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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1900년, 호주의 중국정벌기 (2)

by 중은우시 2008. 5. 8.

 장왕부의 호주군인

 

약탈의 광기

 

<<시드니 모닝 헤럴드>>는 뉴사우스웨일스부대의 한 사병이 북경에서 보내온 서신을 실은 바 있다. 중국수도의 비참한 생활이 인간지옥과 같아도 적었다. 거리에는 수천의 주인없는 개가 이리처럼 중국인의 썩기 시작한 시신을 먹고 있고, 밤이 되면 총소리가 끊이지 않는다고 했다.

 

북경의 각국 군대는 군기가 대체로 엉망이었다. 약탈은 거의 모든 국가의 장교들이 묵인했다. 서방사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당시 열강군대는 북경에서, "강간이 레저가 되고, 도살이 오락이 되었다"

 

호주군대는 명을 받아 의화단 두령이 보유한 저택이라는 곳을 습격했다. 그리고 집안의 가구는 영국군사령부로 옮겨서 쓰고, 남은 것들은 모두 약탈했다. 진귀한 가죽, 비단, 도자기는 금방 경매되었고, 그방 약 350멕시코달러를 얻었는데, 여러 사람들이 나누어가졌다. 다만, 나누어가진 후에, 상사는 다시 명을 내려, 그들에게 물건을 원주인에게 되돌려주라고 했다. 원래 그들의 정보는 잘못된 것이었고, 목표주택의 이웃을 턴 것이었다.

 

호주군대로 중국인에 대한 약탈행위에 가담한다.

 

한번은, 라마묘에 주둔하고 있는 호주군대가 중국정보원으로부터 보고를 받는다. 북경의 북쪽 20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장신장(長辛莊)에는 의화단이 대량의 재물을 묻어두었는데, 개략 20만냥 백은이 된다고 하였다. 영국군의 전리품관리책임자인 Tulloch대위는 아주 흥분했고, 즉시 25명의 서남아인으로 구성된 사병을 데리고 가면서 호주장교 Bertie Black에게 통보하여 같이 가도록 한다.

 

목적지에 도달한 후 그들은 땅을 판다. 그 중국정보원은 다음 마을인 고려영(高麗營)에 가서 더 많은 재물을 묻어두었는지 알아보겠다고 하고 간다. 그런데, 이 중국인은 고려영에서 분노한 동포들에게 맞아죽는다.

 

장신장에서 아무 수확도 얻지 못한 Tulloch 대위는 즉시 그의 부하를 데리고 고려영으로 가서, 어디선가 총으로 그들을 공격한다. 그들은 현지의 우두머리와 부자를 붙잡아와서, 왜 영국군을 공격하는지 따진다. 그리고 3만5천냥 백은의 벌금을 내도록 한다. 그러지 않으면 마을을 없애버리겠다고 하고, 두 사람을 인질로 삼는다.

 

고려영에서 자금을 모으고 있을 때, Tulloch대위는 대규모 의화단원들이 결집한다는 정보를 듣는다. 그리하여 부하를 끌어모아 고려영을 공격하고, 40여명을 죽여버린다. 마을의 거의 절반이 폐허로 된다.

 

소식은 북경으로 전해진다. 영국군 사령관인 가슬리는 깜짝 놀라서, Tulloch대위에게 즉시 북경으로 되돌아오도록 명령한다. 영국군은 아주 황급히 퇴각하고, 대다수의 속죄금도 챙겨가지 못한다. 가슬리는 이런 행동을 엄금한다. 확실한 증거가 있지 않으면 절대로 적대행위를 하지 말도록 엄명한다.

 

1901년 1월 1일후, 가슬리장군은 친히 고려영을 토벌하고, 속죄금을 받아오려고 한다.

