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미상
1. 이성량은 누구인가
이성량은 자가 여계(汝契)이고 호는 은성(銀城)이라 하며, 명나라 요동 철령위 사람이다. 명세종 가정5년(1525년) 7월 14일에 태어났으며, 명신종 만력46년(1618년)에 사망했으니, 향년 92세이다. 만력4년에 요동총병관에 올랐으며, 만력7년 5월에 전공으로 영원백(寧遠伯)의 작위를 받았으며, 만력8년에는 세습이 허용되었다. 만력19년에는 투항한 적을 죽여서 공을 가로챘으며, 독직발호등의 죄를 받고 탄핵을 받아 직위가 박탈된다. 만력29년에는 수보(首輔, 명나라의 재상) 대학사인 신시행(申時行)의 추천으로 신종은 특별히 나이 76세의 이성량에게 다시 요동을 맡긴다. 만력36년에 다시 탄핵을 받는다.
이성량은 요동을 22년간 지켰고, 전공이 탁월했다. 만력초기, 왜를 물리친 후 북으로 옮겨온 척계광(戚繼光)과 협력하여, 경사북부와 동북지방에서 몽고와 여진의 각 부족에 큰 타격을 가했고, 영락제이후 유례없는 큰 전과를 거두었으며, 위세를 떨쳤다. 그리하여 천하의 장수중 최고로 손꼽혔다. 목종과 신종의 두 황제는 이성량의 승리로 인하여 대첩을 고한 것이 16번이고, 묘에 제사를 지낸 것이 14번이다. <<명사초략. 이성량전>>에는 "이성량 부자는 인걸이다"라고 적고 있다.
혁혁한 전공으로 이성량의 집안은 일세를 풍미한다. 이씨부자는 한 집안내에서 여러 장군이 나와서 그 세력이 엄청났다. 특히 이성량이 제2차로 요동을 맡았을 때, 요동세감(遼東稅監)인 고준은 이성량과 결탁하여 백성들의 고혈을 짜냈다. 요동사람들은 전란의 고통과 과대한 세금부담을 못이겨 "도로에 걸어가는 사람들은 모두 기운이 없으며 발걸음이 무겁고 옆을 흘겨본다. 초췌하기 그지 없으며, 반은 사람같고 반은 귀신같다. 눈을 들어 볼 수가 없을 정도이다"
이외에 이성량은 만력11년에 아타이를 습격하는 전투중에 길안내를 하던 부자를 잘못 죽였는데, 그들이 바로 누르하치의 조부와 부친이다. 이성량은 당시 15세인 누르하치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 그를 거두어 길렀다. 그리고, 누르하치가 "13벌의 물려받은 갑옷을 가지고 병사를 일으킨" 때로부터 다른 부족을 병합할 때도 눈감고 모른척 해주었다. 이런 점에서 이성량은 명,청 역사에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나중에 누르하치가 청하, 무순을 습격하며 공개적으로 명나라에 반기를 든 만력46년에는 이미 이성량이 사망한 이후였다.
2. 이성량의 선조는 조선인인가?
<<명사. 이성량전>>에 의하면, "이성량은 자가 여계이다. 고조인 영(英)은 조선에서 귀의해왔고, 철령위지휘첨사의 직을 받았다"
이성량의 선조가 명나라초기에 조선에서 건너왔다는 주장은 사료의 기재로 인하여 더이상 다툼없는 사실이 되었다. 그리고, 이씨는 이에 대하여 다른 말을 한 적이 없다.
<<이씨보계(李氏譜係)>>(이수덕 강희간본. 1991년 8월 철령시박물관의 인쇄본에 근거함)의 서문에는 "오리의 조상은 조선에서 철령으로 이주했다"라고 적고 있고, "이씨의 원적은 조선인이다. 명나라초기에 강을 넘어 중국에 귀의했고, 철령으로 갔다. 그곳의 풍토가 순후하여 살기 시작했다"
이성량의 장남인 이여송(李如松)은 제독의 신분으로 만력기간에 조선에 파병갔을 때, 일찌기 조선의 군신에게 여러차례 자신의 가족이 예전에 조선에서 중국으로 건너갔던 사정을 언급했었다.
