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후)

등소평 vs 화국봉: 20일간의 싸움...

중은우시 2025. 6. 20. 23:27

글: 섭영열(葉永烈)

1978년 5월 11일

<캠브리지 중국인민공화국사>는 이렇게 평가한다: 1978년 5월 11일, <광명일보>에 필명으로 발표된 글이 실린다. 제목은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이다>이며, 이 문장은 등소평을 옹호하는 역량이 두번째로 내는 소리가 된다.

이 글의 작자인 호복명(胡福明)은 당시 남경대학 철학과 교수이고, 중공당원이다. 나중에 그가 말한 바에 따르면, 1977년 가을 그가 이 글을 발표할 때, '양개범시(兩個凡是)'에 반대한 것은 완전히 그가 스스로 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만일 '양개범시'같은 교조적인 입장을 반대하지 않으면 등소평이 새로 권력을 장악할 희망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이다>라는 글은 '양개범시'를 겨냥하여 썼다는 것이 명확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문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양개범시'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때, 화국봉은 여전히 최고지도자였고, 정면으로 '양개범시'를 공격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이다>는 글에서는 단지 "심도있게 사인방을 비판한다"는 정도의 기치를 내걸 수밖에 없었다.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이다>는 글은 4부분으로 나뉘고, 각각 이런 제목을 붙였다:

  • 진리를 검증하는 표준은 사회실천일 수밖에 없다.
  • 이론과 실천의 통일은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다.
  • 혁명스승은 실천을 진리를 검증하는 모범으로 삼을 것을 견지해왔다.
  • 여하한 이론도 계속하여 실천의 검증을 받아야 한다.

호요방은 당시 친구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렇게 예언했다: "이 글은 앞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12일 심야: 오냉서가 한밤중에 전화를 걸다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이다>가 <광명일보>에 발표된 그 날은 조용히 지나갔다. 이는 아마도 <광명일보>가 지식계를 상대로 하는 신문이고, 사람들은 이를 단지 '학술적'인 글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 날, 폭풍이 몰아쳤다. 많은 신문이 이 글을 전재했고, 이 글은 '깊은 내력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중공고위층의 주목을 끈다.

<광명일보> 총편집 양서광(楊西光)은 신문계의 원로이고,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이다>는 글을 크게 띄워야했다. 그러나 <광명일보>의 영향력만으로는 힘들다. 그리하여 그는 신문업계의 동료들인 신화사, <인민일보>와 <해방군보>의 지지를 요청한다.

발표전에 양서광은 신화사의 사장 증도(曾濤), <인민일보> 총편집 호적위(胡績偉)와 <해방군보> 사장 화남(華楠)에게 상황을 통보하고, 알렸다. 그들은 양서광에게 이 글의 '출처'를 파악했다. 왜냐하면 당시, 그들은 '출처'가 없는 글은 함부로 전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양서광은 그들에게 말한다. 이 글은 호요방(胡耀邦)이 읽어보고 결정을 내린 것이라고.

이렇게 하여, <광명일보>에 발표된 당일, 신화사에서 이를 전송한다. 통상적인 상황이라면, 중요한 글인 경우에만 신화사가 전송한다.

신화사가 전송하자, 다음 날 즉 5월 12일, 7개 성시급의 신문들에게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이다>라는 글을 전재한다. 5월 13일, 전재된 성시급의 신문은 16개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인민일보>와 <해방군보>가 5월 12일 이 글을 전재했다는 것이다.

<인민일보>는 중공중앙의 기관지이다. 전재된 글은 일반적인 글이 아닐 것으로 인식된다. 그러하기 때문에, 이는 한 권위있는 인사의 눈길을 끌게 된다. 그는 <인민일보>에 전재된 그날 저녁에 이 글에 대해 격렬한 비판을 한다.

그건 밤중인 11시였다. 전화 한통이 <인민일보> 총편집실로 걸려온다. 당직을 서고 있던 총편집 호적위는 전화를 받으면서 기록을 남겼다. 전화에서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이다>는 글은 "깃발을 꺽는 것(砍旗)"이며, 영향이 "아주 나쁘다"고 하였다. 여기서 '감기'라는 것은 '모택동사상의 위대한 붉은 깃발을 꺽는 것'을 말한다.