 

이 "빚받아내는 군대"는 눈이 내리는데도 목적지까지 힘겹게 찾아간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이미 모두 도망간 뒤였따. 연합군은 할 수 없이 마을의 절을 부숴서 분을 풀 수밖에 없었다. 호주의 종군기자인 웨니는 이렇게 썼다. 이런 더러운 '군사행동'의 유일한 목적은 파괴와 약탈이며, 의화단을 진압한다는 것은 그저 핑계일 뿐이다. 이는 '가치있고 대등한 전투를 갈망했던' 호주군대는 점차 불만을 가지게 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하게 된다.

 

1900-1901년의 화북지역은 이렇게 각종 핑계를 가진 사람들이 약탈하는 곳이 되어버린다. 먼저 의화단, 그 다음은 관군, 다시 각국 연합군. <<시드니 모닝 헤럴드>>는 일찌기 미국신문의 말을 인용한 바 있다: "북경에 진공한 것은 약탈의 축제이다" 확실이 늦게 도착한 호주군대는 성과를 올릴 좋은 기회를 놓쳤고, 약탈의 좋은 기회도 놓쳐버렸던 것이다.

 

"문명 신북경"의 건설

 

뉴사우스웨일스부대는 북경의 경찰업무도 담당했다. 그들은 중국인의 도박을 금지시키기도 했고, 여러차례 도박장을 급습하기도 했고, 도박꾼을 체포하기도 했다. 그러나 효과는 아주 미미했다. 위생방역측면에서, 그들은 중국인들을 모아서 거리를 청소시키고,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사람에게는 채찍 50대의 중벌을 과하기도 했다.

 

재미없는 경찰업무에 묶인 호주군인은 충분한 맥주가 없었으므로, 중국의 백주를 배우기 시작한다. 몇잔의 백주가 뱃속에 들어가면, 호주군인은 미치기 시작한다. 사고도 끊이지 않았다. 결국 영국군은 백주를 마시는 것을 금지한다. 그리고 중국인에게 백주를 호주병사에게 팔게 되면 바로 채찍을 맞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치안책임을 맡은 호주군대는 몇명의 군관을 법관으로 임명하여, 중국인간의 분쟁을 처리했다. 한번은 한 중국기독교도가 와서 다른 중국인이 권세를 이용하여 그를 공갈협박했다고 고발했다. 후자는 일찌기 이홍장의 종복이었다. 그러나, 이홍장의 종복은 거꾸로 이 기독교도가 외국세력을 이용하여 그를 협박했다고 반소를 제기했다. 호주군관은 양쪽이 모두 거짓말한다고 보고, 둘 다 채찍 50대를 맞도록 판결했다.

 

종군기자인 웨니는 <<데일리 텔리그라프>>에 보낸 기사를 통해서, 이홍장의 종복을 채찍으로 때린 것은 사람들에게 그의 주인이 더 이상 그를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기독교도를 채찍으로 때린 것은 신앙을 남용하여 사적인 이득을 취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이홍장의 종복은 채찍을 맞은 후에 호주군관에게 세번 절을 하였다. 원래 그는 서양인의 손에 들어가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던 것이다.

 

보정부(保定府)로 진공: 추악한 약탈행위

 

천진에 머물던 빅토리아부대는 1900년 10월의 보정부전투에 참가한다. 이번 행동은 10월 12일에 시작하였고, 모두 25일이 걸렸다. 호주군대의 전시기록에 의하면, 마을은 기본적으로 파괴되었고, 행군은 아주 힘들었으며, 물자조달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현지의 젖소 한 마리가 잘못 호주군대로 뛰어들었는데, 이는 빅토리아부대에게 오랜만에 소고기를 포식할 기회를 부여했다.

 

군수물자공급은 아주 곤란했다. 호주군대는 1인당 1일 겨우 2개의 옥수수빵을 공급받았다. 이런 곤경은 10월 20일이 되어야 완화되었다. 그날 그들은 팔십주에 도착하고, 한 민가에서 대량의 닭과 달걀을 얻는다. 이 집의 주인은 가족을 안전지대로 대피시키고, 자신은 호주군대를 위하여 음식을 해주고, 땔감을 날랐다. 호주군인 하나는 집주인이 아이들 옷을 몰래 숨기는 것을 보았다. 그는 호주군인들이 아이를 해칠까봐 두려워한 것이다.

