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문화/중국의 고고

지리학의 시각으로 본 "곤륜석각"에 대한 의문점

중은우시 2025. 7. 4. 15:26

글: 왕내앙(王乃昻) 난주대학 자원환경학원 교수

2025년 7월 4일 <광명일보>

<청해 황하원에서 진시황이 파견한 사람의 "채약곤륜"석각을 발견하다: 고대 "곤륜"의 지리적 위치를 실증하다>(이하 <실증>이라 함)라는 논문에서 이 석각의 내용과 그 지리적 위치는 중국인들이 오랫동안 논쟁해온 "곤륜", "하원"의 정확한 위치문제를 해결했다고 말했다. 이 석각의 "진위확인"에 대하여 격렬한 논쟁이 오가고 있어, 학술상의 큰 이슈가 되고 있어, 본문에서는 지리학의 시각에서 개략적으로 분석해보고자 한다.

역사지리의 시각에서 본 "하원(河源)"과 "곤륜(昆侖)"

고대에 "하원"과 "곤륜"에 대한 지리적 인식은 역사지리의 범주에 속한다. 그 해독은 자연히 선진(先秦)의 지리저작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 전국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우공(禹貢)>에는 "도하적석(導河積石)"이라는 기록이 있다. "적석(積石)"에 관하여, 일설에 따르면, 지금의 감숙성과 청해성의 경계에 있는 소적석산(小積石山)이라고 본다. 이 산은 청장고원에서 황하고원으로 넘어가는 대표적인 산맥이자 문화지리경계선이기도 하다. 또 다른 설에 따르면, 지금의 청해성 아니마경산(阿尼瑪卿山)이라고 본다. 이 산은 대적석산(大積石山)이라고도 부른다.

"하출곤륜(河出昆侖)"이라는 말은 <산해경(山海經)>에 나온다. 그중 <오장산경(五藏山經)>에는 "곤륜지구(昆侖之丘)...하수출언(河水出彦)"과 "돈훙지수출언(敦薨之水出焉), 이서류주어유택(而西流注於泑澤). 출어곤륜지동북우(出於昆侖之東北隅), 실유하원(實惟河源)"이라는 기록이 있다. 돈훙지수는 지금의 소륵하(疏勒河)에 비정할 수 있다. 기련산(祁連山)에서 발원한 소륵하는 유택(즉, 羅布泊)으로 흘러들어간다. 그리고, 명,청이전에는 황하원두(源頭)로 보는 근거였다. <오장산경>에서는 하원에 대한 "적석설"과 "곤륜설"을 통합하여 이렇게 말한다: "적석의 산에는 그 아래 석문(石門)이 있고, 하수(河水)가 나와 서쪽으로 흐른다." 그리고 또한 "불주지산(不周之山)....동망유택(東望泑澤), 하수소잠야(河水所潛也)"라고도 한다. 당시 적석산의 먼 하원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적었기 때문에, 나포박을 하원으로 삼았다. 이렇게 선진시기 지리체계에서 황하의 "중원복류(重源伏流)"의 잘못된 인식이 형성된다.

진소양왕(秦昭襄王)이 의거(義渠)등 융(戎)을 멸하고 농서(隴西), 북지(北地)의 2개 군(郡)을 설치한다. 그리하여 진나라의 강역은 조하(洮河)유역까지 확장된다. 진시황이 육국을 통일한 후, 군현제로 전국을 통치하여 농업발전을 보장했다. 고지대의 추운 기후는 농업생산에 장애가 되었고, 농경지구는 청장고원 동쪽산록의 해발3,300미터 이하지역에 대체로 분포한다. 그리하여 진나라의 국경에 대하여 "서로는 임조(臨洮), 강중(羌中)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적석상보다 먼 곳은 "기미(羇縻)", "요외(徼外)"의 저(氐), 강(羌), 융(戎)족의 땅이었다. 진나라사람들의 황하에 대한 지리적인식이 하원지역까지 미치기는 어려웠다. 청나라때 3차례에 걸쳐 황하의 원류를 탐사하고 "하원도(河源圖)"를 작성한다. 그러나 여전히 "중원복류"설에 머물러 있었다. 오늘날에도 황하원두의 지리확정은 여전히 논쟁이 남아 있다.