호적위는 신문사에서 오래 근무하면서 형성된 업무습관대로 한편으로 말을 들으면서, 한편으로 기록했다. 왜냐하면 신문사에는 자주 상급부서로부터 전화가 걸려오기 때문이다. 반드시 한편으로 들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기록해야 한다. 그래야 전달하기에 편하고, 나중에 확인하기도 편리하다. 아래는 호적위가 기록한 전화기록이다:

"이 문장은 방향성에서 잘못을 범했다. 이론적으로도 잘못되었고, 정치적 문제는 더욱 크다. 아주 나쁘다. 아주 나쁘다.

문장은 진리의 상대성을 부인했고, 마르크스주의의 보편적 진리를 부인했다. 문장은 마르크스주의는 장기간의 실천을 통해 증명된 이후에 진리가 되었다고 했다; 레닌주의는 제국주의시대의 개별국가에서 혁명승리를 취득할 수 있다는 학설인데, 제1차세계대전과 10월혁명의 실천이후 진리라고 증명되었다고 했다. 즉 레닌이 이 학설을 제출했을 때는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반드시 23년을 기다린 이후에 실천으로 진리라고 증명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열렬히 옹호하고, 그것을 관철하기 위해 분투했는가? 글에서는 모든 것을 의심하라고 했고, 진리는 믿을 수 없고, 알수도 없다고 했다. 상대적인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진리는 처음에 제기되었을 때는 진리가 아니며, 실천의 검증을 받아야 비로소 진리라고 했다. 이건 원칙적인 잘못이다.

문장은 정치적으로도 아주 나쁘다. 아주 나쁘다. 작자는 '사인방'이 수정주의가 아니고, 교조주의라고 했으며, 모택동사상을 왜곡하고 함부로 고친 것이 아니라, 모주석의 교조를 끝까지 끌어안고 놓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현재 주로 '사인방'반대, 수정주의반대를 해야할 것이 아니라, 교조주의반대를 해야 한다고 했다. 예를 들어 문장에서 말하는 것은 사람의 정신적인 족쇄를 부수어야 하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만이 진리이다'를 반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위 성역을 깨버린다는 것이고, 모택동사상을 깨버린다는 것이다. 문장의 결말에서 마땅히 반대해야할 것은 "마르크스주의, 모택동사상이 현재 조문에 그냥 눌러앉아있는 것이다. 심지어 공식으로 제한하고, 죽이며, 무한하게 풍부한 혁명실천을 잘라버리는 것이다." 즉 소위 교조주의에 반대해야 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싸워야 하며, 모택동사상을 향해서 전투를 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장은 많은 폭을 들여서 마르크스, 엥겔스가 어떻게 <공산당선언>을 수정하였는지를 언급했다. 모택동이 어떻게 자신의 글을 수정했는지도 언급했다. 작자의 의도는 우리가 모주석의 지시를 의심하고, 모택동사상을 수정하도록 제창하는 것이며, 모주석의 지시도 부정확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고, 모주석이 지시한 것을 강시처럼 따라서는 안된다는 것이며, 성경처럼 숭배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아주 분명하게, 작자의 의도는 '감기'이다. 문장은 임표의 "한마디로 만마디를 맞선다", "한마디 한마디가 진리이다"를 비판하느넫, 설마 한 마디로 한 마디를 맞서는 것도 안된단 말인가? 설마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진리가 아니어야 된단 말인가?

모택동사상은 우리의 단결의 기초이다. 만일 모주석의 지시가 잘못되었다고 의심하기 시작하고, 수정하려고 하면, 사람들이 모두 나서서 어느 것이 잘못되었고 ,어느 것을 고쳐야 할지를 놓고 싸워야 한다. 우리 당이 어떻게 단결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국가는 어떻게 안정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 글은 정치적으로 모택동사상이라는 붉은 깃발을 꺽는 것이니, 아주 나쁘고 아주 나쁜 것이다."

전화는 <인민일보> 제2대 총편집 오냉서(吳冷西)에게서 걸려온 것이었다.

호적위는 전화를 받은 후, 전화기록을 넘겨주어 인쇄하게 했다. 그리고 양서광등 관련인사들에게 보낸다.

