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문재봉(文裁縫)
항우는 역사상 유명한 영웅이다. 전설에 따르면, 항우는 강동에서 거병하기 전날, 절강성 소흥 암가도의 항리촌(項里村)에 12면금라(十二面金鑼)를 묻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찾을 때 편리하고, 다른 사람이 훔쳐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항우는 마을 동쪽의 초만산위에 신비한 부호를 새겨두었다고 한다. 소문에 따르면, 이 신비한 부호를 풀기만 하면, 항우가 묻어둥 12면금라보물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보물의 파해방법을 찾아냈으며, 고가로 팔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신비한 부호에 대하여 다른 해독방식을 내놓기도 한다. 그러나, 12면금라가 도대체 어디에 묻혀있는지, 가치는 어느 정도인지, 지금까지도 여전히 수수께끼이다.
2005년 여름, 절강성 소흥여유국의 부국장 노석당(魯錫堂)은 현지 시, 현의 간부들이 보낸 몇 통의 동일인이 쓴 서신을 받아본다. 그 사람은 서신에서 이렇게 썼다: 누구든지 그에게 150만위안을 주면, 그는 즉시 항리촌 항우금라부호의 비밀을 알려주겠다
노석당은 서신에 써놓은 연락처로 상대방과 연락한다. 그는 상대방이 어느 분야의 고문화지식에 비교적 정통한 것같다고 느꼈다. 그러나, 상대방은 150만위안을 주면 비밀부호를 풀어주겠다고 하였으며, 항리촌 보물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비록 그 사람이 하는 말이 그럴 듯하기는 했지만, 노석당 및 소흥현 여여국등 관련부서에서는 사실이 확실해지기 전에는 어떠한 결론도 쉽게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그들은 이 일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어떤 비밀이기에 부호를 푸는데 150만위안이나 내라는 것일까? 그렇다면 보물의 가치는 엄청날 것임에 분명하다. 이를 보면, 항우의 금라부호는 엄청난 보물일 것이다.
"항우장보도(項羽藏寶圖)"는 초만산의 인적이 드문 한켠에 있다. 초만산은 소흥 두무첨 북록의 해발 70미터, 길이 400여미터의 산봉우리이다. 항리촌은 초만산의 산자락 아래에 있다. 새로 만든 항우묘는 바로 이 산의 서쪽에 있다. 산위에는 두터운 관목림이 있어서, 이곳에 보물이 있다는 소문은 있지만, 촌민들 중에서 산에 오르는 사람은 아주 적었다.
항우의 금라보물의 비밀을 푼다는 신비부호는 불규칙한 오변형 돌맹이 위에 새겨져 있다. 길이가 약 5미터이고 가장 넓은 곳이 3미터, 가장 좁은 곳은 1.5미터인 청회색의 돌맹이는 산허리에 엎드려 있다. 마치 거대한 거북이 등껍질과 같다. 이 돌맹이에 새겨진 것이 바로 전설상의 항우장보도이다. 새겨진 것은 날카로운 물건으로 새긴 것인데, 7-8센티미터의 깊이이고 5센티미터의 너비이다. 새겨 둔 것은 모두 네모난 가로선과 세로선이다. 이들 가로선과 세로선은 몇 개의 크고 작은 사각형을 형성한다. 이 모습은 고박하여 전문(篆文)같지도 않고, 금문(金文)같지도 않다. 가까이서 보면 전체 모습은 무슨 문자가 아니라 건뭎평면설계도와 비슷하다.
만일 이 장보도를 정말 항우가 남긴 것이라면, 최소한 2000여년간 존재한 것이 된다. 그렇게 긴 시간동안 왜 아무도 이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을까? 현지조사결과, 전문가들은 초만산 위의 신비부호가 항우의 금라장보도중 일부분일 수 있다고 알게 되었다. 현지인들에 따르면, 당시 항우는 장보도를 몇 개의 돌맹이에 새겼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부호의 비밀을 풀려면, 다른 '장보도'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함께 합쳐서 보아야 보물의 비밀을 풀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정말 소문과 같다면, 또 하나의 문제가 나타난다. 도대체 장보도는 몇 개의 돌맹이로 구성되었단 말인가? 그러나, 이 문제는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다.
