다. 첫째는 사마천이 공화원년(기원전841년)을 중국편년사의 시작으로 삼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이 '공화'라는 두 글자는 마침 현대정치의 '공화국(Republic)"과 같기 때문이어서, 사람들에게 당시에 파격적으로 두 명의 국공(國公)이 공동으로 천자 1인이 통치하던 것을 대신하여 정치를 담당했으니 아주 개혁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일부 정사에서는 당시에 발생한 사실을 주여왕(周厲王)의 포학무도하고, 무력으로 비방을 막아, '나랏사람들이 폭동을 일으켜" 그를 쫓아냈다는 것이다. 마치 혁명과도 같다.
기실 서주의 "공화"는 그런 것이 아니다. 당시 귀족들의 정치놀음일 뿐이었다.
첫째, 소위 주여왕이 포학무도하다는 것은 역사적 근거가 거의 없다. 그의 명성은 주로 아주 유명한 문장에 의하여 나빠진 것이다. 그 글은 바로 <국어>의 <소공간여왕미방(召公諫厲王弭謗)>이다. 이 글에서 주여왕은 반대의견을 듣지 않고, 특무를 시켜서 감시하고, 사사로이 비방하는 사람들을 붙잡아 죽여버렸다고 하였다. 주여왕은 이때부터 역사적으로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왜 '비방을 막았는지'를 확실히 알아보아야 한다. 어떤 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주여왕이 포학하다는 것은 대다수 백성들에게 폭정을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정책을 행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대귀족들이 독점하고 있던 산택토지(山澤土地)에 대하여 재산세를 거둔 것이다. 그리고 귀족혈통이 아닌 사람을 관리로 등용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귀족들로부터 강렬한 반발을 받게 된다. 이렇게 보면, 이 왕의 민주적인 태도를 지녔다는 것이고 그가 이런 정책을 견지하려 했던 것은 올바른 길이었다. 이것을 가지고 무슨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심지어 개혁적인 의미도 지닌다. 그래서 사마천은 <사기십이제후연표>에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급지여왕(及至厲王), 이악문기과(以惡聞其過), 공경구주이화작(公卿懼誅而禍作), 여왕수분어체(厲王遂奔於彘), 난자경사시(亂自京師始), 이공화행정언(以共和行政焉)" 보라. 태사공 사마천은 그래도 객관적으로 기재했다.
둘째, 사마천이 "공경구주이화작(공경들이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화를 만들었다)". 즉, 이 화를 일으킨 것은 '공경'이다. 귀족왕공들이 벌인 일니지 무슨 '나랏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킨(國人暴動)' 것은 아니었다. 기실, 그때의 소위 '나랏사람'은 그저 권력귀족과 도시의 신분과 지위가 있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사회하층 예를 들어 도시에 들어와서 일을 하는 여민(黎民), 논밭과 들에서 일하는 노예는 포함되지 않았다. 당연히 폭란이 일어나면 사회전체가 동란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모의하고 책동한 것은 귀족이었다.
셋째, "난이 경사에서 시작된다"는 과정을 보면, 주로 왕공귀족에 내부에서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의 소위 '화를 일으키다(禍作)"는 것은 단지 주여왕을 쫓아내는 것이고, 그로 하여금 '체'(지금의 산서성 곽주시)라는 곳으로 쫓아버린 것이다. 아마도 이 지방은 멧돼지가 많이 살던 곳인가 보다. 멧돼지를 사냥해서 먹는 것은 가능했을지 모르겠다. 어쨌든 정치적 피난이라 할 것이다. 결국 이 대왕을 죽음으로 몰아넣지는 않았고, 그저 그를 쫓아버리는데서 끝냈다. 이것은 마치 궁중쿠데타갔다. 가장 관건적인 것은 일부 과격한 귀족이 주여왕의 태자인 희정(姬靜)을 추살할 때, 소공은 주나라천자의 왕조정통을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내놓아 희정을 대신하여 죽게 만들었다. 당시 폭도들은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없었으므로 그렇게 속여넘긴다.주공은 이때부터 태자 희정을 잘 보호하고 길러준다. 14년후 주여왕이 죽을 때, 그로 하여금 왕위를 승계하게 하여 친정하게 한다. 그동안, 소공은 그저 주공과 두 사람이 공동으로 주왕을 대신하여 정치를 했다. 보라 그들이 한 행동은 얼마나 절제되었고, 분수를 지켰는가. 이것은 귀족왕공들의 정치놀음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더욱 심한 것도 있다. <사기>와 달리, 일부 사서 예를 들어, <죽서기년(竹書紀年)>에서는 또 다른 주장을 한다. 거기에서 얘기하는 바에 따르면, 근본적으로 무슨 "소공, 주공의 두 사람이 정치를 행하여 공화라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여왕이 죽고, 공백화(共伯和)라는 자가 천자의 일을 행했다" 혹은 "공백화가 왕위를 행했다."는 것이다. 즉, 당시에 공(共)이라는 나라의 백작이며 이름이 "화"인 인물이 경성으로 와서 왕을 쫓아내고 자신이 왕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공화'의 의미는 전혀 없다. 순전히 제후가 힘으로 권력을 빼앗아서 권력을 장악한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주장은 <좌전>등 다른 문헌에서도 방증이 있다. 소철, 나필, 역도원, 고염무, 양옥승등과 많은 근현대학자들은 이 설을 따르고 있다. 2011년 <청화간.계년>을 해독한 결과 "공화"는 "공백화"였다는 것이 밝혀진다. 이제 더욱 명백해졌다. "서주공화"는 그저 귀족들의 정치놀음 한판메 불과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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