호적위는 오냉서의 전화는 오냉서 개인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고, 보통의 한차례 전화가 아니라고 여겼다. 그 말투는 완전히 상사가 부하를 혼내는 것이었다. 오냉서의 전화는 아무렇게나 건 것도 아니고, 얘기하는 것이 매우 논리적이고, 순서가 분명했으며, 관점도 선명했다.

그러했기 때문에, 호적위는 오냉서의 전화기록은 인쇄하여 소범위내에서 관련인사들에게 참고하도록 보낸 것이다.

양서광의 부인 계보경(季寶卿)의 회고에 따르면, 그날 저녁, 그녀와 양서광은 북경의 한 호텔에 머물고 있었다. 그들이 머무는 호텔의 전화번호는 아는 사람이 아주 적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돌연 전화벨이 울린 것이다...

계보경은 이렇게 기억한다. 양서광은 호적위가 전달한 오냉서의 전화내용을 듣고 호적위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는 신경쓸 것없다! 그가 뭐라고 말하든 마음대로 말하라고 해라.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이다>는 글에는 잘못이 없다!"

전화를 받은 후, 계보경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양서광은 간략하게 그녀에게 몇마디 해준다. 말을 마치고, 양서광은 코를 골며 깊이 잠이 들었다. 조금 전의 전화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이. 그러나 계보경은 밤새도록 잠에 들지 못했다....

13일: 호요방은 말한다: "역사의 조류는 앞으로 흘러간다"

다음 날인 1978년 5월 13일, 어떤 사람이 호요방의 집에서 아주 엄숙하게 말한다: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이다>는 글은 아주 나쁜 작용을 한다. 당중앙의 주요지도자들의 이견을 신문에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그는 말했다. 사인방을 분쇄한 후, 가장 먼저 해야할 것은 당내의 안정과 단결이고, 특히 주요지도자들간의 단결이다. 이런 글이 발표되면 당내의 단결에 불리하다.

바로 이날, 또 어떤 사람이 신화사 사장 증도에게 전화를 걸어 말한다: "신화사는 <실천이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이다>라는 글을 전송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건 잘못된 글이다." 증도는 그 자리에서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바로 이 날 오후, 호요방은 북경 동성구 부강후통(富强胡同)의 집에서 중공중앙당교 <이론동태>편집팀회의를 개최한다. 이전의 회의와 다른 점이라면, 인민일보에서 2명을 보내어 회의에 참석하게 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오냉서가 전날 밤에 호적위에게 걸어온 전화기록을 내놓았다. 이어서 사람들 사이에 토론이 이어진다.

어떤 사람은 호요방에게 이렇게 알려줬다. 화국봉이 말하기를, "이론문제는 신중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호요방은 즉시 반박하여 말한다: "이론문제는 용감해야 한다!"

호요방은 매우 직설적이었다. 그는 말했다. 역사의 조류는 앞으로 흘러가는 것이고, 이건 어떤 사람도 막을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은 호요방이 말한 "역사의 조류는 앞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제목으로 반박문장을 쓰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호요방도 동의했다. 호요방이 말했다. 문장은 진리는 논쟁을 하면 할수록 더욱 분명해진다는 것부터 쓰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

나중에, 중공중앙당교에서 <역사의 조류는 앞으로 흘러간다>는 글이 1978년 6월 20일 제70기 <이론동태>에 실린다. 같은 날, <인민일보> 1페이지 오른쪽 절반에 이 글이 실린다. 작자는 "악평(岳平)"이라고 되어 있었다.

이 글에서는 이렇게 지적한다:

"또 한 종류의 사람이 있다. 임표, 사인방의 방파체계에도 속하지 않지만, 임표, 사인방의 독을 아주 깊이 마신 사람들이다. 이들 동지들은 노선상, 사상상, 감정상, 작풍상으로 임표, 사인방의 방식을 따르는 것이 비교적 편하다. 인민들이 들고 일어나 임표, 사인방을 비판하는 것이 항상 불편했다. 그들의 사상맥박은 억만의 인민과 하나가 아니다. 인민들이 즐거워하면, 그들은 기분이 나쁘다. 그들이 내딛는 발걸음은 새로운 역사조건과 전혀 들어맞지 않고, 전진하는데 장애가 된다."

17일: 왕동흥이 질문한다: "어느 중앙의 의견인가?"