비록 현지의 호사가들이 다른 '장보도'를 찾아보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발견되지는 않았다. 현재 유일하게 발견된 것은 바로 초만산의 그 장도도 하나 뿐이다.
여기서 장보도가 도대체 몇 조각인지는 별론으로 하고, 먼저 항우의 12면금라가 도대체 어떤 것인지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항우(기원전232-기원전202), 자는 우(羽), 이름은 적(籍)이다. 그는 진하상(秦下相, 지금의 강소성 숙천시 숙성구) 사람이다. 항우의 조부인 항연(項燕)은 초나라의 명장이다. 그래서 항우는 스스로 "서초패왕(西楚覇王)"이라 칭하고, 양초구군(梁楚九郡)을 자신의 영지로 삼았다.
처음에 항우는 숙부인 항량(項梁)을 따라 반진(反秦)의 거병에 참여한다. <사기. 항우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항량이 살인사건을 저릴러, 항우와 항량은 함게 오중(吳中)으로 피난했고, 그들은 회계일대(즉 소흥)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당시 그들은 항리촌 일대에 은거했으며, 현지 촌민들의 비호하에, 역량을 길렀다. 병사들과 전마를 구하였다. 금방 그들은 8000명의 강동자제를 모아 항리촌에서 훈련시키고, 항우는 12면금라를 주조한다. 이것을 가지고 사병의 훈련시키는데 썼다. 거병전에, 항우는 항리촌 사람들에게 보답하기 위하여 사병을 시켜 산 위에 이 12면금라를 묻게 했다고 한다.
소흥 현지에서 감호계열총서를 출판하였는데, 책에서 항우와 그가 매장한 금라보물의 전설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반진을 위하여, 항우는 숙부 항량과 항리촌 일대에서 구 귀족자제 8천여명을 모았고, 12면금동라를 가지고 전투훈련을 했고 ,무술연습을 했다. 이 12면금동라는 정교하게 만들었다. 80%의 황금과 20%의 황동으로 주조되었고, 징의 크기는 바퀴와 같았고, 소리는 크고 맑았다. 뒤에는 12생초도를 주조했으며 가치가 상당했다. 시간은 빨리 흘렀고, 항우는 항리의 백성들과 이별할 시간이 되었다. 그는 12면금동라를 항리촌에 남기기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사병들에게 명하여 밤에 항리촌의 초만산부근에 구덩이를 파고 금동라를 묻었다. 그후에 초만산 위에 부호를 새겼다. 만일 이 부호를 해독할 수 있으면 그 가치가 상당한 12면금동라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강희회계현지>에도 항량,항우 숙질에 대하여 기록이 있다: "항량, 항적은 회계의 우두머리 은통을 죽이고, 회계에서 거병했다" 책에서 말한 항적이 바로 항우이다. 여기서 말하는 회계는 바로 소흥부근이다. 이를 보면, 2천여년전에, 항우와 그의 숙부 항량은 확실히 소흥부근에서 진나라에 항거하는 거병을 한 것이다. 비록 <강희회계현지>에 항우, 항량의 거병지점을 상세히 적지 않았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이 항리촌에서 거병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항우가 일찌기 이곳에 은거한 바도 있고, 그것때문에 마을 이름도 '항리촌'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뿐아니라, 현지 백성들은 항리촌에 항우묘도 만들었고, 항우를 보살로 칭한다. 항우를 위하여 묘(廟)를 만드는 것은 전국각지에서 많지 않다. 이를 보면, 항리촌은 항우와 역사적인 연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지의 금라보물에 관한 소문도 사실일지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전설에서 말하는 크기가 수레바퀴만한 12면금라는 도대체 얼마만큼의 가치를 지녔을까?