"곤륜"이라는 명칭은 <산해경> <우공>등 고대서적에 나온다. 곤륜산은 "하수지원(河水之源)"으로 인식되었다. 곤륜산의 진실성과 지리적 위치에 대하여, 2천여년동안 학자들은 논쟁을 많이 벌였다. <산해경>에 대하여 일부의 학자들은 신뢰할만한 기록이지만 후인들이 섞어서 뒤죽박죽으로 정리했다고 보고, 일부의 학자들은 상상중의 신화내용이라고 본다. <산해경>과 <우공>에 기록된 곤륜산은 지역조합상 서북, 고한(高寒), 유사(流沙), 옥의 산지(産玉), 유목업, 여러 강물의 원천등의 지리적 특징을 지닌다. 기련산을 중심으로 한 청장고원의 동북부가 그런 특색에 가장 부합한다."곤륜"이 청장고원의 동북부에 있다는 지리적 인식은 역사문헌으로도 증명이 된다. <한지(漢誌>의 기재에 따르면, 서한(西漢)은 금성군(金城郡) 임강현(臨羌縣)(지금의 청해성 황원현)에 곤륜산사(昆侖山祠)를 설치하고, 황수(湟水), 약수(弱水, 지금의 흑하)등 명확한 지리표지를 남긴다. 돈황군(敦煌郡)에는 곤륜장(昆侖障)을 설치하였는데, 기련산의 남적단수(南籍端水, 지금의 소륵하)에서 발원하기 때문이다.

19세기이래, 근대지리학의 중점은 대륙내부와 양극의 과학고찰로 넘어갔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현대지리학의 산계(山係, 성립원인이 관련있고, 뻗어가는 방향이 같은 여러 개의 산맥으로 구성된 지리적 단위를 가리킴, 현저한 지질적특성을 지니고, 대형구조단위를 형성하게 된다)의 개념이 중국에 도입된다. 러시아의 탐험가 니콜라이 프르제발스는 중국서부지역에서 여러 차례 고찰을 한 후에 앞장서서 지도에 곤륜산의 윤곽을 그렸다. 파미르고원에서 발단하여, 타림분지와 청장고원의 북쪽을 이어 동쪽으로 차이다무분지에 이르러 두 갈래로 나뉜다. 한 갈래는 동북으로 뻗어나가 아르긴산맥(阿爾金山脈)과 기련산맥이 되고, 다른 한 갈래는 동남으로 뻗어가서 파안객랍산(巴顔喀拉山),아니마경산등의 산계를 이룬다.

<실증>에서는 진나라때 이미 황하원을 성숙해(星宿海)로 보고, 곤륜산은 파안객랍산 및 그 주변지역이라는 관점을 인정했다고 하였는데, 이는 진나라이후 하원문제가 변화한 역정을 설명하기 어렵다. 그리고 곤륜산의 위치는 계속하여 서쪽으로 이동하여 정확한 위치를 정하기 어렵다는 지리적 사실에 비추어 볼 때 현재로서는 단지 문헌적 근거가 박약한 가설일 뿐이다.

내몽골 만덕랍산의 서하 및 그 이후의 암각화 명도차이

자연지리시각에서 "곤륜석각"에 대한 의문점

"곤륜석각"의 진위문제에 대하여, 지지자와 회의자들은 이미 역사학, 문자학, 문본학, 역일, 서법등 방면에서 근거를 내세우며 논쟁을 벌여 왔다. 여기에서는 자연지리적인 각도에서 "곤륜석각"에 대한 5가지 의문점을 제시하도록 한다.

