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고(博古): 24살의 중공총서기
글: 조대부화실(趙大夫話室)
현재 24살이라면 최소한 마마보이이거나 조금 싹수가 있는 경우라면 대학본과를 졸업하고 석사과정에 들어갔을 것이다;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미 결혼하여 아이를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고, 하루종일 은행을 위해 일하면서, 각종 대출금을 갚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100년전의 민국때 난세에 영웅이 나타났다. 적지 않은 20여세의 사람들이 이미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 박고는 바로 그중 걸출한 인물이다. 그는 24살때 중공총서기에 올랐고, 수십만군대를 지휘했다; 28세에 "좌경"착오를 범하여, 영도대권을 내놓았고, 39세때 섭정(葉挺), 왕약비(王若飛)등과 같은 비행기를 타고 연안으로 돌아가다가 비행기사고로 사망한다. 박고의 일생을 짧았지만, 그는 중공당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의 실패가 있었기 때문에, 모택동의 성공이 있을 수 있었다.

진방헌(秦邦憲)은 박고의 본명이다.
진독수(陳獨秀)가 처음 당의 총서기가 되었을 때, 이미 42살이었다. 1년간 임시책임자가 되었을 때 구추백(瞿秋白)은 이미 28살이었다; 그후 향충발(向忠發)이 총서기에 올랐을 때 그의 나이는 이미 48살이었다; 박고이후 모택동이전에 당의 주요책임자는 장문천(張聞天)이 있었는데, 그는 낙보(洛甫)라고도 불렸다. 그가 취임할 때 나이는 이미 35살이었다. 박고는 24살의 나이로 중공의 최고책임자가 되었으니, 공전절후의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가장 놀라운 점은 그의 나이가 아니라, 그의 자격이다. 역대 대표대회는 당장(黨章)의 규정 혹은 관례에 따라, 당의 최고책임자를 혹은 중앙위원회가 그 위원중에서 "선거"로 선출하거나, 최소한 중앙위원회에서 선거로 선출된 정치국의 위원들이 "추천"하여 맡았다. 다만, 박고가 1931년 중앙을 접수할 때, 그는 중앙정치국위원이 아니었을 뿐아니라, 중앙위원도 아니었다. 그저 보통의 당원이었다. 모택동은 나중에 그를 '신당원'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일약 당의 최고책임자로 올라섰다. 이는 중공당사에서 절대로 다시는 없을 일이었다.
- 박고의 집안내력
박고의 조적(祖籍)은 무석(無錫)이고, 그의 부친 진조황(秦肇煌)은 청나라말기의 거인(擧人)이었다. 강남 4대명원(名園)중 하나인 "무석기창원(無錫寄暢園)"은 사백여년동안 계속하여 진씨집안의 소유였다. 1952년에 국가에 헌납한다. 박고는 북송의 저명한 사종(詞宗) 진관(秦觀)의 제32대손이다. 그의 15대조는 "구전삼조태보(九轉三朝太保), 양경오부상서(兩京五部尙書)"를 지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라 할 수 있었고, 유명한 기창원은 바로 그가 만들었다. 그래서 기창원은 "진원(秦園)"이라고도 불린다. 강희제, 건륭제 조손이 14차 하강남때 무석으로 왔고, 기창원에 머무른 바 있다.
2. 박고의 이야기
박고는 1925년 9월 상해대학 사회학과에 합격한다. 구추백과 운대영(惲代英)등 교수들이 직접 그들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과목을 강의한다. 그들의 교육과 영향을 받아, 얼마 후 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당시는 국공합작으로, 상해대학 당조직은 그를 상해국민당 특별시당부로 보내어, 국공합작업무에 종사하도록 한다.
1926년 10월, 국민당 상해특별시당부의 추천으로 중국공산당의 비준을 거쳐, 박고는 모스크바 중산대학으로 가서 공부한다. 소련유학때, 당시 소련당국의 요구에 따라 러시아이름 Boryhob를 쓴다. 중국어로는 "박고낙부(博古諾夫)"로 음역한다. 나중에 그는 '박고'를 필명으로 쓴다. 1930년 귀국하고, 1931년 3월, 단중앙서기(團中央書記) 온유성(溫裕成)이 부정부패로 면직당한다. 1931년 4월, 그는 단중앙서기를 맡는다. 9월, 중공정치국 후보위원 고순장(顧順章)이 국민당에 체포되어 변절함에 따라, 중공중앙정치국이 상해에 성립된다. 그는 정치국상위가 되어 주요책임자중 한명이 된다.
박고는 중국사회의 실제상황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맹목적으로 코민테른(공산국제)의 지시를 집행하는 길로 들어선다. 그의 "좌경"착오는 중공에 거대한 손실을 끼친다. 그러나, 그는 진심으로 잘못을 인정했고, 자신이 당에 조성한 손실에 대해 후회막급했다. 그의 중공 7대의 발언기록을 보면 이렇게 말했다: "각종 악영향은 내가 가장 주요한 책임자이다. '그중의 하나'가 아니라, 가장 주요한 책임자이다." 그래서, 연안의 중공7대의 발언중 반성을 깊이 하여, 전체 당의 양해를 받는다.
