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자지(李子遲)
내일(2012.11.8)이면, 온 세상이 주목하는 중국공산당 제18차 전국대표대회가 개막된다. 중국공산당은 이미 91년의 길고 복잡하며 곡절이 많았으나 휘황한 역정을 걸어왔다. 그렇다면, "중국공산당"이라는 명칭은 어떻게 확정된 것일까? 본인은 곧 출팔될 장편다큐멘터리문학작품인 <도기도락(濤起濤落): 장국도의 비극인생>(당대중국출판사)에서 이 일을 언급했다. 이 책의 주인공인 장국도는 일찌기 북경대학 학생으로 5.4운동의 학생자도자중 한 명이고, 중국공산당의 창시자이자 최초당원중 한 명이다. 중공 "제1차당대표대회"의 13명 대표중 하나이자, 대회의 주석이었다. 그는 중국공산당 제1기 중앙상무위원이며 조직부장이었다.
흐린 날씨에 하늘에서는 몇 방울의 가느다란 비가 내리고 있다. 북경의 사탄대가로 북쪽에 있는 신식 작은 건물은 날씨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시시때때로 열기에 넘친 사람들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이 작은 건물은 붉은 벽돌로 지어져 있고, 건물 안은 붉은색 바닥, 붉은 색 계단으로 되어 있어서, 세상사람들은 친절하게도 "북대홍루(北大紅樓)"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홍루의 제1층은 주로 도서관으로 쓴다. 모두 21개의 서고, 6개의 열람실로 나뉘어 있다. 동남쪽 모서리에 있는 2간짜리 방은 도서관주임의 사무실이다. 사람목소리는 거기에서 나오고 있었다.
"내가 중국에서 보고 들은 바에 따르면, 내 생각에 중국공산주의단체가 코민테른에 가입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나는 제3인터내셔널 대표의 자격으로, 이 자리에 참석하 여러분들이 공산당원이 될 것을 요청한다."
높은 코, 깊은 눈,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을 지닌 외국인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는 코민테른의 대표이자 이르쿠츠크국(즉, 극동국) 국장인 비신스키였다. 한 학생모양을 한 사람이 통역을 하고있었다.
"코민테른의 우리에 대한 지지에 감사한다. 그리고 당신, 비신스키 선생에게도 아주 감사드린다." 흰색 장포를 걸친 사람이 말을 시작했다. 그의 두 눈은 두터운 안경 속에서 굳건한 빛을 발했다. 그는 바로 북경대학 교수이자 북대도서관주임인 이대쇠(李大釗, 1889-1927, 자는 수상(守常), 하북 낙정 사람)이다.
"지금부터, 우리는 혁명동지이다. 동지들이여, 우리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저 몇몇 혁명의 씨이다. 이후 노력을 해서 밭을 갈고 열심히 일을 해서, 장래 꽃을 피우고 과실을 맺어야 한다." 이대쇠는 장엄하게 말했다.
한편으로 큰 귀를 학생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가 북대 철학과 학생인 장국도(1897-1979, 원래이름은 장특립(張特立), 강서 평향 상율사람이다)이다. 그는 자신이 이선생과 동지가 될 수 있다는데 기뻤고, 두 눈에서는 흥분의 빛이 드러났다.
장국도는 5.4운동때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이대쇠의 눈에 띈다. 그리하여 이번 비신스키와의 회담에도 참석하게 된 것이다. 당시 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이매갱(李梅羹), 유인정(劉仁靜)등이 있었다. 이들은 나중에 모두 북경공산주의소조의 구성원이 된다.
비신스키의 생각과 계획은 이대쇠, 진독수 등의 생각과 일치하였다.
그리하여, 이대쇠는 비신스키에게 소개서신을 쓴다. 이 러시아인은 바로 출발했고, 상해로 가서 북대 문과학장을 지냈고, 당시 상해에 살고 있던 진독수(1879-19422, 자는 중보(仲甫), 안휘 회녕 사람임)를 만난다. 진독수는 그가 온 뜻을 듣자마자 즉시 기뻐한다. 즉석에서 관련업무를 준비하겠다고 말하고, 비신스키를 대계도(戴季陶), 소력자(邵力子), 장동손(張東蓀)등에게 소개한다.