1973년이래, 고고학자들은 진시황 병마용갱에서 대량의 전차를 발굴한다. 그중 적지 않은 전차의 차바퀴는 직경이 1.4미터가량이다. 만일 항우가 매장한 금라의 크기가 이들 수레바퀴와 같다면, 이 금라의 직경도 1.4미터가량일 것이다. 이렇게 큰 징은 오늘 날도 보기 힘들다. 더더구나 금라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징(라)은 일반적으로 가운데가 볼록하다. 이 볼록한 부분의 대소, 두께 및 징의 면적비례에 따라 징의 소리의 높낮이가 정해진다. 낮은 주파수의 징이 내는 소리는 소리가 묵직하지만 멀리까지 전파할 수 있다. 항우가 12면금라를 만든 목적은 군대를 훈련하기 위함이었으니, 그가 주조한 징은 아마도 저주파수의 징일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들 중에서는 진나라말기의 징주조기술수준에 의문을 품고 있다. 그들은 당시의 기술로 1.4미터의 금라를 만들 수 있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1.4미터의 금라는 백오륙십근에 이를텐데, 당시의 기술수준으로 이를 완성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전문가의 이 점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마도 일반인들은 징을 주조하는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징을 만드는 원시적인 가공공법은 철추로 두드려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현재의 징은 최대직경이 1.5미터가량까지 만들 수 있다.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공기추의 현대화생산공법을 쓴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진나라말기의 가공공법으로 징의 직경은 기껏해야 70-80센티미터가량일 것이라고 말한다.
금라의 금함유랑에 대하여도 일부 전문가들은 의문을 나타낸다. 근거는 무엇인가?
이들 일부 전문가들은 춘추전국시대에 징은 이미 나타났다. 당초 징의 명칭은 향라(嚮鑼)였다. 왜냐하면 향동(嚮銅)으로 주조했기 때문이다. 배합방법은 구리와 주석을 일정비율로 제련하여 향동을 얻는다. 이 비율은 77.5%의 구리와 22.5%의 주석이다. 그후에 사람들은 향동주조를 통하여 각종 소리를 내는 기계를 만들었다. 예를 들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증후을편종(曾侯乙編鐘)도 바로 향동으로 주조한 것이다.
소리를 내는 기기에 반드시 향동을 써야 하는 이유는 만일 향동을 쓰지 않으면 이들 기기가 사람들이 원하는 소리를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초 항우가 징을 만든 것이 군대를 지휘하기 위해서라면, 징은 반드시 큰 소리를 내야 한다. 그런데 전설상의 항우가 정말 80%의 금과 20%의 구리로 금라를 주조했다면, 그가 주조한 12면금라로는 아예 군대를 지휘할 수 없을 것이다. 너무 부드러워서 아마 거의 칠 수조차 없게 될 것이다.
이 점을 분명히 안다면, 사람들은 항우의 12면금라의 진실한 성분에 대하여 의문을 품을 것이다. 설마 당초 항우가 항리촌의 백성을 위하여 남긴 것이 금라가 아니란 말인가? 그저 12면의 직경이 1미터도 되지 않는 동라라는 말인가? 아니면 당초 항우가 남긴 것이 징이 아니라, 다른 군대를 지휘하고 신호를 보내는 물건이라는 말인가?
만일 징이 아니라면, 항우가 군대를 지휘하고 신호를 보내는데 무엇을 썼을까? 중국의 성어중에 이런 말이 있다. 격고명금(擊鼓鳴金). 이 성어의 의미는 바로 군대를 지휘하는데 쓰이는 두 가지 악기이다. 즉 부대를 지휘할 때 앞으로 돌진하라고 할 때는 북을 쓰고, 후퇴하라고 할 때는 금을 쓴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자료나 고고학적 발견에 따르면 여기의 '금(金)'이 가리키는 것은 '순우(錞于)'이다.