 

10월 21일, 연합군이 보정에 도착한다. 그러나 중국수비군은 이미 투항했다. 빅토리아부대는 소위 전도사와 서양상인을 학살하였다는 '죄인'들을 감독했고, 이들을 독일군에게 보내어 처결하게 하는 업무를 맡았다. 독일군은 죄수들에게 스스로 무덤을 파게 하고는, 1열로 세워놓고 총살했다. 시신은 바로 자신이 판 무덤 속으로 떨어졌다. 그 후에 묻어버렸다. 살인업무를 엄격하고 정교하게 하는 것을 보고 호주군대는 깜짝 놀란다.

 

보정부 정벌은 사실 군사적으로 전혀 필요없는 짓이었따. 이는 그저 중국평민에 대한 잔혹한 보복행위였다. 독일인들은 주중국공사 Klemens Freiherr von Kettler가 청나라군대에 살육당하자, 그 보복행위를 한 것이다.

 

출발일부터 11월 7일 천진으로 되돌아오기까지, 빅토리아부대는 "기본적으로 적을 만난 적도 없고, 적과 전투를 한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으며, 본 것은 모두 약탈, 방화와 처결이었다"

 

호주군을 따라 움직인 Keogh대위는 사후에 독일인들이 계획대로 교통용구를 준비하지 않았다고 질책하고, 프랑스인들이 고의로 호주군대에게 가장 먼 길을 돌아가도록 어레인지했다고 비난했다(행동은 프랑스군이 통일적으로 지휘했다).  그리하여, 프랑스군대가 제일 먼저 약탈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는 이전에 북당전투에서 러시아군이 기차를 배정하지 않고 자기들이 먼저 공격했던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시드니 모닝 헤럴드>>의 기자가 Keogh에게 물었다. 왜 연합군간의 협력이 이렇게 잘 안되느냐고. 그러자 그는 "우리 브리튼인은 규칙을 지키지만, 다른 나라는 각자 마음대로 해서 그렇다"고 답변한다.

 

영국인과 러시아인간에 하마터면 전투가 벌어질 날 뻔 하다.

 

보정부 정벌후, 빅토리아부대의 주거환경은 많이 개선된다. 결국 천막에서 집으로 옮긴다. 그리하여 추운 겨울을 지낼 수 있게 된다.

 

바이투트는 11월 14일 중국기독교도를 호송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그는 다른 호주사병과 함께 300발의 총알을 가지고, 안내인과 통역인과 함께 출발한다. 도중에 두명의 일본사병도 참가한다. 이 6명의 서로 다른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은 저녁에 한 방에서 함께 휴식을 취했다. 이에 대하여 바이투트는 만감이 교차한다. 다음 날 저녁 그들은 의화단에 의하여 곤경에 빠진 기독교도를 찾아낸다. 55명의 부녀아동, 4명의 상인 2명의 중국관리를 천진까지 호송한다. 위험에서 빠져나온 중국인들은 그들에게 여러번 감사인사를 했다.

 

빅토리아부대가 참가한 가장 중요한 행동은 러시아군대에 대항한 것이었따. 1901년, 연합군이 천진을 점령하고, 영국군은 엔지니어의 건의를 받아, 경진당철로변에 샛길을 만들고자 한다. 이는 러시아인들의 방해를 받는다. 러시아인은 샛길이 지나는 토지가 그들의 조계지역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쌍방은 갈수록 대치가 격화되고, 일촉즉발의 상태가 된다. 빅토리아부대는 명을 받고 증원에 나선다. 뉴사우스웨일즈부대도 북경에서 긴급히 60명을 천진으로 보낸다. 러시아군이 배치한 6천명과 비교하면, 영국군은 겨우 1900명에 불과했다. 약세가 분명했던 것이다. 영국은 홍콩에서 황급히 대량의 지원군을 받는다. 정예 로얄웨일즈머시너리는 다시 화북으로 이동명령을 받는다. 결국 다각적인 외교적인 노력을 거쳐, 영국과 러시아는 무장충돌을 면하게 된다

 

연합군이 점령한 지역의 경찰로서, 빅토리아부대는 자주 군기가 빠진 각국 군대를 만나게 된다. 일찌기 한 프랑스부대와 마찰이 발생하는데, 프랑스군은 칼을 들고 공격하여, 호주병사가 여러명 다치기도 하였다.

