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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220

이릉지전(夷陵之戰)의 피해는 어느 정도였을까? 글: 기점문사(起點文史) 이릉지전은 동한말기 3대전투중 하나이고, 또한 최후의 대형전투이다. 이 전투이전에 촉한과 동오의 합작관계는 육손이 관우를 기습함으로써 끝났다. 쌍방은 전우에서 적이 된 것이다. 조위는 그래서 잠시 숨돌릴 기회를 갖느다. 촉한은 이 전투에서 일패도지했고, 명장과 정예병사들의 손실이 참혹했다. 이릉지전을 시작하기 전에, 동오는 위에서 아래까지 촉한에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어쨌든 육손이 한 행위는 군자의 행동은 아니었다. 동맹국이 적국과 싸우는 틈을 타서, 힘을 보태지 않는 것 정도라면 몰라도, 오히려 등뒤에서 칼질을 했다. 그리하여 관우, 관흥 부자는 피살되고, 유비, 유봉부자는 멀어졌으며, 맹달이 촉한에 투항하고, 더더욱 간접적으로 장비의 죽음을 가져온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2021. 2. 27.
마초(馬超): 유비에게 온 이후 활약하지 못한 이유는...? 글: 청림지청(靑林知靑) 은창종횡지(銀槍縱橫志), 북망진루천(北望盡淚泉) 광위안(廣元)에서 수십년간 살다보니, 이곳의 산수는 아주 친근하게 여겨진다. 광위안은 관광자원도 풍부하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삼국문화이다. 광위안은 양평관(陽平關)과 검문관(劍門關)의 사이에 위치한다. 그 가운데 있는 소화고성(昭化古城)은 삼국시대때 가맹관(葭萌關)이라 불렸다. 이곳은 나관중이 에서 멋진 장면을 쓴 곳이기도 하다. 즉 장비가 마초와 싸운 곳이다. 그래서 광위안의 사람들은 마초에 대하여 얘기하기를 즐긴다. 그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인물이다. 비록 이 장면은 나관중이 창작한 것이지만. 의 정수는 전반부이다. 마초도 그 정수중의 하나이다. 그에 대한 사람들의 인상은 돌연 나타나서는, 일단 유비에게 의탁한 이후 전혀 활.. 2021. 2. 15.
제갈량의 은거시절 친구 서서, 최주평, 석광원과 맹공위는 어떻게 되었을까? 글: 역사신비사(歷史神秘事) 사람은 끼리끼리 모인다. 제갈량은 삼국의 제일고수이고, 그와 함께 어울릴 수 있었다면 분명 보통인물은 아니다. 제갈량에게는 4명의 친구가 있었다. 서서(徐庶), 최주평(崔州平), 석광원(石廣元)과 맹공위(孟公威)이다. 서서의 출신이 한미한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 명은 모두 사족(士族)출신이다. 예를 들어, 최주평의 부친은 동한의 사도(司徒)였다. 지위도 높고 권력도 막강한 실력파였던 것이다. 에는 4명 중에서 서서가 가장 많이 나온다. 그러나 그가 등장하는 것은 순수하게 포전인옥(抛磚引玉)을 위함이다. 벽돌(磚)은 서서이고 옥(玉)은 제갈량이다. 서원직(徐元直, 원직은 서서의 자)이 제갈량을 추천할 때, 서서는 조조가 자신의 모친을 붙잡아 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울.. 2020. 12. 19.
유비, 관우, 장비는 어떻게 생겼을까? 글: 문재봉(文裁縫) 를 보면,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의 용모는 모두 선명한 특색이 있다. 너무나 선명하여 수천수만명 속에 있어도 바로 찾아낼 수 있고, 한번 보면 잊지 않을만한 그런 용모이다. 먼저 유비를 보자. "키는 칠척오촌, 두 귀는 어깨까지 늘어뜨려지고, 두 팔은 무릎 아래까지 내려간다. 눈으로 자신의 귀를 돌아볼 수 있고, 얼굴은 관옥(冠玉)같고, 입술은 분을 바른 것같다." 다음으로 관우를 보자: "키는 구척, 수염은 2척이다; 얼굴은 대추같고, 입술은 분을 바른 것같다; 단봉안(丹鳳眼), 와잠미(臥蠶眉)이다. 용모는 당당하며 위풍이 늠름하다." 장비는 또 어떨까?: 키는 팔척, 표두환안(豹頭環眼, 표범같은 머리에 동그란 눈), 연액호수(燕頷虎鬚, 큰 턱과 호랑이수염), 목소리는 큰 우.. 2020. 11. 20.
여포: 겨우 무명장수 2명을 죽였을 뿐인데, 왜 '삼국제일맹장'이 되었을까? 글: 취간역사(趣看歷史) 중국역사상 여포는 유명한 인물이다. 근 2천년동안 그는 '삼국제일맹장'으로 떠받들어진다. 당연히 엄격히 말하자면, 그는 '동한말기제1명장'이라 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는 일찌감치 조조에게 죽임을 당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포의 용맹은 유명하다. 그는 "비장(飛將)"이라고 불릴 뿐아니라, 에서 무한히 떠받들어져서 심지어 '유비,관우,장비' 세명과 혼자 싸우는 수준에 이르게 된다. 다만, 역사상 진정한 여포는 그렇게 대단한 전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출도한 이래 단지 2명의 무명장수를 베었을 뿐이다. 호뢰관전투에서 여포는 병사를 이끌고 출전하였다: 그는 "5합도 겨루기 전에 방열(方悅)을 참하고, 손으로 극을 들어 목순(穆順)을 주살했다." 너무나 .. 2020. 11. 19.