호남성 장가계박물관의 진관지보는 바로 국가1급문화재인 호뉴순우(虎鈕錞于)이다. 이 전국시대의 청동 순우는 무게가 4.4킬로그램이고, 높이가 42센티미터이다. 타원형의 윗부분에 어깨가 돌출되어 있고, 배부분에서 아래로는 줄어든다. 타원형기둥모양을 나타내고, 가운데는 비어 있다. 꼭대기의 중앙에는 호랑이 한 마리를 주조했다. 호랑이의 귀와 눈은 분명하고 입을 벌려 이빨을 드러내고 있으며, 꼬리를 약간 치켜 올렸고 끝부분은 말려있다. 모양이 살아있는 것같다. 장가계의 이 호뉴순우는 벽이 비교적 두터워서 우리가 이것을 칠 때, 소리가 아주 낮게 깔리지만 멀리까지 전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기하여 우리는 항우의 명금수명때 치는 것도 순우일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순우와 라(징)는 모양이 천지차이이다. 그렇다면 왜 전설상의 항우보물을 12면금라라고 불렀을까? 12면순우가 아니라. 이 문제에 대하여, 음악연구소의 전문가인 일석이 하는 말이 아마도 핵심을 찌른 것일 것이다. 생각해보라. 일반 백성들에게 고고학적 지식이 있었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평소에 볼 수 없는 순우가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했다. 만일 그들의 전설과 이야기가 대대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면 보물에 대하여 사람들이 잘 알아듣고 이해하는 쪽으로 얘기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야기하는 사람은 또 다른 소리를 내는 악기의 이름으로 순우를 대체하였다. 그것이 바로 징이다. 그래서 전설상 항우보물으 금라는 아마도 또 다른 소리를 내는 악기인 순우일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징이 아니라.
만일 정말 위에서 추측한 바와 같다면, 항우가 초만산에 새겨놓은 장보도에 감춰진 보물은 12면금라가 아니라 12면청동순우일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우리에게는 의외일 것이다. 그러나 어찌되었던 보물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추측은 그저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항우가 매장한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추측은 접어두고, 다시 그 장보도를 살펴보자. 이 장보도에 대한 민간의 해석방법은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완전한 장보도가 아니라고 보고, 산 위에 다른 한 장 혹은 몇 장이 더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이 장보도에는 도대체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이천여년이래로, 무수한 사람들이 초만산의 부호를 연구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이 부호의 의미를 해석한 사람은 없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명말청초 소흥의 저명한 학자인 장대(張垈)가 부호의 비밀을 풀기 위하여 시도했다고한다. 초만산에서 몇 달을 거주하였으나, 그는 실망하고 돌아간다. 장대는 중국 명대의 문학가이고, 그는 취미가 다양하였고, 심미적인 취향이 있었다. 그는 산과 물로 놀러가는 것을 좋아했고, 정원배치에도 관심이 있었다. 음악도 알고, 차도 즐겼다. 그는 수장을 좋아했고, 감상수준도 보통이 아니었다. 희곡에도 정통하였다. 이렇게 학문이 뛰어난 그도 항우보장부호의 비밀을 풀지는 못했다. 이를 보면 이 신비부호가 얼마나 풀기 어려운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사기.항우본기>에는 이런 말이 있다. "항량(항우의 숙부)는 사람을 죽여서, 적(항우)과 함꼐 원수를 피해 오중으로 간다. 진시황에 회계를 순유할 때, 절강을 건넌다. 항량과 항우는 함께 보았다. 항적이 말하기를, "저걸 내가 대체하겠다" 항량은 그의 입을 막으며, "함부로 말하지 말라. 구족이 멸할 일이다." 사서에는 항우와 숙부 항량이 항리촌에 은거했다는 간단한 기록들이 있다. 그래서 역사의 여러가지 수수께끼는 많은 부분을 역사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현지촌민은 <사기.항우본기>의 기록을 이렇게 해석한다. "<사기>에서 진시황이 회계를 순유하였다는 것의 회계는 우리 옆에 있는 회계산이다. 우리 마을은 회계산에서 십여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사기>에 항우가 진시황이 회계산을 순유하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으니, 항우가 우리 마을에서 살았다는 것도 가능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 주장에 대하여 저명한 역사지리학자 겸 복단대학 교수인 갈검웅 교수는 동의하지 않는다. "항우가 소흥 항리촌에서 생활했을 리 없다. <사기>에서 언급한 '회계'는 소흥의 회계산이 아니다. 당시의 '회계군'이다. 이 군은 주로 오늘날의 강소남부와 절강대부분을 포함한다."