첫째, "곤륜석각"의 소재지층은 사암(砂巖)이다. 그런데 왜 현무암(玄武巖)이라고 부르는가? 황하는 파안객랍산의 북록에서 발원한다. 역사적으로는 카일곡(卡日曲)를 정원(正源)으로 본다. 동북으로 흘러 약고종열곡(約古宗列曲), 찰곡(扎曲)과 만나서, 동쪽으로 찰릉호(扎陵湖), 악릉호(鄂陵湖)로 들어가고, 마다(瑪多)에 이르러 하원지구(河原地區)를 형성한다. 이곳의 지층은 삽첩기 자홍색사암, 분사암, 석회암, 중성과 중기성화산암을 위주로 한다. 판암(板巖), 결정회암(結晶灰巖) 및 백악기 자색사암과 분사암등도 있다. 양호지구는 비록 100미터가량높이의 저구(低丘)가 있기는 하지만, 대면적의 기암(基巖)이 드러나 있지는 않다. 그리하여, "곤륜석각"의 위치선정이 제한된다. 각종 "곤륜석각"의 사진을 보면, 그 소재지층은 중생대 사암이라고 판단된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 석각의 발견과 논증에는 비교적 장기간의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고 하는데, 사암은 풍화를 견디지 못한다. 현무암은 풍화를 견디는 능력이 강하고, 석각을 보존하는데 유리하다. 이것이 의문중 첫번째이다.

2. 고한지구(高寒地區)이며 산소가 부족하다고 하여 하원탐험을 저해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수레가 여기까지 왔다(車到此)"는 것은 확률이 낮다. 찰릉호는 청장고원의 복지(腹地)에 위치하고 연강수량이 200-400밀리키터이며, 생장기는 일반적으로 90-100일이다. 고원아한대반건조 내지 반습윤기후지역이다. 항상 폭설 혹은 폭풍설이 발생한다. 마다(해발 4,272미터)는 연평균기온이 영하 4.1도이고, 1월의 평균기온은 영하 16.8도, 7월의 평균기온은 7.5도이다. 연간 기온차이가 24.3도에 이르고, 일교차는 14도에 이른다. 기온차이가 비교적 크고, 계절적으로 땅이 얼기 때문에, 석각을 장기간 보존하는데 불리하다. 하원지구는 해발 4,300미터가량이고 산소는 해면의 58%밖에 되지 않는다. 아직 생리적인 한계는 아니지만, 추운 날씨와 산소부족 그리고 건조하고 바람이 많이 부는 혹독한 자연조건하에서 만일 강력한 물자보급체계가 갖추어지지 않으면, 도착하기 어려운 곳이다. 진나라때의 치도(馳道) 혹은 역로(驛路)는 많은 경우 도성과 군현치성(郡縣治城)을 중심으로 관할구역내에서 사방으로 뻗어나가 있었다. 가장 멀리는 변경까지 이어졌다. 겨울에 하원지구로 출발하면, 강물이 언 것을 이용하여 순조롭게 황하를 건너갈 수는 있지만, 생산력이 발달하지 않은 진나라때 하원지구에 도로를 만드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수레가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아주 확률이 낮은 일이다. 이것이 두번째 의문이다.

셋째, "곤륜석각"은 지의(地衣)가 없다. 그리하여 '확실히 이후'의 유적인지 진위를 판별하기 어렵다. "곤륜석각"의 소재지는 고산초원지대이다. 암석의 표면에는 일반적으로 각종 지의(地衣)가 붙어서 자란다. 지의는 진균(眞菌)과 광합성생물간의 안정적이고 상호이용하는 공생체이다. 남북양극에서 적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육지, 고산이건, 평원이건, 사막이건, 초지이건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보도에 따르면, 청장고원의 직겅이 2밀리미터가 넘는 암석면의 요혈(凹穴)은 통상적으로 30년내에 황록지도의등 선봉물종이 점거한다고 한다. 최근 들어 유출된 고해상도 사진의 "곤륜석각" 꼭대기부분에 황록과 갈색의 조개모양의 지의가 부착되어 있다. 조개모양의 지의는 생존기가 길고, 고산초원지대의 암석과 빙적표력(氷磧漂礫)에서 즐겨 자란다. 형태는 원형을 띄는 경우가 많고, 반경과 생상연대는 일종의 지수곡선관계가 있어, 고해발지구의 연대학연구를 진행하는데 사용된다. 유감스럽게도, "곤륜석각"의 각면, 각흔, 요혈에는 모두 조개모양의 지의가 보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지의를 통해 그것이 확실히 '이후 시기의' 유적일 가능성여부를 따질 수가 없게 되었다. 왜 지의가 사라졌는지, 인위적으로 훼손한 것인지, 아니면 '곤륜석각'의 연대가 오래되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없었는지, 이것이 의문의 세번째이다.