박고의 인품은 중공의 긍정과 칭찬을 받는다. 비록 그는 준의회의때 권력을 잃었고, 모택동에게 자리를 넘겨주었지만, 그는 전혀 원망하지 않았고, 그후에 모택동과 장국도(張國濤)간의 투쟁이 벌어졌을 때 박고는 여전히 모택동의 편에 선다. 이런 깔끔한 인품은 당내의 고위층에게 높이 평가받았다. 그들은 박고는 사람됨이 정직하고, 한번도 음모궤계를 꾸민 적이 없었으며, 광명뢰락(光明磊落)했고, 능상능하(能上能下)하며, 당의 결정에 복종하고, 당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확실히 그러했다. 그후 박고는 중공에 큰 공헌을 했다. 예를 들어, '서안사변'의 평화적 해결때 그는 중공대표단의 단장이 되어, 주은래, 섭검영(葉劍英)과 함께 국민당과 계속하여 담판을 벌였고, 절충하여 결국 항일통일전선을 건립한다; 남방 13개성의 당조직을 회복시켰고, 신사군을 조직하고, 국민당에 구금된 많은 공산당원과 군중을 구해냈다. 1938년에는 "신화일보"를 창립하였고, 1941년에는 "해방일보"를 창립하여 사장 겸 신화통신사 사장이 된다. 그는 중공의 신문사업의 기반을 닦은 사람이다.
모택동은 서거하기 전에, 중공역사상의 11차례의 노선투쟁을 회고한 바 있다. 각각 진독수, 구추백, 이입삼(李立三), 나장룡(羅章龍), 왕명(王明), 장국도, 고강(高崗)/요수석(饒漱石), 팽덕회(彭德懷)의 기회주의노선, 그리고 유소기(劉少奇), 임표(林彪), 등소평(鄧小平)의 반혁명의 수정주의노선이다. 이 회고에서 알 수 있듯이 중공은 박고를 단독의 노선투쟁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왕명의 계통으로 귀속시켰다.
3. 박고의 평가, 혼인 및 사후의 일들
중공의 그에 대한 평가는 중국공산당의 초기지도자중 한명이고, 중국공산당 신문사업에서의 탁월한 개척자와 기초를 놓은 사람중 한명이다. 박고는 무산계급혁명가, 이론가, 선전가이며 사회활동가이다. "해방일보"를 창업했다. 일찌기 중공중앙 총책임자, 홍군총정치부 대리주임을 맡아 왕명의 "좌"경 착오노선을 추진한 바 있고, 후기에는 대량의 마르크스레닌저작을 번역하여, 전체 당에 마르크스레닌주의이론을 보급하여 수준을 제고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27년, 박고는 소련에서 중국대표단의 구성원이었떤 유군선(劉群先)을 만나고, 두 사람은 1928년 5월 소련에서 결혼한다. 두 사람은 2남2녀를 가진다. 유군선은 소련에서 실종된다. 나중에 장월하(張越霞)와 결혼한다. 건국이후, 장월하는 전후로 전국공소합작사총사 추소국 부국장, 일용잡품국 국장, 물가국 국장등의 직위를 맡는다. 장월하는 또한 중공8대 대표, 제2, 3, 4, 5기 전국정협위원을 지냈다. 동시에 전국부련(全國婦聯)의 제3기 집행위원이다. 1972년 2월 12일, 장월하는 심장병을 앓게 되는데, 치료를 받았으나 사망한다. 향년 69세이다.
큰딸: 진마아(秦摩亞). 북경사범대학 교수
둘째딸: 진신화(秦新華). 위생부 과기부 부사장. 이철영(李鐵映, 중국원로 이유한(李維漢)과 등소평의 전처 김유영(金維映)의 아들)과 결혼했다.
셋째 딸: 진길마(秦吉瑪).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남, 일찌기 교통부 연구소에 재직했고, 나중에 전국인대 법률위원회에서 은퇴하였다.
큰 아들: 진강(秦剛). 어려서 요절하다.
둘째 아들: 진강(秦剛, 큰아들과 같은 이름이다. 1936년 12월 - 2010년 7월 29일). 해남건설개발총공사 총경리를 지냄. 그외에 설명해야할 점은 이 진강은 2년전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을 지낸 진강과 이름이 같다는 것을 제외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다.
셋째 아들: 진철(秦鐵, 1940년 - 2012년 9월 18일). 1964년 청도함정지휘학원에서 공부하고, 문혁때 타격을 받는다. 나중에 천진원양공사에 재직하며 선장이 된다.
비록 박고가 세상을 떠난지 오래 되었지만, 당내 고위층의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의 자녀를 잘 보살펴 주었다. 예를 들어, 1950년대, 매번 박고의 기일을 맞이할 때, 장월하가 외출하여 집에 없을 때면, 주덕(朱德) 부부가 그의 자녀를 중남해로 불러 식사를 같이 하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