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우(項羽)는 아방궁(阿房宮)을 불태웠는가?
당나라때 두목이 지은 <<아방궁부>>라는 시에는 "초나라 사람이 불을 붙이니, 아까워라 초토가 되었구나"라는 구절이 있고, 사마천이 지은 <<사기>>에는 "진시황은 함양에 사람이 많고, 선왕의 궁정이 작다고 생각하였다. "내가 듣기로 주문왕은 풍에 도읍을 정했고, 무왕은 호에 도읍을 정하였으니, 풍과 호의 사이가 바로 제왕의 도읍지이다라고 하고 영을 내려 위수 남쪽 상림원중에 궁을 만들게 하였다"고 되어 있다.
2002년 10월,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의 이소방 교수는 아방궁의 유적현장을 찾아왔다. 아방궁의 건축은 이미 흔적도 없지만, 중국국가문물국은 여전히 이 유적지를 문화재로 보호하고 있다. 상세한 고고학적 데이타를 얻기 위하여 이소방은 여기에서 고고학적 탐사를 시작하였고, 흙속에 있는 궁전의 흔적을 찾아갔다.
2년여의 시간동안 서안시문물보호고고연구소와 협력하여 조사한 결과로는 진나라때의 궁전건축유적을 발견하지 못하였고, 더구나 화재로 건축이 소실된 흔적은 발견하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아방궁고고단은 "아방궁은 완공되지 못하였다. 그것은 단지 시작만 한 공사였고, 아방궁을 불태우는 사건은 근본적으로 존재할 수 없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아방궁유죽지는 현재 섬서성 서안시 서쪽 13킬로미터의 위하 남쪽이고, 진나라 수도인 함양성과는 위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소장인 유경주에 따르면 2002년 10월부터 고고대는 아방궁의 발굴면적이 3000평방미터, 조사면적은 3.5만평방미터에 이른다고 하였다.
조사과정중에, 이미 마을로 되어버린 유적지구도 모두 대상으로 하였다. 수리지와 벽돌이나 도로가 깔린 곳을 제외하고는 연화지내, 양우리, 화장실바깥, 건물사이의 공간까지도 모두 조사하였다. 그러나 진나라때의 성벽유적만 발굴되었을 뿐이다. 무너진 퇴적물에서는 대량의 진, 한시대의 기왓장이 나왔지만, 진나라 궁전건축의 유적이나 건물토대, 기둥, 통로, 배수시설등은 발굴되지 않았고, 진나라때 건축에 필수불가결한 건축재료인 와당도 발굴되지 않았다.
이로 미루어보면, 고고전문가들은 아방궁공사는 당시에 단지 전전의 기반공사와 일부 궁벽공사만 완성되었을 뿐, 그 이상부분은 지어지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렸다.
동시에 아방궁유적의 고고조사과정에서, 고고인원은 당시 불에탄 흔적은 발견하지를 못했다. 유경주에 따르면, 전설에서의 아방궁이 항우에 의하여 불태워졌다는 전설은 <<사기>>에도 기재되어 있지 않다. 이와는 달리 <<사기>>에는 항우가 진나라 수도 함양궁전의 건축을 불살랐다는 기재가 있다. 이전에, 고고전문가들은 진나라 수도 함양궁 제1, 제2, 제3호 궁전건축에 대한 고고조사중에 궁전건축유적지가 큰 불에 탄 흔적을 발견했다. 이로써 볼 때, 항우가 당시에 불태운 것은 진나라수도 함양궁 혹은 다른 진나라 궁전일 것이다.
유경주가 말하기를, 문헌의 기재에 의하더라도, 아방궁은 완공되지 않았다고 본다. 먼저, <<사기, 진시황본기>>의 기재에 따르면, 아방궁은 시작부터 공사중지까지 최대한 4년의 기간밖에 들지 않았다. 실제시공시간은 아마도 더 짧았을 것이다. 전전의 기반터를 보면, 아방궁과 같은 규모는 당시의 조건하에서는 완성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문헌에서 보면, 아방궁의 완공에 대하여 명확하게 기재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기재에 따르면, 진시황말기부터 진2세호해에서 다시 진왕 자영의 모든 정치활동이 함양궁 또는 망이궁에서 이루어지고, 모두 아방궁과는 무관하였다. 이로써 볼 때 아방궁은 지어지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