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들은 왜 말을 하지 않는가?
글: 종검화(鍾劍華)

예전 봉건왕조시절에는 "지식인(知識分子)"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저 "독서인(讀書人)", "서생(書生)", "유생(儒生)"같은 칭호만 있을 뿐이었다. 이들 칭호의 실질적인 의미는 기실 별 차이가 없다. 그것이 가리키는 것은 성현의 책을 읽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봉건시대에 일반인들이 서적을 접촉하기는 쉽지 않았고, 지식은 독점되었다. 일반인은 '공자'를 만날 기회가 없었고, 그저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으며, 범부속자(凡夫俗子)로 살아야 했다.
광의의 독서인은 서생 혹은 유생이라는 신분을 가지지만, 기실 그것이 목적은 아니다. 수단일 뿐이다. "만반개하품(萬般皆下品), 유유독서고(惟有讀書高)"라는 말은 비록 숭고하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상황에서 아마도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성현의 책을 읽는 것은 무엇을 위함인가?" 바라는 것은 바로 설사 "십년한창무인문(十年寒窓無人問)"하더라도, 언젠가 "일거성명천하문(一擧成名天下聞)"하는 것이다. 독서가 어찌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겠는가. 일단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으로부터 관직을 얻게 되면, 독서인, 유생, 서생에서 일거에 사대부(士大夫)로 신분이 바뀌게 된다. 조정의 녹봉을 받는 외에 "식군지록(食君之祿), 담군지우(擔君之憂)"하며, 봉건왕조를 위해 목숨을 바쳐 일한다. 관료로서 순조롭게 승진하면 조정의 중신이 될 수도 있고, 황상의 총신이 될 수도 있다. 설사 요순같은 군주를 모시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집안의 명예는 드높일 수 있다. 이건 중국의 전통 독서인들의 최고이상이다.
소위 조정대신은 결국 단지 노재(奴才)일 뿐이다. 이런 노재의 성격은 청나라때 더욱 분명해진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당시에 만일 한족관료였다면, "노재"라는 말을 자신의 입으로 말해야 했을 뿐아니라, 그럴 자격이 있는지 여부조차도 황제로부터 확인을 받아야 했다.
위의 몇 가지 이야기는 당연히 봉건독재왕조의 방식이다. 현대문명의 각성과 더불어, 사람들은 자신이 독서구국(讀書救國)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환상을 꿈꾸면서, 몽롱한 '지식인'의식을 갖기 시작했으며, 옛날 범중엄(范仲淹)이 말했던, "선천하지우이우(先天下之憂而憂), 후천하지락이락(後天下之樂而樂)"(천하가 근심하기 전에 먼저 근심하고, 천하가 즐거워한 후에 즐거워한다)는 대아(大我)의 마음가짐을 되살렸다. 지식이 있으면 책임을 져야 한다. 청나라말기부터 지식인의 각서은 시작되었다. 국민을 환기시키고, 변혁을 추진하며, 혁명을 선전하는데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또 적지 않은 독립인격을 고집하던 지식인은 확실히 현대문명으로의 과도적인 과정에서 희생당한다.
민국이후, 비록 봉건왕조를 벗어났지만, 다만 맞이한 것은 지속되는 군벌내전, 일본침략, 국공내전이고 그후에 신중국이 건립된다. 이 백여년간, 지식인의 삶은 기실 좋지 않았다. 신해혁명이후, 국가가 지속적으로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많은 지식인들의 꿈은 깨졌고, 그저 내일은 더 좋아질 것이라고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돌연 발견하게 된다. 이 백여년동안 지식인을 가장 존중하고, 지식인들이 백가쟁명하던 시기는 원래 북양군벌의 내전이 빈번하던 그 십여년간이었다.
