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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184

천자(天子)와 황제(皇帝): 중국고대왕권의 이중성 글: 와타나베 신이치로(渡邊信一郞) 모두 알다시피, 중국고대의 왕권은 천자와 황제라는 두 개의 칭호가 있다. 니시지마 사다오(西嶋定生)씨는 이 두 개의 칭호구별에서 출발하여 연구를 계속한 후, 처음으로 천자와 황제로 구성된 왕권의 이중성을 주제로 하여, 황제권력의 기능분화를 보여주었다. 니시지마씨는 황제육새(皇帝六璽)제도를 고찰한 후, 그중 천자삼새(天子三璽)와 황제삼새(皇帝三璽)의 구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천자삼새는 만이(蠻夷, 외국)과 제사에 사용되었고, 황제삼새는 국내정치에 사용되었다; 나아가 한나라때의 즉위의식에서도 천자즉위-황제즉위의 두 단계로 구성되었다는 점을 밝힌다. 그후, 오가타 이사무(尾形勇)씨는 즉위의식에 관하여 고찰하고, 가네코 슈이치(金子修一)씨는 옥새제도,즉위의식에 관한 .. 2023. 5. 11.
불교는 진시황때 중국에 전래되었는가? 글: 우공행자(禹貢行者) 서방세계에서 종교는 강력한 정신역량이고, 물질적인 건축물을 정신의 최고봉으로 끌어올린다. 예를 들어, 이집트의 피라미드, 그리스의 파르테논신전등은 모두 서방종교가 만들어낸 산물이다. 그러나 서방과 비교하면, 중국인들의 종교에 대한 인식은 크게 달랐다. 중국고대역사상 신권(神權)은 왕권(王權)을 능가하지 못했다. 그래서 중국의 종교관념은 서방과 비교할 때 많이 박약하다고 할 수 있다. 중국고대의 종교건축물은 서방건축물같이 휘황찬란한 격조는 없으며, 비교적 겸허하고 드러내지 않는 내향적인 기질을 드러낸다. 1. 불교의 동전(東傳)과 불탑의 건립 이런 문화적 분위기하에서, 중국의 종교건축은 외래문화의 동전과정에서 비교적 기나긴 본토화과정을 거치게 된다. 불탑은 바로 여러 종교건축물중에.. 2023. 3. 2.
춘추양대기보(春秋兩大奇寶)중 하나인 수후지주(隨侯之珠)에 관한 문헌기록들... 글: 소가노대(蕭家老大) 춘추전국시대의 수(隨)나라에는 진귀한 보물이 하나 있었는데, "수후지주(隨侯之珠)"라 불렸다. 이것은 "화씨지벽(和氏之璧)과 더불어 춘추양대기보라 불렸다. 이 양대기보는 춘추전국시기에 여러번 언급된다. 예를 들어, '변화보박(卞和報璞)", "완벽귀조(完璧歸趙)"등의 고사이다. 그러나, 최초의 봉건왕조인 진나라가 멸망한 후, "수후지주"와 "화씨지벽"은 모두 사라진다. 이건 무슨 이유때문일까? 역사상 "수후지주"에 관한 문헌기록은 다수 존재한다. 에는 이런 말이 있다: "지금 어떤 사람이 여기에서, 수후지주를 가지고 천길 절벽에 있는 참새를 쏘는데 쓴다면 세상사람들은 반드시 비웃을 것이다. 왜 그런가? 중한 것을 써서 경한 것을 얻가 때문이다." 그 뜻은 중대한 것을 버려서 경미한.. 2022. 12. 29.
"사극(史劇)"과 "사관(史觀)": 진시황을 칭송하지 말라! 글: 풍천유(馮天瑜) 무한대학 교수 1. 약 10여년전에, 필자는 라는 글을 써서, 등 청나라제왕을 칭송하는 TV드라마의 사관(史觀)이 공정을 잃고 치우쳤다고 비판한 바 있다. 폭군을 백성을 사랑한 사람으로 포장하고, 형제를 모조리 죽이고, 문자옥을 벌이며, 공론을 없애버린 음모가인 윤진(胤禛, 옹정제)을 "민심을 얻은 자가 천하를 얻는다"라고 칭송하면서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이 지경으로 왜곡시킬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류의 역사드라마는 확실히 , , , , 같은 국내외의 문학걸작들이 보여준 사회비판의 전통을 크게 역행하는것이고, 전제군주의 독재를 미화선전하는 어용품으로 전락시켰으니, 실로 사람들에게 끼치는 해악이 적다고 할 수 없다. 2 주목할 점은 그후 십여년간, 같은 류의 드라마가 계속 나왔다는 것.. 2022. 8. 31.
호해(胡亥)즉위문제: <사기>와 출토자료중 어느 것이 사실일까? 글: 난가인(爛柯人) 호해즉위건은 이천년동안 안개 속에 쌓여 있다. 역사학자들은 그가 황위를 찬탈했다고 보지만, 새로 출토된 자료는 그가 합법적으로 즉위했다고 말한다. 이 두 가지 설중 어느 것이 정확할까? 두 가지 설이 나오게 된 배후에는 어떤 역사적 이유가 있는 것일까? 1. 의 출토와 획기적 발견 2003년, 북경대학은 죽간(竹簡)을 기증받는데, 그 내용 중 일부는 였다. 는 이 책의 첫부분 "석자진왕조정출유천하(昔者秦王趙精出遊天下)"에서 나온 것이다. 진, 한 이전의 서적에는 이름을 지은 경우가 드물어, 서적의 첫마디를 가지고 명명하는 것이 하나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조정은 바로 진시황이다. 진시황의 성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진(秦), 조(趙)의 조상은 뿌리가 같아 모두 .. 2022. 8. 17.
