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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154

최후의 국민당군대 글: 강녕지부(江寧知府) 2008년 7월 3일, 타이페이의 중정기념관(中正記念館)앞의 광장에 400여명이 집결했다. 그들은 백의(白衣)를 입고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있었으며, 한편으로 타이완주민신분을 획득하기를 원한다는 구호를 외치면서, 다른 한편으로 다 함께 처량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오후부터 심야까지 계속된 집회에서 현장의 질서를 유지하던 타이페이시 경찰은 '진정서'를 '입법원장 왕진핑(王金平)의 비처장에게 전달했다. 결국, 타이완의 내정부문책임자는 심야에 선포했다: 그들의 자수하는데 동의하고, 자수할 때 임시신분증명을 발급할 것이며, 이를 통해 취업과 거주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다. 아마, 여러분들은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들 타이완섬내에서 갈 곳이 없는 흑호(黑戶, 무호적자)들이 태국버마방면에.. 2022. 8. 9.
장사(長沙): 천년고성(千年古城)인데 왜 문화재가 거의 남아있지 않을까? 글: 호연문사(浩然文史) 장사는 중국남방의 저명한 천년고성(千年古城)이고 일찌기 춘추전국시대부터 지방의 중요도시였으며 "굴가지향(屈賈之鄕)", "초한명성(楚漢名城)"이라는 아름다운 칭호가 붙어 있다. 그러나 만일 외지의 사람이 장사를 여행가게 되면, 좀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비록 최근 들어 마왕퇴한묘(馬王堆漢墓)같은 중요한 고고학적 발견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다른 역사적인 도시들과 비교해보면, 장사에 유명한 명승고적은 확실히 적은 편이다. 오래된 도시 장사의 역사는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 모든 것은 1938년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 1938년 11월 13일 새벽, 장사성, 백성들은 전쟁이 곧 닥칠 것이라는 그림자속에서 불안하게 잠들었다. 새벽2시경 시내에 돌연 불꽃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 2022. 8. 5.
1949년이후 대륙과 대만의 연해도서쟁탈전 글: 김이(金二) 1 조금 나이가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해녀 여민병(女民兵)을 주제로 한 영화 를 기억할 것이다. 당시에는 전체인민이 반드시 보아야 하는 영화였다. 의 스토리원형은 동두(洞頭)의 여민병이다. 여민병이라고 하여 여자들이 그저 총을 들고 폼만 잡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 여민병의 훈련강도는 남성정규군에 못지 않았다. 심지어 임신8개월의 여민병까지도 사격훈련에 참가했다. 당시 동두도(洞頭島)의 여민병은 토비 45명을 생포하고, 토비 10명을 죽였으며, 특무 12명을 체포하고 총기 28점을 노획했다. 1965년 2월 절강성의 민병경연대회에서 왕월하(王月霞)는 중기관총, 경기관총, 돌격총, 소총등 7개의 사격항목에서 100여발의 총탄을 모조리 적중시켜, 절강성인민정부, 성군구로부터 "신창.. 2022. 8. 5.
"도주장군(逃跑將軍) 손원량(孫元良)": 탐재호색(貪財好色)한 그는 103살까지 살았다. 글: 민국삼십칠(民國三拾柒) 1924년, 손중산(孫中山) 선생은 군벌을 타도하고, 군사인재를 배양하기 위하여 이름도 유명한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를 설립한다. 모두 알다시피 황포군관학교의 앞의 7기동안 호종남(胡宗南), 장영보(張靈甫), 두율명(杜聿明)등 우수한 장군들을 배출해냈고, 그들중 대부분은 "황포계"로 '교장' 장개석(蔣介石)이 최고지도자로 성장하는 기반이 된다. 그중에는 황포 1기출신의 손원량이 있는데, 장개석이 크게 인정한 인물이다. 장군으로서 손원량은 잘 싸웠고, 적지 않은 평가할만한 우수한 전적도 있다. 송호항전(松滬抗戰)때 그는 부대를 이끌고 묘행진(廟行鎭)에서 일본군을 성공적으로 격퇴했으며, 이 전투는 당시 국제적으로 '국군이 최초로 일본군을 격패시킨 전투'로 평가되었다. 그리하여.. 2022. 7. 25.
장백령(張伯苓): 남개대학(南開大學)의 창립자, 그리고 주은래(周恩來)와의 관계 글: 임휘(林輝) 당금 중국대륙의 명문대학중에서 천진의 남개대학은 역사가 깊은 곳이다. 많은 중국인들은 이 대학에서 주은래가 공부한 적이 있다고 알고 있다. 남개대학의 창립자인 장백령은 남개대학을 창립했을 뿐아니라, 남개중학, 남개여자중학, 남개소학, 중경남개중학등 남개시리즈학교들을 창립하여, 민국시기 중국 사립학교의 모범이 되었다. 장백령은 스스로를 이렇게 묘사한 바 있다: "나는 천재도 아니고, 장점이랄 것도 없다. 내가 평생 노력하여 자그마한 성취를 이룬 것은 내가 교욱에 대하여 신앙과 흥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뿐이다." 그와 일찌기 남개대학을 다닌 적이 있는 주은래간의 이야기도 중공의 당매체에서 계속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모르고 있는 것이 있다. 옛날 주은래는 장백령에게 제적당.. 2022. 7. 22.