주유(周瑜)는 적벽대전때 동오(東吳)의 대도독(大都督)이 아니었다? 글: 장공성조(長空星照) 주유는 적벽대전을 주도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래서 후인들은 '삼국주랑적벽(三國朱郞赤壁)'이라는 말을 하게 된다. 다만 손권은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양로(兩路)의 부대를 파견했고, 각각 주유와 정보(程普)이고, 좌우독(左右督)으로 임명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적벽대전은 주유가 독립적으로 지휘한 것이 아니고, 주유는 대도독도 아니었다고 말한다. 사실의 진상은 그렇다면 어떠했을까? 대도독이라는 관직이 정식으로 나타난 것은 황무원년(黃武元年)이다. 유비가 촉한대군을 이끌고 오나라를 정벌하러 오자, 손권(孫權)이 육손(陸遜)을 대도독으로 임명하여 유비를 막게 한 것이다. 그가 지휘하는 수하의 장수들은 경력이 더 많고, 공로도 큰 사람들이었다. 예를 들어, 주연(朱然), 반장(潘璋)등이.. 2020. 10. 22.
유비는 왜 항상 다른 제후들과의 합작을 끝까지 유지하지 않았을까? 글: 장공성조(長空星照) 유비는 평원상(平原相)이 된 후, 자립의 기본적인 조건을 갖추게 된다. 그러나, 실력과 당시 천하형세로 인하여, 제후들은 부득이 다른 제후와의 합작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통해 갈등이 첨예한 적을 상대하고, 다른 제후들에게 병합되지 않을 수 있었다. 제후들이 유비와 합작한 경우는 적지 않다. 그러나 유비는 시종 다른 제후들과의 합작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했다.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일까? 유비가 평원상이 된 것은 공손찬때문이다. 공손찬이 원소와 싸우기 때문에, 유비와 청주자사 전해(田楷)는 제(齊)의 딸에 주둔했다. 조조는 서주를 공격했고, 서주자사 도겸이 도와달라고 한다. 전해와 유비는 함께 가서 그를 도와준다. 이때 유비에게는 1천여명의 병사가 있었다. 그리고 유주의 일부 소.. 2020. 10. 20.
유비가 서촉으로 들어갈 때, 유장(劉璋)을 배신하고 유비에게 온 3명의 최후는...? 글: 정회역사(情懷歷史) 익주(益州)전투는 동한말기, 유비가 익주를 빼앗기 위하여 유장과 벌인 전쟁이다. 적벽대전이후, 유비는 형주를 차지했다. 제갈량의 에 나오는 형주, 익주를 차지하는 계획을 실현하기 위하여, 유비는 일찌감치 익주로 진격하는 것을 도모했다. 이때 유장은 한중의 장로에게 제약을 받고 있었고, 다시 강대한 조조가 한중을 취하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이는 촉에 위협이 되었다. 장송(張松)은 그리하여 유장에게 유비를 불러들여 실력을 강화시키자고 건의하게 된다. 장송등의 권유로 유장은 유비를 촉으로 불러들인다. 211년, 유비는 촉에 들어간 후 처음에는 유장과 관계를 좋게 유지했다. 그러자 유장은 유비에게 병사를 내주며 그에게 장로를 치도록 한다. 다만, 유비는 가맹(葭萌) 일대까지 진군한 .. 2020. 10. 14.
여포의 부하장수들.... 글: 취담역사(趣談歷史) 여포의 일생은 기복이 심하다. 원래 병주자사(幷州刺史) 정원(丁原) 휘하의 주부(主簿)였다. 그런데 정원을 죽인 후 동탁(董卓)의 부하가 되고, 다시 동탁을 죽인다. 이각(李傕), 곽사(郭汜)에 의해 장안에서 쫓겨난 후, 연주(䆓州)를 기습하여 조조의 본거지를 거의 박살낸다. 다시 조조에 쫓겨난 후 유비가 그를 거둔다. 그 결과 유비는 양호위환(養虎爲患)하게 된다. 유비가 원술(袁術)을 토벌하러 나섰을 때, 여포가 서주를 기습한다. 그리하여 여포는 서주의 주인이 된다. 여포가 이렇게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의 무공이 고강한 점도 있지만 그의 부하들 중에서 잘 싸우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용맹한 사대호장(四大虎將)을 꼽자면, 모두 잘 알고 있는 고순(高順), .. 2020. 9. 21.
원소(袁紹) vs 원술(袁術) 글: 림림(琳琳) 삼국연의를 본 사람이라면 모두 원씨형제 원소와 원술을 알 것이다. 기실 원소와 원술 두 형제는 서로를 멸시했다. 원술이 원소를 무시한 주요원인은 원소가 서출(庶出) 즉 첩의 소생이라는 것이다. 원술의 생각으로는 그들 원씨집안은 사세삼공(四世三公)을 지내 마땅히 황제가 나온다면 원씨집안에서 나와야 하고, 첩 소생인 원소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황제에 오른다면 당연히 적출(嫡出), 즉 정실부인 소생인 자신이 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원소는 어렸을 때 백부(伯父)인 원성(袁成)의 양자로 간다. 그리하여, 원성의 후사를 잇는다. 이렇게 되니 그는 원씨집안의 적장자(嫡長子)가 된다. 그리하여 그의 지위가 원술보다 높아지게 된 것이다. 조조는 어려서부터 원소와 같이 놀았다.. 2020. 8.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