<광명일보>의 글이 발표된 6일째 되는 날인 1978년 5월 17일 사태가 격화된다. 중공중앙 부주석 왕동흥(汪東興)이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왕동흥은 한 소규모 회의에서 "정치국의 몇몇 동지들과 자신의 생각을 나눠보았다." 이 몇몇 동지는 바로 화국봉, 기등규(紀登奎)와 오덕(吳德)이다.

왕동흥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 글의 핵심은 모택동사상을 "족쇄" "성역"이라고 말한 것이다.

왕동흥은 세 마디로 개괄했다: "이 글은 이론적으로 황당무계하다. 사상적으로 반동이다. 정치적으로 깃발을 꺽는 것이다."

왕동흥이 물었다: "이 글의 작자는 '특약평론원'인데, '특약'을 한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모른다!"

왕동흥은 이런 말도 덧붙인다: "만일 실천이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이라면, 현재 당이 제출한 11대노선은 진리가 아니란 말인가? 4개현대화를 실천한 후에 비로소 진리라고 증명되는 것이란 말인가?"

왕동흥은 또한 이렇게 말한다: "이론은 항상 신중해야 한다. 특히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이다>라든지 <노동에 따른 분배(按勞分配)의 사회주의원칙을 관철집행하자>라는 두 개의 글은 우리가 다 보지 못했다. 당내외에서 의론이 분분한데, 실제로는 창끝을 모주석의 사상에 겨냥하는 것이다. 우리의 당신문이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 이게 어느 중앙의 의견인가? 모택동사상을 견지하고 옹위해야 한다. 조사해보고, 교훈을 받아들이고, 인식을 통일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당연히 사상이 활발해지는 것은 좋은 점이 있다. 다만 <인민일보>는 당성(黨性)을 가져야 하고, 중앙선전부는 잘 처리해야 한다."

왕동흥은 <인민일보>가 당성이 없다고 비판했다.

왕동흥은 또한 장평화(張平化)를 비판한다. 너는 중공중앙선전부장을 어떻게 하는 것이냐. 도대체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가.

화국봉은 결국 이런 의사를 표시한다. 중앙선전부의 책임자에게 '진리표준'의 토론에 '의사를 표시하지말고' '끼어들지 말도록' 요구한다.

18일: 장평화는 각지에 '인사를 한다'

5월 18일 오전, 중공중앙 부주석 왕동흥은 중공중앙선전부장 장평화와 웅복(熊復), 왕수(王殊)를 불러 만난다.

이때, 왕복은 막 <홍기(紅旗)>잡지의 새로운 총편집인으로 임명되었고, 전날 부임했다. 왕수는 막 퇴임한 <홍기>잡지의 총편집인이었다.

신구 총편집인 인수인계문제를 얘기한 후, 왕동흥은 이렇게 말한다:

"이론문제는 특별히 신중해야 한다. <인민일보>는 아주 신중치 못하다. 특히 실천표준과 노동에 따른 분배의 두 글은 아주 신중하지 못했고, 당내에서 의론이 분분하다. (이 두 글을 사전에) 나는 모두 보지 못했다. 이게 어느 중앙이 결정한 것인가? 조사해봐야 한다. 노동에 따른 분배같이 큰 문제는 당의 정책에 관련되는 것인데, 어찌 심의를 받지 않았단 말인가? 실천표준에 관한 들도 아주 좋지 않다. 창끝을 모주석에게 향했다. (우리는) 모택동사상을 옹호해야 한다."

왕동흥은 특별히 장평화에게 당부하여 말한다: "평화동지가 잘 처리해달라."

그날 오후, 장평화는 긴급히 전국교육공작회의의 대표단 단장들을 조어대빈관으로 불러 회의를 연다.

전국교육공작회의는 5월 16일에 폐막되었고, 각 대표단은 각각의 부서로 되돌아가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장평화의 긴급통지를 받는다. 이는 대표단의 단장들이 각 성시의 문화교육서기이거나, 선전부 부장이었기 때문이다.

장평화의 말은 왕동흥처럼 그렇게 노골적이지 않았다. 그는 먼저 아주 "객관"적으로 말한다:

"<광명일보>에서 발표한 <실천이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이다>는 글에 대해 나는 전혀 상반된 두 가지 의견을 들었다. 하나는 아주 좋다는 것이고, 하나는 아주 나쁘다는 것이다. 나는 한번 읽어보았지만 아직 잘 모르겠다. 최소한 이것이 아주 중요한 문장이라는 것은 증명된다. 여러분들도 한번 읽어보아라. 소규모 범위내에서 서로 다른 의견을 제시해도 좋다. 예를 들어, 성, 시, 구당위의 고위간부들 사이에서."