비록 갈검웅 교수가 이렇게 말하였지만, 이것을 가지고 항우가 항리촌에 거주한 적이 있다는 설을 부정하기는 부족하다. 그러므로, 갈검웅 교수는 추가로 이렇게 설명한다: "당시 항우는 그의 숙부 항량을 따라 '오중'에 피난했는데, 이 '오중'은 강소성 소주일대를 가리킨다. 소주는 전국시대 초나라의 속지이다. 그곳에는 옛날 초나라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 그래서 초나라 장군의 후예인 항우가 소주로 피난을 간 것이다. 그리고 초나라의 옛사람들은 당시 소주지역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성안에서 생활했고, 항우와 항량도 거병할 병사와 군마를 모집하기 위하여 자연히 그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다. 즉, 소주지구에서 생활했을 것이다. 어찌 절강 항리촌과 같이 구석진 작은 산골마을에서 병마를 모을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일부전문가들은 이에 근거하여 항우보물, 신비부호는 민간전설일뿐이라고 본다. 과학성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때는 민간전설도 우리에게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어떤 전설은 아무런 근거없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람들이 더 많은 발견을 하지 않는한 우리가 적합한 해석을 하지 못할 뿐이다.
항우금라의 신비부호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이미 이런 해석을 내렸다: "묘전묘후(廟前廟後), 삼각전두(三角田頭), 삼안교두(三眼橋頭), 삼차로구(三岔路口), 유십이면금동라(有十二面金銅鑼)" 이 몇 마디 말에서 언급한 위치는 도대체 어디일까? 항우문화를 여러해동안 연구한 한 사람은 초만산 및 그 주변지형을 둘러보고는 이러게 판단을 내린다. 항우가 당시 매장한 보물은 항리촌 마을입구의 한 오래된 우물 아래에 있다고. 유감스러운 것은 우물은 이미 메워지고 그 위에 도로가 들어섰다.
그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부호해석문중 '묘전묘후'는 바로 보장이 항우묘의 전후에 있다는 말이고, '삼각전두'는 바로 항우묘에서 멀지 않은 삼각형의 밭을 가리키며, '삼안교두'는 처음에 그도 어려워했다. 항리촌 부근을 찾아보았지만 '삼안교'를 찾을 수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연한 기회에 항리촌의 노인이 마을 머리의 작은 강, 항우묘부근에 3개의 구멍이 있는 작은 다리가 있었다고 했다. 나중에 도로를 닦으면서 구멍 1개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삼안교두'라는 말도 풀렸다. 그렇다면 현재 항왕묘의 곁에 있는 구멍이 2개있는 작은 돌다리가 그것이다. 돌다리 아래에는 맑고 바닥이 보이는 작은 시내가 흐른다. '삼차로구'만 남았는데 이것은 찾기 쉬웠다. 그것은 바로 다리부근에 삼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2미터 너비의 시멘트도로가 되었고, 전체 마을을 관통한다.
그는 자신이 해석한 부호에 근거하고, 주변지점을 분석하여 마을입구 시멘트도로의 주택지구변을 꼽았다. 기괴한 것은 그가 부호를 풀었다면서도 그는 그 곳을 파보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가지 가능성은 있다. 그는 자신이 한 것은 그저 추측이고, 자신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항리촌의 촌민들도 이 추정한 장소를 들은 후에도 보물을 캐는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한 촌민은 이렇게 해명한다. 그의 집은 1980년대에 도로가에 집을 지었는데, 1미터 이상 깊이로 땅을 팠었지만, 금라는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추측을 현지 사람들은 그다지 믿지 않는다.
여러 해동안, 항우보물의 전설은 현지에서 유행했다. 그러나 보물매장지에 관하여 추측이 나왔는데도 현지인들은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도로를 한번 파보자는 말조차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기이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신비부호를 새겨놓은 돌맹이는 여전히 산 속에 조용히 쉬고 있다. 그것이 지키는 것은 아마도 보물이 아니라, 보물에 관한 수수께끼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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