넷째, "곤륜석각"의 자체(字體)간에는 명도(明度) 차이가 존재한다. 그리하여 확실히 진짜라고 인증받기 어렵다. 암석은 자연풍화상태하에서의 각흔의 명도는 물체가 광선이 비추어지게 됨에 따라 반사되는 밝기 정도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줄어든다. 암석표면의 새로운 각석은 색깔이 백색이나 회백색을 띈다. 자연풍화상태하에서 갈삭암석의 표면과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암석에는 철, 망간등의 물질성분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석각이 개방된 상태에 노출되어 바람이 불고, 해가 내리쮜며, 비를 맞는 등으로 인해 자연풍화가 이루어진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표면의 색깔 및 광택은 점차 어두워지고 옅은 갈색으로 바뀐다. 그러므로, 석각의 명도와 연대의 관계를 비교해보면 연령이 많고 적음을 판단할 수 있다. 곤륜석각은 마애석각으로 벽면의 총길이가 82센티미터, 가장 넓은 곳이 30센티미터이다. 이처럼 좁은 범위내에서 암석의 성질차이등으로 인해 각흔의 명도에 차이가 나타날 수는 없다. 그러나 전체 각면을 보면, 하부의 색깔은 선명하고, 중상부는 색깔이 비교적 짙다. 이는 풍화시간에 차이가 있음을 드러내준다. 특히 "월(月)", "도(到)" 두 글자의 각흔명도는 다른 자체들보다 희거나 선명하다. "채(採)"자는 새로 떨어져나간 면에 새겨진 것같은데, 어떻게 과학적으로 해석할 것인지. 이것이 의문의 네번째이다.

다섯째, 사암은 풍화를 견디지 못한다. "곤륜석각"이 어떻게 지금까지 상대적으로 완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을까? 해발고도의 차이가 크지 않고, 동일한 자연지대의 경우에, 기후조건이 암석의 풍화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무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암석의 성질차이, 압력을 견디는 정도, 암석의 구조등은 비교적 명확하게 영향을 받는다. 서로 다른 암석은 서로 다른 광물로 조합되어 있고, 서로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암석이 쉽게 부서지는지 아닌지에 영향을 미친다. 풍화속도와 비율의 차이는 서로 다른 암석유형의 석각, 비각에서 드러난다. "곤륜석각"의 암석구조는 절리발육(節理發育)이다. 지표면에 근접할수록 추위에 풍화되는 강도가 강하다. 각면의 아래쪽에는 여러 속이 떨어져 나갔다. 석각의 글자주변은 비교적 매끄럽고, 각흔은 깊이가 일정치 않다. 아랫부분에는 U형의 오목한 부분이 있다. "곤륜석각"의 글자흔적이 비교적 분명한 정도와 비교해보면, 항풍화능력이 비교적 강한 진나라때의 태산각석(泰山刻石), 역산각석(嶧山刻石)은 이미 심각하게 풍화되어 거의 글자를 알아볼 수가 없다. 다만, "곤륜석각"은 풍화가 비교적 가벼워 주요한 정보가 완전하게 보존되었다. 이것이 의문의 다섯째이다.

"지상득래종각천(紙上得來終覺淺), 절지차사요궁행(絶知此事要躬行)" 필자는 현지고찰과 1차데이타자료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상의 분석에 잘못이 있을 수 있다. 고해상도사진으로 보면, "곤륜석각"의 뒤언덕에는 두께 약 20센티미터의 빙연풍성황토가 있다. 그 안에는 분명히 적지 않은 석각의 '비밀'이 보존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관련 전문가가 권위있는 시대판정결과와 진위결론을 내려주어, 위에서 언급한 의문점들을 합리적으로 설명해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