이어서, 장평화는 이 "중요한 문장"에 대해 "우회적이고 은유적으로" 얘기한다.

"<인민일보>가 발표했다고 하여 이미 정론이라고 생각지는 말라. 이후 <인민일보>에서 내놓았건 신화사에서 내놓았건 서로 다른 의견이 있으면 의론할 수 있고, 중앙선전부에 의견을 제시해달라. 모주석은 말한 바 있다. 어디에서 왔든지 코로 냄새를 맡아 봐야 한다고. 의사표시를 다른 사람을 따라갈 필요는 없다. 마땅히 진리에 따라 일처리 해야 한다. 진리이면 견지하고, 그렇지 않으면 견지할 필요가 없다; 태도표명은 선명해야 하고, 자신의 견해를 감출 필요는 없다. 무슨 일이건 중앙선전부에 전화를 해서 말해달라. 뭐든지 좋다."

장평화는 대표단 단장들이 돌아간 후, 각자의 성위, 시위의 상위에게 보고하라고 요구했다. 장평화는 두 손을 맞잡고 말했다: "부탁합니다!"

이 말은 실제로 전국 각 성위, 시위에 '인사를 한 것'이다. 그들에게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이다>에 대하여 의사표시하는데 조심하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언비어가 곳곳에서 나타난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인민일보>가 엄중한 잘못을 저질렀다. 중앙은 이미 공작조를 파견해서 진주시켰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이다>의 작자는 체포되었다!"

19일: 웅복이 <홍기>에게 "신중"하라고 말한다.

5월 19일, 신임 총편집인 웅복은 <홍기>잡지 편집부에 "시정연설"을 한다.

웅복은 왕동흥이 말한 강화정신을 전달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왕 부주석은 <홍기>잡지의 업무에 관심이 아주 많다. 나에게 이론방면에서 잘 처리할 것을 요구했다. 무슨 문제가 있으면 중앙선전부의 장평화 동지에게 보고해서 지시를 받아도 되고, 왕부주석에게 보고해도 된다."

웅복은 자신의 <홍기>잡지의 간행방침에 대한 견해도 밝힌다: "<홍기>잡지의 임무는 완전하고 정확하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선전하는 것이다. 이론상으로 완전하고 정확하게 모택동사상을 선전하는데 치중하고, 모택동사상을 옹호하고, 각종 모택동사상을 벗어나려는 경향과 투쟁해야 한다."

옹복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일깨워준다: "이론문제는 신중해야 한다. 이 점은 특히 주의하라. 이론문제에서, 모택동사상을 옹호할 것인가, 아니면 옹호하지 않을 것인가, 이 문제는 잘 고려해야 한다. 당내외의 사상과 이론동태에 주의하라. 사상이론전선은 아주 활발하다. 이 방면의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무슨 경향이 있는지, 특히 모택동사상을 벗어나는 경향이 있는지."

그후, 화국봉과 왕동흥의 지시에 따라, <홍기>는 침묵을 지키고, "의사표명을 하지 않는다."

나중에 엄복은 이렇게 회고했다:

1978년 5월, 나는 막 <홍기>잡지사의 총편집인이 되었다. 당시 이론계에서는 진리표준문제에 관한 토론이 전개되고 있었다. 나의 잘못은 바로 1978년 7월 모두 5기의 <홍기>에 진리표준문제에 대한 토론에 참가하지 않은 것이다. 즉, 실제로 당시 당중앙공작을 주재하던 동지의 당간행물에 관해 제출한 "불개입" 지시를 집행한 것이다. 이 문제에서, <홍기>잡지의 잘못은 바로 나의 잘못이다."

5월 11일 <실천이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이다>가 <광명일보>에 발표된 후 5월 19일까지, 짧은 8일동안, 화국봉과 왕동흥, 등소평과 호요방은 모두 이 글에 대해 자신의 뜻을 표명한다.

마침내, 쌍방은 전군정치공작회의(全軍政治工作會議)에서 싸움을 전개하게 된다.

29일: 화국봉은 "단결"과 "기율"을 강조했다.