“소면호(笑面虎)" 모인봉(毛人鳳) 글: 심사기담(尋史奇談) 그는 일찌기 국민당 특무의 "1호인물"이었다. 그의 성공의 길에는 여자의 도움을 빼놓을 수 없다. 성공하기 전에 그는 은인자중하며 오랫동안 후덕하고 착실한 사람처런 행동하여, 모든 사람이 그에게 속았었다. 그가 고위직에 오르자 그는 칼을 빼들었고, 심지어 그를 여러해동안 따랐단 부하들조차도 액운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일생동안 명리를 추구하여, 적을 많이 만들었고, 심지어 '태자야'를 끌어내릴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 말년은 한없이 처량했고, 모두가 그를 떠난다. 병이 위중했을 때 민간의 비방을 썼다가 목숨을 잃는다. 그가 누구인가? 그는 바로 국민당의 특무두목 "소면호" 모인봉이다. 모인봉의 성공에는 한 여자를 언급해야 한다. 그 여자는 바로 그의 처인 향영심(向影心)이다. .. 2022. 7. 18.
왜 중국인들에게 "입장(立場)"만 있고, "시비(是非)"는 없게 되었는가 글: 청운(靑雲) 중국인이라면, 모두 "입장을 확실히 한다(站穩立場)"는 말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무엇이 "입장"인가? 모택동의 '최고지시' 하나가 바로 '입장'이 무엇인지 설명한다: "무릇 적이 반대하는 것은 우리가 옹호한다. 무릇 적이 옹호하는 것은 우리가 반대한다!" 허난성의 어느 국장이 기자에게 이렇게 소리친 적이 있다: "너는 당을 위해서 얘기하는 거냐? 아니면 군중을 위해서 얘기하는 거냐?" 이는 '입장을 확실히 한다'는 것이 여전히 중국관료사회의 정치적 주선율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입장"의 본질은 "상황을 잘 깨달아서 줄을 잘 서는 것"이다. 세력만 보지 사람은 보지 않는다. 영원히 세력이 더 큰 쪽에 붙어야 하는 것이다. "입장"은 다음의 몇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 두 개의 집단간.. 2022. 3. 18.
100년전 중국 지식인들의 기개 글: 굴강적아아(倔强的丫丫) 채원배(蔡元培): 자유가 없는 대학교장은 하지 않겠다. 채원배는 일생동안 여러번 사직했다. 그중 북경대학 교장으로 있을 때만 하더라도 전후로 여러번 사직했다. 그는 1917년 1월 4일 북경대학 교장직에 올랐는데, 7월 3일 여원홍(黎元洪) 총통에게 사직서를 제출하여, 장훈(張勛)의 복벽(復辟)에 항의했다. 1923년 1월 17일 채원배는 다시 분노하여 사직서를 제출한다. 다음 날 그는 에 북경대학 교장직무를 사임한다는 성명을 싣는다: "채원배는 인격을 지키려는 생각에서, 사법독립과 인권에 간섭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교육당국과는 더 이상 연락을 유지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미 총통에게 국립북경대학 교장의 직을 사임하겠다고 하였다. 오늘부터 더 이상 학교 업무를 보지 않겠다. 이에.. 2021. 12. 2.
민국사대전신(民國四大戰神) 글: 천지사화(天地史話) 중화민국 40년간 전란이 끊이지 않았고, 4명의 군사기재가 나타났으며, 모두 휘황한 전적을 거두었다. 백숭희(白崇禧) 근대역사상 광서(廣西)는 전투에서 용맹하기로 이름을 떨쳤다. 계계군벌(桂係軍閥, 계는 광서의 약칭)에 적지 않은 우수한 장군들이 배출된다. 백숭희는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인물이다. 1. 1924년 이종인(李宗仁)과 연합군을 성립하여, 겨우 만여명에 불과한 부대를 이끌고 전후로 육영정(陸榮廷), 심홍영(沈鴻英)의 두 군벌을 격패시키고, 이어서 운남(雲南)이 당계요(唐繼堯)도 물리친다. 겨우 1년여의 기간만에 광서를 통일한다. 이때 그의 나이 겨우 31살이었다(1893년생). 2. 1926년, 북벌총사령부 대리참모장을 맡아 작전을 지휘한다. 1927년 8월, 직계군벌.. 2021. 3. 12.
임표의 "평형관대첩"에서 일본군을 몇명이나 섬멸했을까? 글: 상청(常靑) 중국 대륙의 전통적인 교육과 선전에 나오는 "평형관대첩"은 임표가 지휘한 팔로군 115사단 3개단이 1937년 9월 25일 평형관에서 일본제5사단 21여단 수송부대를 기습하여 1000여명을 섬멸한 전투이라고 하며, 그것은 중국이 개전이래 최초의 섬멸전이고, 중국인민의 사기를 고무시켰으며, '일본군 불패'신화를 철저히 깨트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역사도 과연 그러할까? 아래에서는 필자가 여러 각도에서 사건의 진상을 분석하고자 한다. 팔로군이 당시에 일본군을 몇명이나 죽였는지, 평형관에서 발생한 이 전투를 과연 "대첩"이라 부를 수 있는지 살펴보도록 한다. 이 전투는 임표의 최초 판본인 전보(電報)의 내용은 적 수송부대 1개대대를 섬멸했다는 것이다. 정상적인 편제라면, 일본군의 1개 대대는 .. 2020. 10.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