그 단계에, 군벌 무장들도 지식을 존중해야한다는 것을 알았고, 지식있는 사람이 당시의 정치곤경을 해결하기 위한 아이디어와 대책을 제시해주기를 바랬다. 그러므로, 책을 많이 읽은 사람들은 반드시 관직을 갖지 않더라도, 혹은 반드시 학술문화업무에 종사하지 않더라도, 각자 자신의 견해를 내놓고 공개적으로 변론하며 시정을 비판할 수 있었다. 심지어 공가점(孔家店, 유교)을 타도하자, 구문화를 타도하자고 할 수도 있었고, 신문화운동을 내놓을 수도 있었고, 미국식민주가 좋은지 영국식민주가 좋은지도 논쟁을 벌였다.
당시, 어떤 군벌 혹은 정치야심가에 대하여 지식인이 비난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 당시에 그로 인하여 목숨을 잃거나 피해를 입은 지식인은 아주 적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샀던 노신(魯迅)은 한때 조계에 피난해 있었지만, 계속하여 일을 할 수 있었고, 숭고한 명성도 얻을 수 있었다.
나중에 명목상 중국을 통일하 장개석도 비록 뼛속부터 독재자이지만 지식인에 대하여 최대한 그는 잘 대해주었다. 문일다(聞一多)와 같은 경우는 극소수였다. 만일 믿지 않는다면, 호적등이 어떻게 전혀 피해없이 살아갈 수 있었는지를 알아보면 이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여년동안, 지식인을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사람같지 않고, 귀신이라고 하기에는 귀신같지도 않은' 것은 원래 신중국을 이끈 공산당이다. 모택동은 자신을 지식인으로 포장하기를 좋아했다. 그를 통해 그는 주덕(朱德), 하룡(賀龍)같은 거칠기만 한 원수들 앞에서 자신이 한단계 더 뛰어나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했다. 다만 뼛속부터, 가장 지식인을 무시한 사람은 기실 모택동이다. 그가 이끄는 공산당은 지식인에 대해 가장 심하게 박해를 가한 봉건독재정치집단이다.
중공의 창시자중에서 지식인 기질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게 있었다. 그러나 이대쇠(李大釗)는 일찌감치 죽어버렸고, 진독수(陳獨秀)는 일찌감치 권력투쟁에서 패배했다. 주은래는 비록 프랑스유학경험이 있지만, 그의 기질은 기술관료에 가까웠고, 지식인이 아니었다. 모택동의 기세하에, 그는 심지어 이연영(李蓮英)같은 역할을 했고, 기껏해야 평생동안 노불야를 위해 일한 이홍장(李鴻章)처럼 능신(能臣)일 뿐이다.
연안(延安)시절, 지식인에 대한 박해는 이미 등뒤에서 조용히 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놓고 이루어졌다. 왕실미(王實味)의 최후, 정녕(丁寧)의 타락은 지식인의 전형이 되며, 194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반세기이상 전체 신중국의 역사를 관통한다. 공산당이 천하를 차지한 후, 호풍(胡風)집단 청산에서, 지식인을 목표로한 반우파운동까지, 그리고 계쏙하여 취노구(臭老九)를 타도한 문화대혁명까지, 그리고 다시 개혁개방이후의 반자유화, 민주운동분자박해까지, 그리고 오늘날의 인권변호사탄압까지, 모든 독서인기질이나 포부를 보존하고 있는 사람은 주변으로 밀려나거나, 타도되거나 혹은 목숨을 지켜내지 못했다.
이 피비린내가 충만하며, 문인을 모욕하는 과정에서, 당연히 또 다른 지식인의 신분과 배경이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완전히 지식인의 사명을 버리고, 심지어 인류의 양심을 배반하며, 전심전력으로 공산당관료계층을 위해 봉사하는 지식인이 된다. 공산당은 기본적으로 그들이 "담군지우"할 것이 필요하지 않다. 그들의 가장 주요한 역할은 바로 권력자를 위해 포장하고 화장해주는 것이다. 신중국에는 곽말약(郭沫若)이 있었고; 신홍콩에는 유조가(劉兆佳), 유진붕(劉振鵬)같은 이연영의 화신같은 거짓학자들이 있었다. 최근 들어서는 더더욱 인재가 많이 배출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