전군정치공작회의는 1978년 4월 27일부터 6월 6일까지 개최된다.

회의시작때, 위국청(韋國淸)은 <새로운 역사조건하에서 정치공작의 우량한 전통을 발휘하여, 아군의 전투력을 제고하자>라는 제목으로 주제보고를 했다. 보고제목의 "새로운 역사조건하에서"를 어떤 사람은 반드시 "새로운 역사시기"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유는 화국봉이 얘기한 것은 "새로운 역사시기"이니, 반드시 당중앙과 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생각하는 것은 "모주석의 말은 바꿀 수 없다; 화주석의 말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외에 위국청의 보고 가운데 "아군은 무산계급성격이다"에 대하여도 의문을 제기한다. 이유는 "모주석이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5월하순, 6월상순, 회의는 막바지에 접어들었고, 중공중앙주석 화국봉과 중공중앙부주석 등소평을 모셔서 말씀을 듣기로 한다.

화국봉은 5월 29일 강화를 하고, 6월 4일 <인민일보>에 발표된다. 제목은 <화주석의 전군정치공작회의상에서의 강화>이다.

등소평은 6월 2일 강화하고, 6월3일 <인민일보>에 발표된다. 제목은 <등부주석이 예리하게 모주석의 실사구시의 빛나는 사상을 얘기했다>였다.

이 두 가지 제목으로 인하여, <인민일보>는 아주 강하게 비판을 받는다. 당시의 <인민일보> 부총편집인 이장(李莊)은 이렇게 회고한다:

전혀 생각지도 못하게 두 개의 제목으로 심각한 비판을 받았다. 두 개의 제목이 왜 다르냐는 것이었다. "너희는 무슨 뜻이냐?" 나는 이렇게 보고할 수밖에 없었다: 제목은 내용에 따라 만든 것이고, 만일 잘못이 있으면 내가 책임지겠다. 아무런 뜻도 없다.....이 일은 이렇게 끝났다.

당시 <인민일보> 총편집인 호적위는 이렇게 회고한다. "상부"에서의 비판은 왕동흥에게서 나온 것이다. 왕동흥은 이렇게 질문했다: "너희는 등부주석의 말씀에 대하여는 모택동사상을 '예리하게 설명했다'고 말했는데, 설마 화주석의 말씀은 모택동사상을 '예리하게 설명하지' 않았단 말인가?

화국봉의 말씀중의 '주요명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화국봉의 강화에 나오는 이 구절이다:

우리나라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건설은 제1차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이 승리로 끝난 후, 새로운 발전시기에 진입했다. 11년에 걸친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은 무산계급독재하의 정치대혁명이고, 중국공산당 및 그 영도하의 광대한 혁명인민군중이 국민당반동파와 장기간 투쟁해온 것의 연속이다. 무산계급이 자산계급 및 일체의 착취계급과투쟁한 것의 연속이다. 마르크스주의가 수정주의와 투쟁한 것의 연속이다. 이들 투쟁의 역사적 대결전인 것이다. 이번 대결전에서, 우리는 전후로 유소기, 임표, 사인방이라는 3개의 자산계급사령부를 분쇄했고, 우리 당은 역사상 3차례의 중대한 노선투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새로운 발전시기에, 우리 국내의 주요모순은 여전히 무산계급과 자산계급간에 사회주의도로와 자본주의도로간의 모순이다.

화국봉은 강화에서 단결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기율을 준수할 것을 강조했다:

우리는 8억인구, 3,500만당원을 가진 대국이다.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건설의 새로운 발전시기에 인식을 통일하고, 정책을 통일하고, 계획을 통일하고, 행동을 통일해야 한다.

각급 지도간부들은 앞장서서 당성을 강조하고, 대국을 살피며, 민주를 발양하고, 기율을 준수해야 한다.

말할 것도 없이, 화국봉은 이름을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기율을 준수하지 않는 사람"을 비판했다.

6월 2일: 등소평이 가장 강력한 지지를 보내다.

6월 2일, 등소평이 전군정치공작회의에서 강화하면서 비록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이다>를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인민일보>에서 말한 "예리하게 모주석의 실사구시의 빛나는 사상을 설명했다"는 것처럼 실제로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이다>라는 글에 가장 강력한 지지를 보냈다.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이다>라는 글은 호요방이 심의하여 정한 것이고, 등소평은 보지 않았다. 이 글이 발표된 후, 처음에는 등소평이 주목하지 않는다. 다만 문장이 논쟁을 불러오자, 등소평은 자세히 보게 된다.

