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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187

제갈량 vs 이엄 (1): 이엄축출사건의 수수께끼 글: 의사리(衣賜履) [의사리]: 제갈량의 제4차북벌은 의 기재에 따르면, 위나라병사 3천여명을 참살하고, 거기장군(車騎將軍) 장합(張郃)을 사살하였다. 그러나 군량조달이 제대로 되지 않아, 철군하게 된다. 비록 휘황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한중(漢中)으로 돌아온 후, 제갈량이 한 첫번째 조치는 논공행상이 아니었다. 심지어 논공행상을 전혀 하지 않았고, 당초 그와 함께 유비에게 백제성에서 탁고(託孤)를 받았던 2인자 이엄(李嚴)을 관직에서 축출하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아주 이상하다. 이엄이 축출된 이유는 황당하기 그지없다. 그리하여 역사가들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를 몰랐다. 예를 들어, 전여경(田餘慶) 선생은 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엄의 거동은 어쨌든 지나치게 괴류(乖謬)하여 상정(常情)에 부합하.. 2022. 3. 7.
사마의(司馬懿)의 스승은 누구일까? 글: 위문한사(魏門寒士) 삼국시대의 사마의는 아마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삼국시대에 사마씨가족은 최대의 승리자이니까. 이는 사마의가 지닌 능력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이렇게 보면 사마의는 분명 명사(名師)의 가르침을 받았을 것같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제갈량, 방통의 두 천재는 모두 사마휘(司馬徽)의 제자이다. 사마휘는 사마의와 관계가 있기는 하지만, 사마의는 사마휘를 스승으로 모시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사마의의 스승은 누구일까? 기실 사마의의 두 아들의 이름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마의의 가장 유명한 두 아들은 바로 사마사(司馬師)와 사마소(司馬昭) 둘일 것이다. 두 사람은 적출이면서 아주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 두 사람의 이름을 합치면 "사소(師昭)"이다. 그렇다고 사마의의 .. 2022. 1. 19.
촉한(蜀漢)에서 강유(姜維)의 북벌을 반대한 세 사람은..... 글: 구개명(瞿凱明) 제갈량은 생전에 계속 북벌을 주장했고, 정사기록에 따르면 전후로 5회에 걸쳐 북벌을 진행한다가 오장원에서 병사한다. 그는 진정 "국궁진췌(鞠躬盡瘁), 사이후이(死而後已)"를 실천했다. 제갈량의 사후, 강유는 제갈량의 계승자로서 계속 북벌을 주장하고 한실의 부흥을 도모했다. 그러나, 강유의 북벌에 대하여 3명이 강력하게 반대한다. 그리고 이 세 사람은 촉한에서 아주 중요한 사람들이다. 비록 그들이 강유의 북벌을 강력하게 막았지만, 강유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북벌을 감행한다. 강유의 북벌을 반대한 첫번째 인물은 비위(費褘)이다. 비위는 관직이 대장군에 이른다. 보정(輔政)기간동안 강유가 매번 북벌할 때마다 비위는 제한한다. 강유에게 제공한 병력은 만명을 넘지 않았다. 비위는 강유에게.. 2021. 12. 1.
제갈량 처가의 집안배경 글: 문방장거(文房掌柜) 제갈량의 혼사에 관하여는 그가 명사인 황승언(黃承彦)의 "황두흑부(黃頭黑膚, 머리카락은 누렇고 피부는 검다)"의 추녀를 취한 것으로 후세에 널리 알려져 있다. 제갈량은 원래 산동(山東)사람이다. 나중에 융중(隆中)으로 이주해 온다. 융중에서 머무는 10년동안 제갈량은 보통의 청소년에서 시무를 아는 준걸로 성장한다. 외지에 와서 사는 사람으로서, 그는 어떻게 청년파의 우두머리로 떠오를 수 있었을까? 제갈량 본인의 총명과 재지를 제외하고고 그가 양양으로 온 후에 건립한 인맥관계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원인은 현지의 호족세력 및 권력집안들과 혼인관계를 맺었다는 것이다. 당시 유표(劉表)가 통치하는 양양일대의 주요 호족세력으로는 방(龐), 채(蔡), 황(黃.. 2021. 11. 3.
칠종칠금(七縱七擒)(II): 맹획은 남만의 오랑캐가 아니다. 글: 의사리(衣賜履) 건흥3년(225년)의 봄날, 제갈량은 병력을 세 갈래로 나누어 남하한다: 문하독(門下督), 파서군(巴西郡, 사천성 낭중시)사람인 마충(馬忠)이 장가군(牂牁郡, 귀주성 복천현)을 공격하고, 내항도독(庲降都督) 이회(李恢, 이때의 이회는 평이현에 주둔하고 있었고, 평이현은 장가군 소속이며 귀주성의 필절시이다)은 익주군을 공격하고, 제갈량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수로를 통해 월전군(越嶲郡, 사천성 서창시)으로 들어갔다. 동시에 건위군태수이자 광한 사람인 왕사(王士)를 익주군태수로 임명한다. 오랑캐왕 고정(高定)은 모우현(旄牛縣, 사천성 한원현 동북), 정작현(定筰縣, 사천성 염원현), 비수현(卑水縣, 사천성 소각현)의 일선을 따라서 내려오며 많은 보루에 주둔시켰다. 제갈량은 고정의 인마가 .. 2021. 10. 25.