오함(吳晗)이 모은 <<조선왕조실록중의 중국사료>>라는 책의 선조27년(만력22년)4월(수정실록)을 보면: "이여송이 동쪽으로 올 때, 부친인 영원백 이성량이 글을 보내왔다:' 조선은 나의 조상의 고향이니, 너는 열심히 하여라' 이여송은 이 부친의 서신을 따르던 사신에게 보여주면서, '집안어른의 가르침이 이러하시니 어찌 귀국을 위하여 전력을 다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는 선조가 우리나라의 이산군(理山郡)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사람들은 어딘지 잘 모르겠다고 한다"(제5책제1997-1998쪽)
같은 책 선조26년(만력21년) 3월 기묘에는: "접반사인 한응인이 보고했다: 제독(이여송)이 어제밤에 차비통사 진효남과 동생 이여매를 불러서 방에서 얘기했는데, 여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국왕과 같은 성이라는 것을 아는가? 우리 조상은 두만강에서 대대로 살았는데, 간음을 저질러서 동녕위로 이주한 것이다'"(제5책 1743쪽)
같은 책 선조26년(만력21년) 3월 병인에는: "병조판서 이항복이 말하기를: 제독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희 나라 사람이다. 오대조가 죄를 지어 중국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올대 가져온 활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러면서 그 활을 꺼내서 보여주면서 '...나는 일품관으로 너희 국왕을 대함에 태만하지 않도록 하겠다' 자칭 독로강(獨魯江) 사람이아고 하였습니다. 독로강이라 함은 지금의 강계땅입니다"
같은 책 선조26년(만력21년) 2월 을사에는 "내(이여송)가 떠나올 때 어르산에게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서는데, 어르신이 불초를 불러 말씀하시기를: '고려는 조상이 살던 곳이다. 너는 잘 헤아려야 하고, 해를 끼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말을 마음 속에 간직해서 잊지 않고 있다"(제4책1699쪽)
3. 이성량이 여진혈통을 보유했을 가능성
최초로 이성량이 여진혈통을 지녔을 것이라고 의심한 사람은 일본인인 원전일귀(園田一龜)였다. 그는 <<이성량과 그 가족>>이라는 글(<<사학잡지>> 35편9호에 실림. 1931년)에서 이씨의 조상은 순수한 조선인이 아니라 여진사람같다고 하였다.
<<이씨보계. 세차원시>>에는 "이씨의 원적은 조선인이다. 명나라초기에 강을 건너 귀의했고, 철령으로 갔다. 풍토가 순후함을 흠모하여 눌러살았다. 변형역은 철령동남쪽 최공보의 북쪽에 있는데 씨족사람들은 노분(老墳)이라고 부른다. 나중에 정혁으로 비의 기록은 이미 훼손되고, 족보도 잃어버려서 입철근수(立哲根穗), 이합산(李哈山), 이하패노(李廈覇努), 이파도리(李把圖理), 이응니(李膺尼)의 다섯 분 선조에 대하여는 고증할 수없어서 감히 주석을 달지 못하겠다"
원전은 이 글에서, 이성량의 이러한 선조들은 조선의 초산(楚山) 지역에 살았고, 압록강의 남안에 해당하는데, 원말명초때에는 여진족이 거주하던 곳이다. 이외에 이성량의 조선선조중에 "이파도리"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이름은 분명히 만주어인 빠투루(巴圖魯, 용사라른 뜻)와 같은 의미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로 인하여 그는 이성량이 무공으로 천하에 유명하게 이름을 날릴 것이 아마도 그의 혈관내에 흐르는 강인한 여진의 피때문이 아닐까 라고 추측했다.