1978년 8월 19일, 등소평은 문화부 핵심영도소조를 접견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

<광명일보>에 글이 올라왔다. 당시에는 주의하지 않았다. 나중에 누군가 반대한다고 하여 찾아서 읽어보았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부합한다. 뒤집어서는 안된다. 나는 6월의 강화에서 지지할 것이다.

양서광의 부인 계보경의 회고에 따르면, 등소평이 강화를 하자, 해군사령원 유거영(劉居英)이 즉시 양서광에게 전화를 건다. 간략하게 등소평이 말한 내용을 알려주었고, 등소평이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이다>를 지지했다고 말했다. 양서광은 거기에 고무되어 즉시 차를 타고 유거영의 집으로 찾아가서, 한꺼번에 회의에서 인쇄발행된 등소평의 발언원고를 읽어본다.

<해방군보> 부사장 요원방(姚遠方)도 발언원고의 초안작업에 참여했다. 요원방의 회고에 따르면, 등소평은 사전에 그의 주요의견을 얘기했을 뿐아니라, 직접 펜을 들어 800자를 썼다. 즉 강화에서 실사구시를 논의하고, 모든 것은 실제에서 출발하며,이론과 실천은 결합되어야 한다는 부분이다. 요원방은 말한다. 이 800자는 한 글자도 고치지 않고 발언원고에 넣었다.

등소평의 강화는 4부분으로 나뉜다: 첫번째 문제, 실사구시를 얘기한다. 두번째 문제, 새로운 역사조건을 얘기한다; 세번째 문제, 파(破)와 립(立)을 얘기한다. 네번째 문제, 이신작칙(以身作則, 스스로 모범을 보인다)을 얘기한다.

등소평이 첫번째 문제를 얘기할 때, 선명하게 "양개범시(兩個凡是)"파를 비판한다;

우리들중 일부 동지는 매일 모택동사상을 얘기한다. 그러나 모택동동지의 실사구시는 잊거나 버리거나 심지어 반대한다. 일체는 실체에서 출발하여, 이론과 실천이 결합되어야 하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의 근본관점이고 근본방법이다.

이뿐아니라, 어떤 사람은 누가 실사구시를 견지하고, 실제에서 출발해서, 이론과 실천을 결합시켜야한다고 하면 그가 엄청난 죄를 지었다고 얘기한다. 그들의 견해는 실질적으로 단지 마르크스, 레닌, 모택동 동지의 원래 했던 말을 베끼자는 것뿐이다. 똑같이 따라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건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어긋나고, 모택동사상에 어긋나며, 중앙의 정신에 위반한다. 그들에 말하는 이런 문제는 작은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어떻게 마르크스레닌주의, 모택동사상을 대해야 하는지에 관한 문제이다.

강화전문은 다음 날 <인민일보>에 실린다. 거기에 '경향성이 강한 제목'을 달게 된다: <등부주석이 예리하게 모주석의 실사구시의 빛나는 사상을 얘기했다>. 이는 즉시 광범위한 주의를 끌었고, 확실히 '양개범시파'에 큰 타격이 된다.

5월 11일 이후를 회고해보면, 짧은 20일동안 급격한 변화가 있었고, 첨예한 투쟁이 있었따. 실로 일석격기천층랑(一石激起千層浪)이라 할 수 있다.

11일, "양개범시"를 성토하는 격문이 발표된다;

12일, 심야에 오랭서가 전화를 걸어 비판한다.

13일, 호요방이 말한다. "역사의 조류는 앞으로 흘러간다"

17일, 왕동흥이 묻는다. "어느 중앙의 의견이란 말이냐!"

18일, 장평화가 각지에 '인사를 한다'

19일, 웅복이 <홍기>에 "신중"하라고 얘기한다.

29일, 화국봉이 "단결"과 "기율"을 강조한다.

6월 2일, 등소평이 가장 강력한 지지를 보낸다.

기실 이 20일간의 격렬한 투쟁은 그저 서막일 뿐이었다. 이어서 더욱 큰 범위의 투쟁이 지속된다