당시 <신청년>의 편집장은 진독수, 이대쇠와 호적이었다. <성기평론>의 주재인은 대계도, 이한준, 심현로였으며, <시사신보>의 주재인은 장동손이었다. 최초에 비신스키는 당의 건설범위를 이 세 곳으로 삼고자 한다.
그러나 그가 이 생각을 꺼내자 마자, 먼저 장동손이 놀라자빠진다. 그는 즉시 빠진다. 모순의 회고에 따르면, "장동손이 취한 이유는 그는 원래 이 조직을 학술연구성격으로 알았다. 지금 '공산당'이라고 부르니, 그는 참가할 수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는 연구생이었고, 그는 연구계를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다."
소위 "연구계(硏究係)"는 원래 북양정부에서 재정총장을 맡았던 국학대가, 유신의 영수인 양계초등이 성립한 "헌법연구회"를 말한다. 나중에 "더 이상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학술연구에만 정진한다"고 하여, "연구계'라 부른다. 북경의 <신보>와 상해의 <시사신보>를 기관지로 하였다. 장동손은 <시사신보>의 편집장으로, '연구계'의 우두머리중 하나이다. 그가 보기에, 사회주의학설은 학술로 연구할 수는 있지만, 그가 정치에 개입하고 싶지는 않았다. 호적 박사가 말한 "문제를 많이 연구하고, 주의는 적게 얘기한다"는 것이다. 그는 일찌기 장국도가 상해에서 놀고 있을 때 그와 교분이 깊었다. 그러나, 이때의 장국도는 그와 같이 연구할 마음은 없었다. 나중에 당을 건설하는 적극분자로 된다.
다시 며칠이 흐르고, 비신스키의 중국통역인양명재(楊明齋)도 상해 어양리 2호의 진독수의 개인주택으로 이사들어온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건당을 토론한다. 이한준이 당장을 기초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즉시 당의 명칭에 대하여 격렬한 논쟁을 벌이게 된다: 도대체 "중국사회당"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중국공산당"으로 할 것인가? 진독수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북경의 이대쇠, 장신부(張申府)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 일을 협의했다.
장신부(1893-1986, 원명은 장송년(張崧年, 하북 헌현사람)은 북대 철학과의 강사로 이대쇠와 관계가 밀접했다. 중국공산당의 3명의 주요 창시자중 한 명이다. 그는 이렇게 회고한다:
"서신은 아주 길게 적었다. 주로 창당에 관하여 썼다. 서신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일은 북대에서 너와 수상(이대쇠)이 얘기할 수 있다.(대강의 뜻이 이러했다) 왜 그런가? 하나는 진독수가 북대에서 문과학장을 지내서 아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다만 어떤 사람은 정치에 관심이 없어서 얘기하기 적절하지 않았다. 당을 만드는 일은 비밀리에 진행해야 한다. 둘은 진독수가 북경에 있을 때, 그는 수상과 나와 자주 함께 있었다. 그는 자주 북대도서관 이주임의 사무실로 왔다(홍루 1층의 동남모서리의 두칸짜리 방안), 생각이 일치했다. 그는 <신청년>을 창간했고, 우리는 자주 원고를 써서 보냈다. 민국7년(1918년) 십일월말에 <매주평론>을 함께 창간했다. 매번 출간시 인쇄는 선무문의 한 신문사에서 했다. 나는 일찌기 이대쇠 동지에게 교정을 요청했고 서로 잘 알았다. 그래서 진독수는 이 일을 북대에서 단지 나와 수상과만 얘기할만하다고 한 것이다. 그것이 우연은 아니다. 당시 건당에 어떤 명칭으로 할지 아직 확정되지 않았었다. 그래서 우리의 의견을 물어온 것이다. 나와 수상은 연구한 후, '중국공산당'이라고 하자고 했다. 그것이 바로 제3인터내셔널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회신을 보냈다."
가실 "남진북리(南陳北李), 상약건당(相約建黨)"은 이미 그 막을 열었다. 진독수는 비신스키의 도움하에, 상해에서 중국공산당의 발기조를 만든다. 이대쇠는 북경에서 적극적으로 호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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