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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텐진 9개국 조계(租界)의 각국세력범위

by 중은우시 2008. 12. 12.

 

 

 

영국조계(1860년-1943년)

 

1860년 12월, 영국 주중공사 브루스는 <<북경조약>>상의 "영국 교민이 통상항구의 토지와 가옥을 임차할 수 있다"는 규정(조계를 설립할 수 있다는 규정이 아님)에 근거하여, 직예총독 항복(恒福)에게 요청하여, 강제적으로 영국조계지역을 얻어냈다.

 

미국조계(1860년-1902년)

 

1860년 영국이 천진에서 강제로 조계지를 얻어내자, 미국도 영국조계지의 남쪽에 조계를 만든다. 동으로 해하(海河)에 접하고, 서로는 해대도(海大道, 지금의 大沽路)에 이르고, 북으로는 박목리도(지금의 창득도)와 영국조계지에 접했으며, 남으로는 마장도에 접했다. 미국조계지는 미국남북전쟁으로 인하여 정부의 비준을 받지 못했다. 1880년 미국영사는 이후 행정관리를 회복할 권리를 보유한다는 전제하여 조계를 되돌려준다. 그리하여 천진해관이 대리관리한다. 1896년, 미국은 다시금 조계관리권을 포기한다고 성명을 발표한다. 다만, 청나라정부는 응답하지 않는다. 1902년, 미국조계는 영국조계에 양도하여, 영국조계와 합병된다.

 

프랑스조계(1861년-1947년)

 

1861년 6월 2일, 프랑스정부와 청나라정부는 <<천진자죽립프랑스조계조관>>을 체결하여, 프랑스조계를 설치한다. 영국조계의 북쪽으로 자리잡는다. 면적은 439무이다. 그러나, 천진초기의 대외무역은 그다지 성행하지 못했다. 이곳에 온 소수의 외국상인은 주로 천진성 동문밖의 삼차하구의 궁북대가에 거주했다. 천진의 영국조계에도 약간의 주택만이 건축되었다; 천진의 프랑스조계내에는 심지어 아무런 프랑스기관도 없었다. 그저 1개의 영국, 미국 교민들이 사용하는 종교건축 합중회당이 있을 뿐이었다. 프랑스의 천진에서의 주요활동은 삼차하구에 위치한 망해루천주교회에서 이루어졌고, 프랑스영사관도 인근의 궁북대가에 설치되었다. 1870년 6월에 천진교회사건이 벌어지고, 외국교민은 속속 조계지역으로 이주한다. 천진의 영국조계가 가장 먼저 개발된다. 프랑스는 보불전쟁에서 패배함에 따라 국력이 쇠퇴하여, 천진의 프랑스조계는 한동안 전혀 개발되지 못했다. 188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시정건설에 착수한다.

 

독일조계(1895년-1917년)

 

1895년 5월, 독일주중공사 쉰커는 청나라총리아문에 조회를 보내어, 독일이 청일전쟁때 일본에게 요동반도를 반환하도록 압박하는데 공로가 있다는 것을 들어, 청나라정부에 조계지를 요청하며, 영국, 프랑스와 동등한 대우를 요청했다. 청나라정부는 천진해관도로 하여금 주천진독일영사와 상의하여 조계지를 정하도록 지시한다. 같은 해 구월 십삼일(10월 30일), 천진해관도 성선회, 천진도 이민침은 독일영사 E. von Seckendorff와 <<천진조약항조계협정>>을 체결하여 독일이 천진에 영구히 조계지를 설치하도록 허락한다.

 

일본조계(1898년-1943년)

 

1896년 7월 21일, 청나라정부는 일본정부와 <<중일통상행선조약>>을 체결한다. 1898냔 8월 29일, <<중일통상행선조약>>에 근거하여, 청나라정부와 일본정부는 <<천진일본조계협의서 및 부속의정서>>를 체결하여 일본조계를 획정한다. 남으로는 프랑스조계에 접하고, 서북으로는 구천진성과 마주본다. 그러나 개발이 진행되지는 않았다.

 

러시아조계(1900년-1924년)

 

1900년 팔국연합군의 침입후, 러시아가 먼저 강점한다. 나중에 다시 청나라정부는 광서26년(1900년) 십일월 구일 <<천진조계조관>>을 체결한다. 그리하여 정식으로 러시아조계지가 획정되었다. 1920년 러시아 십월혁명후 중국이 대리관리한다. 1924년 새로 성립된 소련정부는 정식으로 북양민국정부에 반환한다. 그리하여 천진특별행정구 제3구(특3구)가 된다.

 

오스트리아조계(1902년-1917년)

 

1902년 11월 18일, 오스트리아 주천진서리영사 Bernauer은 천진해관도 당소의와 <<천진오스트리아국조계장정합동>>을 체결한다. 1902년 12월에 개시하며, 면적은 1030무이다. 천진의 오스트리아조계는 해하, 경산철로와 금종하(지금의 사자림대가)의 사이에 있다. 동쪽에는 도로(지금의 북안도)를 사이에 두고 천진 이탈리아조계와 이웃하였다.

 

이탈리아조계(1902년-1946년)

 

1902년 6월 7일 천진해관도 당소의는 신임 이탈라아 주중공사 Gallina는 <<천진이탈리아조계장정합동>>을 체결한다. 이탈라이조계로 획정된 범위는 위치가 천진의 오스트리아조계와 천진 러시아조계의 사이에 있었다. 남으로 해하에 접하고, 북으로 경산철도에 접한다. 기차역에서 멀지 않아서, 시중심의 천진프랑스조계와 천진일본조계와 강을 사이에두고 마주본다. 면적은 771무이다.

 

벨기에조계(1902년-1931년)

 

1900년 팔국연합군의 천진, 북경침입때, 벨기에는 파병하여 참전하지 않았다. 다만 11월 17일, 벨기에 주천진영사 메이루더는 천진영사단에 선포한다. 그는 벨기에 주중공사의 명을 받아, 해하동안의 러시아점령지역 아래의 길이 1킬로미터의 지역을 점령하겠다고. 1902년 2월 6일, 청나라정부 천진도대 장련분과 벨기에 주천진대리영사 가더스는 <<천진벨기에국조계합동>>을 체결한다. 위치는 러시아조계이남으로 해하와 대직고촌의 사이에 있으며, 소손장까지 이른다. 면적은 740무이다. 동시에, 만일 나중에 벨기에조계의 상업이 흥성하면, 벨기에조계에서 경산철도간의 통로를 둘 수 있다고 했다. 이는 벨기에조계지의 예비조계지였다. 이 토지는 다른 나라에 팔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