진(秦)나라가 육국(六國)을 멸망시킨 후, 국군(國君)들의 최후는 어떠했을까? 글: 금색설역사(金色說歷史) 전국칠웅(戰國七雄)은 진(秦)나라, 제(齊)나라, 초(楚)나라, 연(燕)나라, 조(趙)나라, 위(魏)나라, 한(韓)나라이다; 주위열왕23년(기원전403년), 조, 위, 한의 삼가분진(三家分晋)후, 중화역사는 전국시대로 접어든다(시간에 대하여는 다른 견해도 있다). 그후 주안왕16년(기원전386년), 주천자는 제나라 전씨(田氏)에게 많은 돈과 재물을 뇌물로 받은 후, 실질적으로 제나라의 국정을 여러 해동안 통치해오던 전씨의 우두머리 전화(田和)를 제후(齊侯)로 봉하여, 전씨가 정식으로 제후가 된다. 주위한의 삼가분진으로부터 전씨제국(田氏齊國)까지, 그리고, 격렬한 제후간의 병합투쟁에서 살아남은 진, 초, 연의 세 대국을 합쳐 정식으로 전국시대에 가장 강대했던 7개 국가가 형성되.. 2022. 7. 21.
진시황의 왕후는 어느 나라출신이었을까? 글: 해숙설춘추(海叔說春秋) 사서를 아무리 뒤져 보아도 진시황의 왕후에 대한 기록이 없다. 소위 진황한무당종송조(秦皇漢武唐宗宋祖)중 나머지3명의 왕후에 대하여는 모두 기록이 있다. 그러나 진시황은 중국역사상 아주 중요한 군주임에도 왕후에 대한 기록이 없다. 이는 기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비록 현존하는 사서에서는 진시황의 황후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지만, 그 왕후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추측해보는 것은 아마도 가능할 것이다. 진시황의 앞 3대 즉, 진소양왕(秦昭襄王), 진효문왕(秦孝文王), 진장양왕(秦莊襄王)을 살펴보면, 진시황 가족내의 미묘한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진소양왕이 가장 총애한 후궁은 초나라여인 미팔자(羋八子, 羋月)이고, 진효문왕이 가장 총애한 후궁은 화양부인(華陽夫人)이다. 이 두 명은 .. 2022. 7. 5.
진나라가 멸망할 때, 남방에 수수방관한 50만대군이 남아있었는가? 글: 곽엽민(郭曄旻) 중국역사상 최초의 통일왕조로서 대진제국(大秦帝國)의 속흥취망(速興驟亡, 빠르게 흥성하고 급격히 망하다)은 역사상 보기 드문 경우이다. 의 “독부지심(獨夫之心), 일익교고(日益驕固)”하여, “수졸규(守卒叫), 함곡거(函谷擧)”까지 겨우 몇 년의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10여년전에 인기리에 방송되었던 역사다큐멘터리 에는 이에 대해 한 가지 해석을 내놓았다. 그것은 바로 “제국의 존망위기에 남부변방을 지키고 있던 50만 진군이 침묵을 선택했다” “철저히 자신의 손으로 만든 대제국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널리 알려졌고, 논리적으로 그럴 듯하다. 그러나 사실은 아니다. 확실히, 가의(賈誼)가 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진나라는 산동6국을 평정한 후, 군사적으로 두 가지 중요한 행동을 .. 2022. 6. 6.
중국의 비극, 항우의 실패를 비웃으면서 시작되었다. 글: 주건군(朱建軍) 생당작인걸(生當作人傑) 사역위귀웅(死亦爲鬼雄) 지금사항우(至今思項羽) 불긍과강동(不肯過江東) 항우와 유방의 군사대결은 항우의 패배로 끝이 난다. 표면적으로 보면, 누가 최고통치자가 되느냐는 백성과 그다지 큰 관계가 없다. 다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만일 항우가 서초패왕의 자리를 굳건히 지켰더라면, 중국의 미래는 아마도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항우는 복고(復古)를 더욱 원했다. 그래서 분봉제도(分封制度)를 채택한다; 유방은 비록 일부 자제들에게 분봉하였지만, 전체적으로는 진시황의 제도를 채택한다. 이것은 이번 글의 주제가 아니다. 내가 더욱 말하고 싶은 것은 항우의 실패라는 이 사건이 중국인의 심리에 미친 영향이다. 이 영향은 중국인에게 “성왕패구(成王敗寇, .. 2022. 6. 3.
진왕(秦王) 자영(子嬰) 신분의 수수께끼 글: 호연문사(浩然文史) 진시황이 창립한 진황조는 겨우 14년간 존속했다. 그러나 중국의 기나긴 역사에 무수한 짙은 흔적을 남겼다. 그러나 진황조는 지금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 많은 일들이 모호하다. 예를 들어 진왕 자영은 진황조의 마지막 황제(정확히 말하면 진왕)이지만, 역사상 그에 관한 기록은 아주 희소하다. 너무나 희소하여 그의 신세내력마저 불분명하다. 우리는 자주 그를 호해(胡亥)의 아들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렇지는 않다. 오늘날에도 전문가들조차 그의 신세내력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고 있다. 1. 자영(子嬰): 불행한 군주 자영은 위난의 시기에 진왕에 올랐다. 그러나 왕위에 겨우 40여일간 있다가 피살당한다. 진시황이 죽은 후, 조고는 이사를 끌어들여 조서를 위조한 후 공자 부.. 2022. 4.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