 

남호주 군함

 

뉴사우스웨일즈부대, 빅토리아부대와는 달리 남호주식민지는 Protector호 군함을 파견한다. 홍콩에 도달한 후 정식으로 영국로얄해군에 편입된다. 그리고 남호주식민지군의 남색군기는 로얄해군의 백색군기로 바꿔달게 된다. 그리고 영국해군이 사람을 보내어 함장을 맡고, 원래의 함장은 참모장으로 격하된다. Protector호군함은 산해관과 진황도를 공격하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그러나 사고로 모두 취소된다. 그들은 그저 운송과 호송업무를 맡으면서 중국에서 평화로운 시절을 보낸다.

 

11월 2일, 영국해군은 Protector호에게 호주로 돌아가라고 명을 내린다. 그런데, 화북에서 홍콩으로 오는 도중에 태풍을 만난다. 11월 24일, 이 함대는 홍콩에서 로얄해군을 퇴역하게 되고, 다시 호주해군의 편제에 들어가고 남호주로 되돌아간다. 12월 18일, 그들은 시드니에 도착한다. 이때부터 신년까지 그대로 머물다가 1901년 1월 1일 연방성립식을 거행할 때 참가한다.

 

해외에서 5개월간, Protector호는 한번도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 병사들은 이때문에 불만이 많았다. 호주함장 Clare는 <<아들레이드 업저버>>와의 인터뷰에서, 자기의 부대는 중국에 있던 영국군함중 가장 우수한 것의 하나였고, 질병에 걸린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다른 군함에는 대체로 15-20%의 환자가 있었다. 선박도 잘 관리되어 있었고, 수리가 전혀 필요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을 참전시키지 않은 것은 가장 큰 유감이라고 하였다.

 

귀국 귀국

 

1901년 3월부터 호주군대는 중국에서 철수하기 시작한다. 방어업무는 홍콩에서 온 로얄웨일스머시너리가 전부 승계한다. 17명으로 구성된 뉴사우스웨일스부대는 스스로 화북에 남아서 고액의 급여를 받으면서 화북지역에서 영국이 통제하는 철도를 관장한다.

 

귀국전에, 뉴사우스웨일즈부대의 1등해병 나이트는 정신질환으로 자살한다.

 

3월말, 뉴사우스웨일스부대와 빅토리아부대는 방어업무를 인계하고 천진에서 만난다. 3월 29일, 영국군이 파견한 운송함을 타고 호주군대는 대고항구를 떠난다. 호주병사들은 거의 모두 크고 작은 중국의 '기념품'을 가지고 있었다. 전체 군단은 2개의 큰 기념품을 가지고 떠났는데, 하나는 본문의 처음에 언급했던 스페인구리대포이고, 다른 하나는 당시 이미 3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던 동종(銅鐘, 구리시계)였다. 이는 지금도 호주의 수도 캔버라의 전쟁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운송함은 4월 5일 홍콩을 떠나, 귀국길에 오른다. 20일후, 부대는 시드니에 도착한다. 거기서 엄격한 검역을 받은 후, 5월 3일, 호주정부는 시드니에서 군단을 위한 성대한 환영의식을 행한다. 두 부대는 모두 시드니의 저명한 원형부두를 통하여 상륙한다. 그리고 열병을 받고, 민중들의 환호를 받는다. 이후, 빅토리아부대는 시드니의 Redfern역에서 기차를 타고 멜버른으로 간다.

 

1903년, 두 부대의 모든 사병은 대영제국으로부터 '중국전쟁훈장"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