<<이조실록>>에도 이씨의 조상이 조선국경내에 거주했던 지역을 세 곳으로 적고 있다: 이산군, 두만강, 독로강(강계)
<<동국여지승람>> 권55에는 "이산군은 북으로 압록강 12리에 있다. 설치연혁을 보면, 원래 여진이 거주하던 두목리(豆木里)이다. 고려공민왕(1351-1374)때 사람과 재물이 점차 실해졌다. 본왕조(조선) 태종2년(명나라 건문4년, 1402년)에 산양호, 도을한, 봉화대, 등이언등의 땅과 합하여 이주(理州)라 하였다. 13년에 이산군으로 개명했다"
<<대동여지.초산>>에는 "건립설치: 고려충렬왕(1274-1298) 4년(1277년) 도목리만호를 설치했다. 원래 고구려, 발해때 거란여진이 대를 이어 살던 땅이다. 후2년에 이주로 고치고, 충혜왕 후3년에 초산으로 고쳤다. 본왕조 태종2년에 산양회, 도을한, 봉화대, 등이언의 땅과 합하여 다시 이주라고 하였다. 13년에 이산군으로 개칭했다. 세종때 앙토리로 치소를 옮기고, 세조때 진관차령산양회를 두었다. 경종4년에 도호부로 승격시키고, 정종초에 초산으로 개칭했다" 이로써 볼 때, 초산, 이주, 이산군은 모두 한 곳이고, 설치연혁에 따라 바뀐 이름일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 권55에는: "강계도호부...건치연혁: 고대에는 독로강이라고 했다. 고려공민왕 10년에 만호를 두었다. 본왕조 태종원년에 입석, 등이언의 두 땅을 합하여 석주(石州)라고 하였다"
태종이년에 등이언은 다시 이주에 합병되어 이산군이 된다.
이처럼, <<조선왕조실록>>에서 이씨의 조상이 거주하였다는 장소중 이산군, 독로강이 교차하는 지점이 한 곳 있다 바로 등이언(等伊彦)이다. 비록 기계적으로 이씨조상이 거주하던 곳이 바로 등이언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한 것은 이 지역이 "두목리"라는 이름으로 불리웠고, 이 지역이 일찌기 여진족이 거주하던 지역이라는 것이다.
"두만강"이라는 것은 사실 "토문강"을 얘기하는 것이라는 것이 한국과 일본의 해석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훈춘강은 여진의 땅이다. 동림성에 이르러 두만강에 합해진다. 알도리 야인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원나라때 요동의 판도는 넓었고, 남으로는 한반도중부에 이르고, 동으로는 바다에 이르며, 북으로는 흑룡강 이북에 이르렀다. 이 넓은 땅이 모두 원나라 소유였다. 이 지역내에 사는 사람의 과반수는 여진족이었고, 이들은 요, 금, 원의 세 왕조를 거치면서 4세기동안 이 곳에 거주했다.
그러므로, 이씨의 조상이 여진족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당시 조선에 거주하던 지역은 오랫동안 여진족이 살던 지역이라는 것은 확인된다.
여기에 "이파도리"라는 여진의 냄새가 풀풀나는 이름을 보더라도 전원일구의 추리는 전혀 근거없다고 할 수는 없다.
이외에 이여송은 또한 "나의 조상은 대대로 두만강에 살았는데, 음란한 일을 해서 동녕위로 이주했다"고 했다는 점이다. 동녕위는 원래 동녕, 남경, 해양, 초하, 여진의 오천호가 있는 곳이고, 홍무13년에 설치되었다. 19년 7월애 고쳐졌다" 명나라초기에 동녕위는 여진천호소였다. 이것도 방증이 될 수 없을까.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 > 역사인물 (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효종(明孝宗): 일부일처제를 실천한 유일한 황제 (0) | 2008.01.30 |
---|---|
탕화(湯和)의 처세술 (0) | 2008.01.21 |
개성황제 명무종(明武宗) (0) | 2007.11.30 |
주환(朱紈) : 역사를 후퇴시킨 명말의 충신 (0) | 2007.06.17 |
모문룡(毛文龍) : 명나라 말기의 장수 (0) | 2007.05.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