칠종칠금(七縱七擒)(I): 제갈량은 왜 직접 남정에 나서야 했을까? 글: 의사리(衣賜履) (제갈량의 "칠종칠금"은 삼척동자도 아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제갈량은 일곱번이나 소수민족의 우두머리인 맹획을 붙잡은 후, 잘 먹이고 대접한 다음 보내주고 다시 싸운다. 맹획은 결국 제갈량에게 완전히 굴복한다. 그때부터 촉의 남쪽에 있는 소수민족은 더 이상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제갈량과 맹획은 마치 민족융합을 상징하는 천고의 아름다운 한쌍인 것처럼 전해지고 있다. 그럼 실제 상황이 그러할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유비가 사망하기를 전후하여, 익주의 남부지역에서는 여러번 반란이 일어난다. 유비의 후사를 처리한 후, 관료들을 정돈하여 조정의 상하관계를 바로잡은 후 제갈공명은 남부지역에 손을 쓰기로 한다. 다만 그 전에 반드시 해야할 일이 하나 있었다. 동오와의 연합 유비가 .. 2021. 10. 23.
위,촉,오 삼국의 승상제도는 어떻게 달랐을까? 글: 장공성조(長空星照) 삼국이 정립된 후, 가장 먼저 건국하여 황제를 칭한 위(魏)는 승상을 두지 않는다. 그후에 건립된 촉(蜀)과 오(吳)는 처음부터 승상을 둔다. 더욱 재미있는 점은 오나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승상을 두었지만, 촉한은 제갈량이후에 더 이상 승상을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위나라. 건안13년 조조가 승상에 오른다. 건안18년에 이르러 조조는 위공(魏公)이 되고, 기주(冀州)내의 10군은 그의 봉지가 된다. 두달 후, 조조는 위나라의 종묘사직을 건립하고, 십일월에 이르러, 상서(尙書), 시중(侍中)과 육경(六卿)을 설치한다. 원래 건안연간에, 조정백관은 모두 조조의 말을 들었고, 승상이 되었으며, 승상부를 두며, 모든 정령은 승상부에서 나왔다. 조조.. 2021. 10. 19.
중국역사로 본 추녀(醜女)의 아름다움 글: 매상유(梅桑楡) 중국고대의 사대미녀가 있다. 서시, 초선, 왕소군, 양옥환. 그녀들의 미모는 전설이 되었지만, 초상화나 사진이 남아 있지는 않다. 초상화가 없기 때문에, 후세에 무한한 상상의 여지를 남겨 주었다. 누구든지 상상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그녀들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상상해볼 수 있다. 만일 백명의 마음 속에 백명의 햄릿이 있다면, 천명의 마음 속에는 천명의 사대미녀가 있을 것이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이 4명의 미녀중 앞의 3명은 정치적 공로가 있다. 서시는 월을 도와 오를 멸망시킨 공이 있고, 초선은 왕윤을 도와 동탁을 죽인 공이 있다. 왕소군은 변방의 충돌위험을 없애고, 한나라와 흉노간의 우호를 건립시킨 공이 있다. 양옥환은 아무런 공로도 없다. 그리고 당현종 이융기를 홀려, 처형인 .. 2021. 4. 29.
방통(龐統)은 동오(東吳)의 간첩이었을까? 글: 섭시문사판(攝詩文史版) 음모론자들이 보기에 방통이 유비에 귀순한 것은 동오의 사명을 띈 것이라고 한다. 맥락은 대체로 이러하다: "공조(功曹)는 중요한 직무이다. 주유의 공조인 방통을 동오사람들은 왜 스스로 쓰지 않고, 노숙으로 하여금 유비에게 추천하게 했을까? 서천(西川, 사천)을 취하는 것은 제갈량이 제안한 것이다. 그러나, 실행시에 유비는 망설였고, 제갈량도 아무런 입장을 표시하지 않았다. 그런데, 방통은 계속하여 유비에게 자신을 데리고 사천에 들어가자고 권유했을까? 익주로 들어간 후, 유비는 왜 방통의 건의를 거의 듣지 않았을까? 방통은 적진으로 돌진하는 무장도 아닌데, 왜 군진의 앞에 섰다가 죽게 되었을까?" 그렇다면, 방통이 유비에게 귀순한 것은 정말 동오인들의 계획인 것일까? 혹은 방통.. 2021. 4. 20.
유비, 관우, 장비는 어떻게 생겼을까? 글: 문재봉(文裁縫) 를 보면,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의 용모는 모두 선명한 특색이 있다. 너무나 선명하여 수천수만명 속에 있어도 바로 찾아낼 수 있고, 한번 보면 잊지 않을만한 그런 용모이다. 먼저 유비를 보자. "키는 칠척오촌, 두 귀는 어깨까지 늘어뜨려지고, 두 팔은 무릎 아래까지 내려간다. 눈으로 자신의 귀를 돌아볼 수 있고, 얼굴은 관옥(冠玉)같고, 입술은 분을 바른 것같다." 다음으로 관우를 보자: "키는 구척, 수염은 2척이다; 얼굴은 대추같고, 입술은 분을 바른 것같다; 단봉안(丹鳳眼), 와잠미(臥蠶眉)이다. 용모는 당당하며 위풍이 늠름하다." 장비는 또 어떨까?: 키는 팔척, 표두환안(豹頭環眼, 표범같은 머리에 동그란 눈), 연액호수(燕頷虎鬚, 큰 턱과 호랑이수염), 목소리는 큰 우.. 2020. 11.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